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호머 헐버트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독립운동가

감효전(甘曉典) 2012. 2. 10. 22:20

 

 

 

 

 


        


 

헐버트 박사의 한국사랑

 

헐버트(Homer B. Hulbert)박사는 구한말 1886년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교육자, 역사학자, 한글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문명화와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분이다.

 

헐버트박사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 헤이븐(New Haven)에서

대학총장이자 목사인 아버지와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미국 동북부의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다트머스(Dartmouth)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 대학을 2학년까지 다니고

1886년 7월 4일 조선의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육영공원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양반집 자제들에게 영어 및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우리나라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다.

 

헐버트박사는 육영공원에서 5년 동안 재직하면서

근대식 학교의 틀을 잡으면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고

아울러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저술했다.

‘사민필지’는 천문, 세계지리 및 각 나라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등을 총망라한

서양세계를 알리는 최초의 사회지리 총서이다.

 

헐버트박사는 ‘사민필지’ 서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상류층에서 어려운 한문만을 쓰고 오

히려 편하고, 쉬운 한글 쓰기를 업신여김에 한탄을 한다.

 

이어서 헐버트박사는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을 발견하면서

한글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한다.

 

1903년에는 미국의 스미스소니안(Smithsonian Institute) 학회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기고하면서

한글이 대중의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극찬을 한다.

또한 헐버트박사는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지내고, 대한역사 등의 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우리나라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한다.

아울러 을사늑약 직후에는 우리 국민들에게 “교육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면서

교육의 강화를 통해 일본을 이겨야 한다고 역설한다.

헐버트박사는 언더우드를 도와 우리나라 개신교 첫 세례를 증거했고,

동대문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노량진교회의 설립예배 인도를 하는 등 선교사로서 크게 활약한다.

 

 



고종이 즐겼고 헐버트가 채록한 아리랑
 

헐버트 박사는 우리나라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를 했다.

YMCA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YMCA 태동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YMCA를 통한 청년들의 계몽운동에 적극 헌신한다.

아울러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한국인의 혼(魂)인 아리랑을 오선지에 음계를 붙여

최초의 아리랑 채보자가 된다.

아리랑이 오늘날같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는

이 헐버트박사의 최초의 채보가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역사를 단군시대 이래 조선왕조의 구한말까지를 총 망라한

일 천 여 쪽에 달하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쓴 역사학자이며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사회제도, 풍속 등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 신복룡 역)’를 저술하여

우리나라를 종합적으로 해외에 알렸다.

 

헐버트박사는 감리교 출판기관인 삼문출판사 책임자를 지내면서

우리 출판문화에 크게 공헌할 뿐만 아니라 서재필 박사를 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는데 크게 일조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이자 감리교에서 출판했던

‘한국소식(Korean Repository)’의 편집과 운영을 담당했으며,

이어서 1901년부터 6년 동안 ‘한국평론(Korea Review)’을 발행하고

직접 주필을 맡았다. 특히 한국 평론을 통하여 일본의 부당성을 크게 성토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직후에는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애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는 등 조선의 아픔을 함께하면서

고종과의 우의를 돈독히 한다.

 

헐버트박사는 우리나라 국권을 지키기 위해 두 번이나 고종황제의 밀사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전 고종황제의 친서를 들고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하였으나

미국 국무성과 백악관이 친서를 받지 않자

한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 미국이 한국을 도와 일제의 침략야욕을 저지해야 한다면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호소를 한다.

 

이어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특사로 임명되어

고종황제에게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였으며,

또한 일본경찰의 미행 하에 일반 여행으로 가장하고

부산, 일본, 블라디보스토크을 거쳐 헤이그에 직접 가서

우리나라의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특히 헤이그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성토한다.

이때 헐버트박사는 일제의 야만적인 우리나라 문화재 약탈 사건을 예로 든다.

즉 우리나라 국보 제86호인 경천사 석탑 약탈 사건이다. 그 전말은 이렇다.

 

 



경천사십층석탑 반환요구, 직필의 힘을 보여준 헐버트 박사
 

일본 궁내부대신인 다나카라는 자가 1907년 1월 황태자 순종(純宗)의 결혼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런데 그 다나카는 무엇인가 기념물을 한국에서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한국을 잘 아는 일본사람들과 상의한 결과 개성 부근 풍덕면에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좋다고 하여 가져가기로 했다. 급기야는 고종을 알현하여 고종에게 석탑을 달라고 요청했다.

경천사 석탑은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이 기록되어있어 1348년에 세워졌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중국황실이 고려에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 우리나라로서는 유서 깊은 문화재다.

고종은 이 탑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온 백성 전체의 것이고 훌륭한 문화유산이기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다고 하면서 다나카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85명의 일본군을 보내 석탑을 뜯어내어 우마차에 싣고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다. 일본 축하사절이 와서 이런 일을 했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헐버트는 이 소식을 믿을 수 없었지만 직접 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풍덕면으로 달려가 보니 우마차 자국만 남아있고 탑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헐버트는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을 만나서 자세한 실상을 파악했다.

 

특히 석탑을 옮길 때 전문가가 아닌 초보자들이 성급하게 헐어 내렸음이

돌의 파편이 현장에 수북함을 볼 때 분명했다.

헐버트는 현장을 답사한 뒤 집으로 와서 바로 ‘Japan Chronicle’ 이라는 신문에

석탑이 있었던 현장 사진과 함께 사건 내용을 보냈다.

 

내용이 신문에 보도 되자 일본의 여론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Japan Mail’이라는 신문은 어떻게 일본의 특사가 이런 야만적 행위를 할 수 있느냐면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했다가 결국 진실이 밝혀지자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신문은 이러한 사건은 단지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서 얼버무렸다.

일본 정부 역시 처음 이것은 한국의 무책임한 모험가들이 한 짓이라고 하면서

이 사실을 부정했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역시 당황했다.

헐버트박사는 이후에도 이 사건을 일본의 불법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표로서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뉴욕포스트(New York Post)’ 등의 국제신문에 기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에서도 이 사실을 폭로했다.

 

일본은 결국 이 석탑을 후일 돌려주게 되었고

이 석탑이 우리나라 정부창고에서 뒹굴다가 2005년 용산 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용산 중앙박물관에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졌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 원래 석탑이 있던 자리인 경천사에 원형대로 복원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는 한국의 땅에 묻히고 싶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 이후 일제의 박해로 우리나라를 떠나 미국에 살면서

계속적으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 박사가 초청을 한다.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63년 전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제물포에 또다시 발을 디딘다.

헐버트박사는 한국 땅을 밟는 것에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만

한 달여의 지친 여정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서거한다.

 

우리나라 정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헐버트박사의 영결식을 거행하고 헐버트박사는 평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고

평소 소원한 대로 양화진에 묻혔다.

 

이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헐버트박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50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는 매년 8월 5일 양화진 묘지에서

헐버트박사 추모식을 거행하며 학술대회 등의 추모 사업을 하고 있다.

금년에는 미국에서 헐버트박사 손자 내외를 초청하여

각계인사, 후손들과 함께 추모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 김동진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장
- 월간문화재사랑, 2009-07-09




 

 

 

출처 :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글쓴이 : Gijuzzang Drea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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