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한 작물 중에서 시래기는 ‘감는’ 솜씨가 특히 중요한 식재료다. 쫄깃하면서 질기지 않아야 하고 구수하면서 질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해남에서 수확해 겨우내 대관령 매운바람에 말린 유기농 새싹 시래기는 청정한 산 기운과 야무진 손끝 맛이 녹아 있는 2월의 별미다.
하루 세 끼 밥상을 차려 내는 일이야 이력이 붙으면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지만, 철따라 나는 나물을 갈무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를 놓치지 않는 바지런함도 중요하지만 눈썰미와 정성까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물마다 말려야 하는 철이 따로 있고, 삶아서 불리는 방법이 다르며, 맛을 내는 양념의 배합이 조금씩 차이가 나니 결국 오랜 세월 묵은 녹록지 않은 살림 솜씨가 따라야 한다.
2월은 시래기가 제 맛을 내는 달이다. 곱게 다진 시래기를 듬뿍 얹어 지은 시래기밥에 양념간장을 쳐서 비벼 먹는 맛이나, 된장 풀어 구수하게 끓인 시래깃국에 밥을 말아 곰삭은 배추김치를 얹어 먹는 맛은 다른 어떤 반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에 곁들이는 아홉 가지 묵나물 중 첫손에 꼽는 것이 바로 시래기나물이다. 다른 나물은 없으면 없는 대로 슬쩍 두어 가지 빼놓을 수 있지만 시래기를 빼고서는 묵나물을 챙겼다고 치레하기가 멋쩍다.
원래 시래기는 김장을 끝내 놓고 한숨 돌리기 무섭게 갈무리해야 하는 재료다. 깍두기와 배추김치에 넣을 무를 잘라내고 남은 시퍼런 무청을 시들기 전에 데쳐서 말려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렁주렁 엮은 시래기를 담장이나 처마 밑에 매달아 말리던 모습은 늦가을 시골 풍경 중에서도 유독 풍성하고 정겨웠다.
누르스름하게 마른 시래기를 한 움큼 덜어내 삶아 불리면 겨우내 구수한 국거리, 나물거리로 그만 한 게 없었다. 겨우내 시래기를 먹으며 자란 세대 중에는 시래기를 ‘질깃질깃한’ 음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웬만큼 씹어서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먹기 사나운 거친 음식으로, 지푸라기 같기도 하고 여물 같기도 하니 잘 불리고 잘 삶아야 제 맛을 볼 수 있는 식재료였다.
시래기는 물을 넉넉히 담은 냄비에 넣고 푹 삶은 다음, 불에서 내려 물을 바로 갈지 말고 몇 시간 두었다가 건져 찬물에 여러 번 헹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애초에 충분히 데쳐서 말리면 먹을 때 슬쩍 삶아도 되지만 아예 생으로 말리거나 제대로 데치지 않고 말리면, 먹을 때 다시 삶아서 오랜 시간 물에 담가야 제대로 된 맛을 낸다. ‘삶고 또 삶아도 물러지지 않는다’는 푸념은 엄살이 아니다.
삶아낸 제 물에 식혀야 나물이 부드럽다는 것도 상식이다. 나물을 조리할 때는 슬쩍 볶아서는 맛이 안 난다. 충분히 볶은 다음 육수를 붓고 냄비 뚜껑을 덮은 상태에서 뜸을 들여야 부드럽고 구수한 맛이 살아난다. 옛 어머니들이 오곡밥에 곁들이는 무국이나 쇠고기국 국물을 나물에 한두 국자 붓고 마냥 뜸을 들이던 이유다. 요즘은 시래기나물을 해먹는 집이 그리 많지 않다. 시간이 넉넉하지도, 마음이 여유롭지도 못해서다.
