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옛사진·자료

[스크랩] 그시절 측간의 추억

감효전(甘曉典) 2012. 2. 3. 09:46

.

그 시절 측간의 추억

 

‘측간(厠間)’은 ‘정랑’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화장실’을 말한다. 필자가 살던 고향집의 ‘정랑’은 사랑채의 남쪽,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오전에는 응달이었고, 오후가 되어야 양지쪽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향리에서는 이 ‘정랑’을 주로 ‘측간’ 또는 ‘칙간’이나 ‘치깐’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지역에 따라서는 ‘똥뚜깐’이라고도 했다.

 

                              제주도의 재래식 측간 '통시'

          

            (중앙부에 돌출된 구조물이 측간이고, 아래 짚이 깔린 장소는

            돼지우리로 사람의 대변이 떨어지면 돼지가 받아 먹었다)

 

 

그런데 볏짚이나 가마니로 앉은키보다 조금 높은 울타리만 쳐놓은 이 측간이 지금은 모두 안채로 들어가 수세식 화장실(化粧室)로 변모되어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없다. 때문에 ‘측간’은 이제 ‘뒤를 보는 곳’ 이 아니라 문화재(文化財)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변소(便所)란 본딧말을 몰아낸 완곡어(婉曲語)로서의 화장실에는 억지로 뿌려놓은 위생약(衛生藥) 냄새가 지워지지 않지만 전래의 '측간'에는 그런 억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경주지방의 '정랑(측간)'

     


 

큰 항아리를 묻어 놓고 그 위에 두개의 나무판만 덩그러니 걸쳐놓은 채 흙담을 치고 ‘거적’(새끼로 날을 하여 짚으로 두툼하게 쳐서 자리처럼 만든 물건)으로 간신히 입구를 가려 놓았던 측간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나라 시골농가의 변소는 모두 이런 모습이었다.

 

                                       시골의 별채 측간

          

 

 

부잣집이나 고관들의 가정에는 별채로 측간을 지어 사용함으로써 위생적인 활용을 할 수 있었다.

 

                        부잣집이나 고관들 집의 별채 측간 

         

 

 

그리고 이 측간을 사용하는 데에는 그만큼 얽힌 얘기들도 많았다. 번듯한 문이 없으니 측간에 갈 때마다 저만치 앞에서 ‘어흠’하며 큰 기침소리를 내야했다. 용변(用便) 중인 여인네들과 남정네들이 조우(遭遇)하지 않기 위해서다.


여기에다 영하의 추운 겨울날이면 엉덩이를 스치는 찬바람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당시에는 이러한 측간 구조 때문에 노인들의 경우 용변(用便) 중에 뇌졸중(腦卒中)이 발병하는 경우가 많았다. 혹한(酷寒)의 추위에 온몸의 혈관(血管)이 최고조로 수축(收縮)된 상태에서 변비상태(便秘狀態)인 변을 보려고 용을 쓰다보니 뇌혈관(腦血管)이 파열되어 뇌출혈(腦出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골에는 음식이 워낙 귀해서 포만(飽滿)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하여 식사 후에 바로 변(便)을 보지도 않았지만, 추운 겨울에는 자주 측간에 갈 수 없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변비상태(便秘狀態)로 살고 있었다.


지금은 어린이들이라도 식사 후에 소화(消化)를 촉진하고, 비만(肥滿)을 예방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급적이면 가벼운 운동을 하도록 권면하는데 비하여, 당시에는 밥을 먹고 뛰어다니거나 농사(農事)일이나 심부름이 아닌 불필요한 놀이를 하지 못하게 했다.


쓸데없이 뛰어다녀 빨리 배가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당시에는 어린이들이나 노인들이나 거의가 변비상태(便秘狀態)에 있었다.


특히 겨울에는 노인들의 경우 ‘측간’의 추위 때문에, 어린이들의 경우 ‘측간귀신(厠間鬼神)’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용변(用便)을 참을 때까지 참느라 변비상태는 그만큼 더 심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추운 겨울 노인들이 ‘측간’에 가서 억지로 용변(用便)을 보려고 용을 쓰면 추위로 수축될 대로 수축된 뇌혈관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었고, 이 경우 상당수의 노인들이 뇌졸중(腦卒中)에 걸려 사망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노인들이 측간에서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지면 바로 병원에 가거나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똥뚜깐 귀신’에게 저주(咀呪)를 받아 그렇게 됐다고 스스로 체념하고 말았던 것이 당시의 시골 사정이었다. 물론 치료를 받을 병원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치료를 받을 형편이 되지 않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측간’은 거의가 집 모퉁이 추녀 밑에 만들었기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치면 ‘삿갓’으로 가리고 용변을 보는 등 불편이 많았다.

