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앞장 선 군무대신
* 趙義淵. 1856 ~ 1915
* 1894년 갑오농민전쟁당시 '정토군 조직.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을 도운 공로로 군무대신 서리.
1910년 남작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앞잡이로 활약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일본 정부에 협조적이던 대신들 친일적인 인사들에게 작위를 줌으로써 한국통치를 원활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 때 조희연도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1910년 10월에 생긴 중추원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작위에 걸맞은 조희연의 친일행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조희연의 친일행위는 그의 정치적인 노정을 추적해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희연은 흔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두각을 나타낸 친일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희연의 행적은 그가 1874년 무과에 급제한 뒤 1883년 기기국 위원, 선전관, 훈령원 판관 등 군직에 관련하면서 중국이나 일본 등지의 군사시설을 시찰할 계기가 많았던 데서부터 그 가닥을 잡아 볼 수 있다. 즉 1887년에는 군사상업시찰을 위해 상해를 다녀오는가 하면 그 이듬해인 1888년에는 군기구인 등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상하이, 홍콩을 거쳐 일본의 포병공창을 견학하면서 일본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일본 문물에 자주 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견문을 넓히고 개화에 대한 식견을 개발하여 주는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귀국한 뒤 그는 양국의 문명을 참작하여 이를 시행하려고 하였고 청일양국으로부터 군기를 사들이기도 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조희연은 정토군을 조직해서 초토사 홍게훈, 양호순변사 이원희 등에게 군량 및 군비 등을 지급하여 파송하기도 하였다.
당시 집권층인 민씨정권은 자력으로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청국에 응원병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조희연은 청나라에 병사를 요청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즉 청국에 원병을 청하여 청국군이 온다면 동아의 소요를 야기시킬 뿐만 아니라 열강의 간섭이 더욱 심해져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농민전쟁과 청국군의 개입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내정개혁이라는 구실 아래 1894년 6월 아침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21일 일본은 영추문으로부터 침입하여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리고는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내세웠다.이 때 민씨일족을 유배 보내고 대원군을 등장시킨 조희연이 활약이 눈에 띈다.[조선근대사] 조희연과 함께 대원군의 추대에 관여했던 자는 김가진, 안경수 등을 비롯하여 조선 정부 고문 오카모토 류노슈케, 호즈미, 기쿠치 겐조 등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희연의 이중성과 기회주의적 태도을 엿볼 수 있다. 민시정권의 청국원병이 외세의 간섭을 불러일으킬 섯이라고반대했던 그가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앞잡이로 활약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튼 이런 공로로 조희연은 갑오개혁을 추진할 당시 장위사(육군대장)에 등용되었다. 이후 일본이 충청도 앞바다에 있는 청국의 군함을 먼저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아산에서 청일 양군이 접전하자 조희연은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 등을 선발대로 파송하여 일본군을 돕기도 하였다. 이 공로로 조희연은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을 대 군무대신 서리로 승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국의 군제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희연은 아산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뒤 평양으로 향하자 이창렬을 부산에 보내어 일본군을 환영함과 동시에 이두황을 선봉으로 내세우고 일본군을 인도하는 등 일본측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평양 전투에서도 일본군을 인도하는 등 일본측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평양 전투에서도 일본군이 우세하자 조희연은 일본군 위문대사로 특파되어 일본군을 위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개혁의 중심기관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될 때 군국기무처의 회의원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때 조희연 이외에도 김가진, 안경수, 김학우, 권형진, 유길준 등 신진개화파들이 대거 등잗ㅇ하게 되었다. 이들을 주측으로 한 군국기무처는 국정전반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장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하였지만 친일개화파와 대원군파 사이의 반목과 질시 등으로 일본측의 게획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일제는 1894년 9월 27일 오토리에서 이노우에 가올로 공사를 교체하여 대원군을 몰아내고(10. 21)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으며 고종을 위협하여 제2차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친일파 내각을 만든 것이다. 일제는 그 해 12월에 고종으로 하여금 흉범 14조를 발표하게 한 이후 일본인 고문관을 불러와 조선의 내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일본세력과 부침 함께 한 한말의 정치적 노정
조희연은 김홍집, 박영효를 수반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에서 군무대신으로 승진하였다. 이 내각은 김홍집, 박영효의 주도권 사움으로 충돌이 잦았는데 급기야 왕궁호위병 선임문제가 발단이 되어 계파간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김홍집 계열인 조희연이 갑신정변 대 청군의 입장에서 개화당을 공격했던 신태휴를 훈련대장으로 임명하려 하자 박영효가 완강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조희연이 원래는 중립을 유지하다가 김홍집과 박영효가 대립할 대 김홍집 일파가 되었던 자이기에 박영효에게 조희연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희연이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사태가 발생햇다. 1895년 2울 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을 위ㅜㄴ하기 위해 조희연이 문무관료 20여 명을 대동하고 다롄 만.진저우.뤼순.웨이하이웨이 등지로 떠나자 군무에 관한 일은 군부협판 권재형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박영ㄱ\효 일파는 정란교, 유혁로 등을 군부의 요직에 등용시키고 조희연이 귀국한 뒤에도 이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조희연은 허수아비가 되고 ㅏㄹ았다.