‘밥상에서 뱀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고기반찬이 흔치 않던 시절에 김치, 푸성귀, 짠지, 시래기나물 같은 반찬만 올라오던 초라한 밥상을 조상들은 그렇게 농치곤 했다. 그 ‘뱀 나올 밥상’이야말로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식단이다. 풍부한 섬유소 때문인데, 덕분에 시래기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요즘은 자주, 많이 먹어야 할 식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집에서는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솜씨가 없어서 특유의 보드라운 맛을 내지 못하니 산채 전문 식당만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늘과 동업해야 얻을 수 있는 귀한 겨울 시래기
시래기는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말린 것이라야 제 맛이 난다. 강원도 덕장에서 말리는 황태가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기를 반복해야만 황금빛으로 살이 부풀어 상등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풍이 많이 불고 낮밤의 기온차가 클수록 빨리, 맛있게 마른다는 동해안 과메기도 마찬가지다.
추운 곳에서 바싹 마른 시래기는 수분이 날라 가고 볼품없이 말라붙어 질기기만 할 뿐, 보들보들 씹히는 맛이 없고 고소한 감칠맛도 나지 않는다. 줄기가 성한 가을 무청은 독성이 남아 맵고 지린 맛이 난다. 무청을 삶아 놓은 물은 유독 검다.
그에 비해 겨울 무청은 잎이 질기지 않고 단맛이 들어 먹기에 좋다. 남해안 섬초나 포항초가 오뉴월 시금치에 비해 달고 보드라운 것처럼. 근래에 전남 해남에서 생산되는 시래기가 눈길을 끄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해남은 겨울에도 얼음이 잘 얼지 않아 월동배추를 많이 심는다. 한겨울에 배추가 잘 자라니 무 역시 그러할 터다.
땅끝 해남, 시퍼런 무청밭을 찾았다. ‘명품 겨울시래기’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시래기를 재배하는 곳이다. 무밭이 아닌 무청밭이다. 무는 필요 없으니 무청이 성할 수 있는 품종으로 골라 심기 때문이다. 9월 하순에 밭에 직접 씨를 뿌리면 눈 속에서 자라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죽지 않고 퍼렇게 견뎌내며 단맛을 올린다. 12월 말부터 1월까지가 수확 시기다. 노지에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자란 무청은 한여름 온도 변화 없는 틈에 자란 것에 비해 길이가 짧고 줄기가 굵지 않은 것으로서 적당히 물이 올라 있다. 이 무청을 한꺼번에 데쳐서 제 물에 식혔다가 엮어 자연바람에 말린다.
‘명품 겨울시래기’는 무청을 수확해 데치는 곳과 말리는 곳이 다르다. 해남에서 수확하면 현장에서 데쳐 강원도 대관령까지 차로 실어 나른 후 그곳에서 겨우내 말린다. 밤에는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뚝 떨어지고, 햇살이 퍼지는 낮에는 영상으로 올라가는 극심한 온도차를 겪는 동안 시래기는 바짝 오그라들지 않고 하얀 줄기 부분이 통통하게 부풀며 마른다. 섬유소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말린 시래기는 10분만 삶아도 연하고 부드럽다. 라면 끓여 먹을 정성만 있으면 맛있는 시래기나물을 준비할 수 있다. 가을 시래기는 질긴 껍질을 벗겨서 조리해야 하기에 손이 많이 가고 귀찮지만, 해남 겨울 시래기는 껍질을 따로 벗기지 않아도 부드러워 한결 편하다.
시래기나물 들깨가루를 넣어 구수하면서 감칠맛이 나는 시래기나물. 담백하게 먹으려면 멸치로 맛을 내지만 기름기가 없는 쇠고기와 매운 고추를 듬뿍 썰어 넣고 뭉근하게 지져도 맛있다. 시래기전 오징어와 당근, 양파 등이 듬뿍 들어간 전.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먹이기 좋은 간식 겸 반찬이다.
거친 느낌 없이 편안하게 감기는 맛
시래기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이렇게 많은가 싶다. 시래기밥과 시래기된장국, 시래기나물은 익숙해 반갑고 시래기떡갈비나 시래기머핀은 처음 만나 신기하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은 ‘명품 겨울시래기’를 판매하는 새싹(주)의 김해경 대표다. 어려서부터 유독 묵나물, 특히 들깨가루를 넣고 국물을 자작하게 부어 만든 시래기나물을 좋아했다는데, 지금도 일 년이면 들깨가루를 10kg나 먹을 정도라고 한다. 멸치를 넣고 오랜 시간 뜸을 들여 볶은 시래기나물에 시래기밥을 곁들였다.
