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현대사 이해에 대한 실마리들중 하나.

감효전(甘曉典) 2012. 2. 7. 15:43
일제의 김일성귀순공작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참고가 될 것 같네요.

김일성(金日成)과 김창영(金昌永), 한 사람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역사연구가에게 조차 생소한 인물이다. 두 사람이 60여년 전 동만주 벌판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없을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인 ꡔ세기와 더블어ꡕ(7권)에서 “내가 겪은 수많은 체험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체험” 이라며 자신에 대한 일제의 귀순공작을 언급해 놓았다. 당시 이 귀순공작을 총지휘했던 조선인책임자가 바로 김창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창영이 1949년 친일파,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나와 ‘김일성귀순공작’의 내막을 진술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창영은 평양중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26세 때부터 공북면장, 전북 금산 군수,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독찰관(督察官), 만주국 치안부 이사관, 전라남도 산업부장 등을 역임하며 총 32년간 일제에 적극 협조한 인물이다.
1949년 4월에 친일행위자로 구속된 김창영은 반민특위의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진술했다.
그가 ‘김일성귀순공작’을 지휘했던 것은 만주국 치안부 이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1939년 가을 직속상관인 만주국 치안부 차장으로부터 만주국 사법부, 치안부, 관동군 공동결정이라며 김일성 귀순공작을 성사시키라는 특명을 받았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지역 반일연합군으로 1936년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이었다.
특명은 받은 그는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중국인)귀순공작의 실패경험을 교훈삼아 신중하게 작전을 짰다. 우선 김일성과 가까운 인물을 수소문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환된 인물이 이종락(李宗洛)과 박차석(朴且石)이었다. 두 사람과 김일성은 김일성이 1926년 길림에 왔을 때 첫인연을 맺었고 그후 4-5년간을 같이 활동한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30년대 초 국내에 침투했다가 체포돼 전향하였다. 김일성은 두 사람에 대해 “화성의숙에도 같이 다니고 ‘ㅌㆍㄷ(타도제국주의동맹)’와 건설동지사도 같이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을 꾸릴 때에도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라며 “박차석과 이종락은 내가 혁명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사귄 동지인 동시에 첫 동행자들”이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김일성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친밀한 사이였다.
김창영은 바로 이점을 이용했다. 일단계로 그는 김일성부대가 잠복할만한 산간 촌락 일원에 이종락과 박차석의 서신과 사진을 뿌렸다. 김일성과 연락이 닿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약 2개월 후 김일성으로 부터 답신이 왔다. 이후 진행상황은 조사관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문 : 김일성이라는 자는 어디 있는가?
답 : 현재 평양에 있는 김일성으로 인정합니다.
문 : 박차석 등이 살포한 서신과 사진은 어떤 내용이었나?
답 : 면회를 요청하는 서신과 이종락, 박차석 등의 실모(實貌)를 증명하는 2인 합촬(合撮)한 사진이었습니다.
문 : 언제, 어디서, 누구와 회견하였는가?
답 : 소화 15년(1940) 1월 중순 김일성으로부터 회신이 있은 지 수일 후 김일성이 지시한 장소인 두도화원(頭道花園) 남방 약 5리 지점 산중을 향해 박차석이 단신으로 들어가 김일성 이하 2개 중대, 약 120명과 1박하며 직접 김일성과 회담을 시켰습니다.
문 : 박차석과 김일성의 회담내용은 무엇이었나?
답 : 박차석이 삼강성 귀순공작의 4대 조건을 설명하고 또 혁명대상은 초목이 아니라 인간이니 하산하라는 의미와 귀순 후 특별한 조치로 외국유학을 알선한다는 등의 조건으로 귀순을 역설하였던 바 김일성이 귀순의사를 표시하며 2대 조건을 요구하여 왔었습니다.
문 : 2대 조건은 무엇이었나?
답 : 제1은 귀순공작의 책임자인 김창영(피의자)을 간도성, 혹은 통화성의 성장으로 임명해 귀순후 오랫동안 일동의 신변을 보장할 것, 제2는 동 성내에 적당한 지역을 택해 귀농생활을 하되 일반행정에 대해서는 만주국 법에 전반적으로 순응하나 치안과 경무에 대해서만은 정부에서 간섭치 말고 귀순부대에 일임해 줄 것 등이었습니다.

박차석의 귀순권유에 대해 김일성은 거짓으로 귀순의사를 표명하며 역으로 김창영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관동군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2개조건을 내걸어 상대방의 의중을 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도 김창영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때 박차석을 만난 인상에 대해 “겉모양은 여전한데 속은 딴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김은 “사람답게 살라”는 충고를 해주고 그를 그냥 돌려보냈다. 그가 귀순공작에는 참여했지만 마지못해 하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거나 자신의 영달을 누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김일성의 편지를 김창영 몰래 평양에 있던 김일성의 할버니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산중에서 돌아온 박차석이 김일성의 두가지 조건을 전달하자 김창영은 1단계 공작이 실패했다고 판단, 2단계로 이종락을 김일성부대에 다시 들여보냈다. 이종락은 김일성과 만나 두가지 조건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무조건 귀순 후 매사를 타협적으로 진행하자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종락은 김일성을 만난 후 ‘불귀의 객’이 돼 버렸다. 해방직후 한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일성은 “이종락이 한 번 찾아왔기에 손님으로 잘 대접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말라고 잘 타일렀는데도 전연 뇌우치는 빛이 없고, 도리어 안될 말만 하기에 죽여버리게 하고 말았지요”라고 말했다.
이후 김일성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그와 김창영의 관계는 단절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일성은 북한정부의 수상이 됐고, 그를 귀순시키려던 김창영은 반민특위의 재판정에 섰다.
1949년 7월 28일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에서 김창영이 받은 형량은 공민권 3년 정지가 고작이었다.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들을 토벌한 죄값치고는 너무나 가벼운 형량이다. 다만 그의 재판기록은 생생한 역사자료로 살아남아 숨겨진 역사의 한단면을 전해주고 있다.

출처 : 유유자적 낙산도령
글쓴이 : 베아트리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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