게다가 1895년 4월에는 조희연에게 더 불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양주목사 이두황이 부임할 때 이를 호위하기 위한 군사로 1개 분대를 파견하자는 논의가 있게 되었다. 이 때 군무대신 조희연이 아직 칙허를 받지 못하였는데도 11일 밤 박영효파인 군부 관방장 정란교가 군대를 출병시켰다.
고종은 조희연이 재가 없이 임의로 출병시켰다고 하여 크게 노하고 그가 전에 일본군 위무사로 특파될 때 재가전;에 신제 군복을 착용했다는 것까지 지적하며 알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희연의 책임 문제와 진퇴 문제를 각의에서 결정하도록 하엿다. 각이에서 조희연에 대한 면직처분이 내려지자 김홍집 및 대신들이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내각의 붕괴에 당황한 일본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김홍집을 발탁하여 내각을 조성하였다. 이것이 제3차 김홍집 내각이다. 그러나 새 내각에는 일본측의 의도와는 달이 심상훈,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 친미파가 등용되었다. 반면 친일파의 중심 세력이었던 김가진이 면관되고 유길준이 좌천되는 등 친일세력은 주춤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국 간섭 이후 일본 레력은 조선에서 일시 퇴조하는 듯했다. 이는 지금까지 일본의 노골적 내정간섭에 불만을 갖고 있던 고종이 친러파와 합세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김홍집 내각이 성립된 후 조선 정부가 친러배일적인 정책을 실시하자 일본은 이노우에 공사 대신 미우라 공사를 부임시켜 세력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895년 10월 왕궁을 습격하여 배일적이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여 민비파는 물론이고 친러.친미파가 완전히 배제된 친일내각이 구성되었다. 이것이 소위 제4차 김홍집 내각이다. 이 내각에서 조희연은 군부대신에 기용되면서 다시 군에 관한 사항은 그의 소관이 되었다.
민비 세력이 쇠락하고 친일파가 일시 신내각을 조직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친러파가 득세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이 발행하였다. 그날 밤 조희연은 궁궐에서 숙직하던 중 그 변을 듣고 날이 샐 무렵 군부로 달려가서 군대를 파견하려고 하였지만 그럴 만한 군사가 없었다. 또한 이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상태였다.
아관파천이 발생하기 전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 유길준은 지방 파견대의 일부를 긴급히 소환시켜 궁궐의 호위를 엄중히 할 것에 협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군대 지휘자는 거의 쫒겨난 상태이고 그나마 군부대신 조희연 휘하의 친위대 제1중대는 원주에 있는지라 궁궐은 텅빈 상태였던 것이다. 조희연은 급히 입궐하려고 하였으나 수십 명의 순검이 돌입해 오자 겨우 몸을 피해 후문으로 달아나 일본 수비대의 보호를 받아 남촌의 일본인 집으로 겨우 피신하였다.
이날 김홍집 이하 친일 내각 대신들에 대한 포살령이 내려졌고 조희연을 비롯한 대대장 이진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권형진 등에게는 포박령이 내려졌다. 이 때 김홍집, 정병하 등은 군중들에 의해 타살되었고 조희연, 유길준 등은 모두 피신하였다.
1896년 2월 조희연은 유길준 등과 함게 인천으로 가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일본에 망명해 있는 동안 일본의 군사시설 및 산업을 시찰하엿다. 구수노세의 주선으로 참모차장 가와카미를 만나 나고야, 오사카에서 군사 훈련을 견학하기도 하고 요코스카의 조선소, 히로시마의 병영등 군사시설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우사 가와 총재들을 만나 홋카이도 등지의 척식경영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조희연은 1907년 일본에서 돌아온 뒤 그 해 10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9년에는 표훈원 총재에 임명되었고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임종시 반납하는 태도를 보인 점은 특기할 만하다.
조희연이 이와 같은 정치적 노정을 통해 볼 때 그가 비록 임종시 작위를 반남하는 태도를 보였을지라도 그의 친일적 성향을 살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1894년과 1895년 사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과정에 잇어서 숨은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즉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군을 움직여 일조를 하는가 하면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때에도 일제에 협조하였다. 그 후 민비시해사건 때에도 군무의 요직에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일본의 행위에 동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여 러시아의 세ㅕㄱ이 부상하고 일본의 세력이 잠시 주춤하게 도엇을 때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후 다시 일본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요직을 맡아 계속 일본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 오연숙(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 연구조교)
*** 친일파 99인[ 반민족문제연구소엮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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