 

공포(恐怖)를 자아냈던 ‘뒷간 귀신(鬼神)’에 관한 이야기는 왜 그리도 많았던지 어린이들의 경우 캄캄한 밤중에는 잠자던 형들이나 어머니를 깨워 망을 보게 하고 볼일을 봐야 했었다. 말로만 듣던 ‘뒷간 귀신’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집모퉁이 추녀밑에 만든 '정랑'

         
          (담장도 문짝도 없이 못쓰게 된 가마니때기로 옆과 뒤만 가린

          구조라 바람에 날린 낙엽이 아궁이를 덮고 있다. 인분과 개똥,

          쇠똥을 섞어 숙성시키기 위해 제때 퍼내지 않기 때문에 ‘정랑’

          은 언제나 가득 차 있게 된다)


 

그래서 당시에는 ‘요강’이라는 편리한 도구가 애용되었다. ‘뒷간 귀신’의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한겨울 한밤중에 덜덜 떨면서 멀리 가지 않고도 크고 작은 일을 방안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변의 경우 참을 대로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요강에서 용변을 보기 때문에 좁은 방안에 냄새가 ‘동천’(‘꽉 찼다’, ‘가득하다’는 뜻의 경주지방 방언)을 했고, 소변도 참을 대로 참다가 보기 때문에 요강이 넘쳐나기 일쑤였다.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한밤중에 요강을 비워 올 사람이 없으면 부득이 가족을 깨워 정랑에 가서 용변을 보게 된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요강이 그만큼 편리했었다. 필자가 향리에 살 때는 상류층이건 서민층이건 요강은 빼놓을 수 없는 생활도구여서 혼수품(婚需品) 준비에도 놋요강과 놋대야가 반드시 끼었다.

 

                           당시의 혼수품이었던 놋쇠 요강

         

 

 

아득한 옛적부터 애용되어 오던 요강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만드는 재료도 다양해져서 도기나 자기, 유기 외에 오동나무에 옻칠을 하거나 쇠가죽에 기름을 먹인 것도 등장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깨지지 않고 세척하기 좋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요강이 등장하기도 했다. 아직도 한옥이나 시골집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요강을 부시는 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향리에서의 필자네의 경우 집안에 딸이 없어 아침마다 요강비우기는 필자들의 차지였기도 했다.

 

                               서민들의 요강 '사기요강'

   

 

 

필자가 향리에 거주할 당시의 시골농가 측간은 단순히 뒤를 보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화학비료(化學肥料)가 지금처럼 대량 보급(普及)되기 전에는 가장 귀한 거름을 생산하는 기능을 가진 곳이 ‘측간’이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한 사발의 밥은 줄 수 있어도 한 덩어리의 ‘똥재’는 주지 않는다” 는 속담(俗談)처럼 당시의 농가에서의 측간은 천연거름을 생산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여기에서 ‘똥재’란 용변을 본 후에 그 변에 재를 덮고 둥글게 말아서 차곡차곡 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중부지방에서 만든 것으로 경주(慶州) 지방에서는 거의 본 일이 없다. ‘똥재’를 좀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알아본다.

 

옛날에는 거름의 종류로 ‘두엄’을 비롯하여 똥, 오줌, ‘짚재’(볏짚이 타고남은 재로 빨래 표백용 ‘잿물’을 받거나 비료로 씀), ‘똥재’, 풀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똥재’는 많은 지역에서 농민(農民)들이 농사짓는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똥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두엄터는 지붕을 만들어 빗물이 흘러들지 않게 하였다. ‘똥재’는 ‘짚재’를 덮어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으며, 저장(貯藏)이나 보관이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똥재’를 덮는데 사용하는 ‘짚재’는 강한 알칼리성 성분(性分)을 갖고 있어 살균효과(殺菌效果)가 뛰어났고, 곤충이나 해충(파리)등의 접근이 방지되어 위생적(衛生的)인 효과는 물론 거름으로써의 효능(效能)과 인기를 더 하였다.


‘똥재’에 관한 기록은 멀리 조선조(朝鮮朝) 초기의 세종대왕(世宗大王)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대왕(世宗大王) 시절에 편찬한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올 벼 못자리에 똥재를 주되, 3년 간 못자리로 쓰던 논에는 다섯 마지기에 3가마니, 처음으로 쓰는 논에는 3가마니가 적당하다”라는 지침(指針)까지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해방(解放)이후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 지역에서는 ‘똥재’를 만들어서 판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똥재’ 고급품 한 ‘섬’은 30전(錢), 중등 품은 20전(錢), 하품은 10전(錢) 이라는 가격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똥재’가 귀하고 인기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해방당시 경기미(京畿米) 1등품 한 가마니의 가격이 당시 돈으로 690원일 때이다.


‘똥재’는 또 소, 닭, 돼지, 개 등의 여러 가축의 분뇨(糞尿)로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개똥은 좋은 거름으로 평가를 받아 주로 참외밭에 사용했다. 참외밭에 ‘개똥똥재’를 사용하면 참외가 크고 맛이 달아 ‘개똥참외’라는 말까지 등장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유용한 ‘똥재터’로서의 측간이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면서 그만큼 청결(淸潔)함과 품위는 얻었지만 사람과 자연(自然)과의 생태(生態) 순환(循環)고리가 차단되고 있다는 점이다. 측간 거름이 다시 땅의 양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화조(淨化槽) 속에서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일각(一角)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토대로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농촌(農村)에서 만이라도 측간을 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측간 연구가들은 “전통적인 측간이 비록 불편하고 비위생적이지만 자연생태순환(自然生態循環)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며, “유기농법(有機農法)의 중요성과 함께 측간을 생태공간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다” 고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