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아병(我兵)이 입한(入韓)함으로써
한정(韓廷)이 크게 경동(警動)한 것을 호기회로
평생 개혁을 희망해 온 인사들이 활발히 운동을 개시하여
그 기운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다.
그들은 민씨들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총리로 추대하여
정사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계획이라 한다.”
1894년 6월 24일 주한일본공사의 보고에 잘 나타나듯,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기화로 이 땅에 일본군이 진주하자
감국(監國) 원세개와 민씨척족 정권의 압제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친일 개화파 관료들은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개혁의 청사진을 펼쳐들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나흘 뒤인 7월 27일
이들은 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한 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개혁 추진 기구를 발족했다.
‘1. 국내외 공·사문서에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쓴다.
2. 청국과의 조약을 개정하고 각국에 특명전권공사를 다시 파견한다.
3. 양반과 상인의 차별을 없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한다.
4. 문·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한다.
5. 죄인 외에 친족에게 연좌(緣坐) 형률을 시행하지 않는다.
6. 처와 첩 모두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를 들이게 한다.
7. 조혼을 엄금한다.
8. 과부의 재가는 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게 한다.
9. 공·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10.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의견을
군국기무처에 글로 제기하면 회의에서 논의한다.’
7월 30일 1차 회의 때 의결한 10개 조 의안이 잘 말해주듯,
초정부적 입법기관이었던 이 기구는
12월 17일까지 우리 역사상 가장 과격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인
제1차 갑오경장을 추동했다.
그때 이들은 일본을 모델로 내각 중심의 중앙집권적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우려 했으며,
과거와 신분차별의 폐지를 통해 새로운 근대 국민을 만들어 내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군의 엄호 아래 일본인 고문관의 지도를 받아 개혁을 추진했고,
이에 필요한 자금 300만 엔을 빌리는 대가로 각종 이권도 넘겨주었다.
심지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골육상잔(骨肉相殘)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나라를 살리겠다는
애국적 동기로 개혁에 임했음은 분명하나,
우리보다 일본의 국익에 봉사한 이율배반적인 부용(附庸)세력이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16년 전 갑오경장을 다시 돌아보는 까닭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이 땅의 집권세력이 추진한 근대화 노력에 배어 있는
‘외세 의존성’이란 공통의 한계를 배태케 한 태아적 원형(embryonic prototype)을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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