시래기밥은 휴일 아침이면 늘 해먹는 메뉴라는데 길이 잘 든 무쇠솥에 현미와 찹쌀, 멥쌀을 섞어 담고 시래기와 표고버섯, 대추, 은행, 밤을 얹어 짓는다. 밥물은 따로 잡지 않고 표고버섯 우린 물을 쓰는데, 각각의 재료를 잘게 썰어 참기름과 국간장으로 밑간을 해서인지 양념간장을 많이 넣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다. 여기에 논우렁을 넣어 끓인 시래기된장국이 함께 올랐다. 냄비에 논우렁과 된장, 참기름을 섞어 넣고 물을 조금 부은 후 한참을 볶다가 국물을 붓고 시래기를 넣으면 비리지 않고 구수한 맛을 낼 수 있다. 마지막에 마늘과 들깨가루를 넣어 감칠맛을 살리는 것이 요령이다.
다진 쇠고기에 데친 시래기를 잘게 썰어 넣고 치대서 지진 떡갈비는, 느끼한 맛이 한결 덜하고 간간히 시래기 씹히는 맛이 독특하다. 데쳐서 잘게 썬 오징어에 시래기, 당근, 양파를 섞어 부친 시래기전도 씹히는 맛이 좋아 별미다. 시래기머핀은 다진 호두와 잘게 썬 시래기가 들어간 빵인데, 위에 고명처럼 흩뿌린 참깨가 눈길을 끈다.
다섯 가지 색을 내는 오색 참깨다. 다섯 가지 색에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 보들보들한 해남 겨울시래기가 오색참깨 덕분에 유명해졌다. 김해경 대표는 원래 참깨와 참기름을 유통하는 사업을 했다. 국산 참깨를 유통하려면 계약재배를 하는데 워낙 종자가 귀하다 보니 농민들이 거꾸로 종자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때부터 전국을 돌며 토종 참깨 종자를 구하기 시작했고, 황금색을 내는 ‘황금깨’와 짙은 갈색이 나는 ‘유풍깨’를 만나게 되었다. 검은 깨인 흑임자에 흰 깨, 거피한 참깨까지 더하니 다섯 가지 빛깔의 참깨를 한 병에 담을 수 있었다.
오색 참깨와 참기름 판매량이 늘어날수록 계약 재배하는 농가도 늘어났다. 그중 한 명이 농부 김동한 씨다. 김동한 농부가 만난 것은 참깨 계약재배가 인연이었지만, 김해경 대표는 시래기 음식을 무척 좋아하고 김동한 씨는 10년 넘게 보들보들한 시래기 만드는 법만 연구한 특이한 농부였다. 두 사람이 만났으니 시래기 얘기가 끊일 날이 없었고, 참깨를 수확한 8~9월 이후 무씨를 심어 시래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서 ‘해남 겨울시래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빗줄기에 젖을까 눈바람 맞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부드럽게 입 안에 감기는 시래기 묵나물을 먹을 수 있게 된 데는 두 사람의 인연이 큰 작용을 한 셈이다. 처음 김해경 대표와 우렁시래기된장국 우렁시래기된장국은 알이 굵지 않은 논우렁을 넣어야 구수한 맛이 잘 살아난다. 비리지 않고 담백해 밥 말아 먹기 딱 좋다.
나물은 생것보다는 햇빛에 말려 두었다가 무치면 향과 맛이 뛰어나다. 양념을 아낄수록 나물 고유의 맛은 잘 살아난다. 맑은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볶은 시래기나물에 구수한 시래깃국, 거기에 겨울 볕에 자란 봄동겉절이를 곁들이면 2월 밥상은 풍성해진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아무리 부드러운 시래기라도 데친 다음 바로 찬물에 헹구는 순간 섬유질이 오그라들어 질겨진다. 정월대보름 시래기나물은 뭉근한 불에 진득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는 음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