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옛사진·자료

[스크랩] 그때를 아십니까

감효전(甘曉典) 2012. 2. 2. 21:56



    ★ 니나놋 집(일명 대폿집)

    어려웠던 시절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이면 생활과 일에찌든
    술 꾼들이 피곤 과 삶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 삼 삼 오 오 어울려 찾아 들던 이른바
    "니나놋 집" 이 번성 했던때가 있었다.





    ★ 금    줄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 하던 시절 금 줄에 걸린 붉은 고추는 행인 들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할 만큼 스스로 당당함 을 뽐냈다.
    빈부 격차나 신분의 고하 지역을 가릴것 없이 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숯 솔가지가
    매달렸으면 아들이고 솔가지 와 숯만 걸리면 딸이었다.




    ★  이

    300기 이하이신 선.후배님들은 현역 복무시절 털로짠 동내이 틈 사이에서
    [이 님]들이 살이 통통 찌도록 우리 모두를  괘롭였던 추억을 갇고있어며
    어렵던 어린 시절에 이 징거로운 미물이 목숨 걸고 날라다 준 인정과 우애의
    교감 조차도 지금은 온 몸을 활보하던 스물거림의 추억과 함께 잊혀져가고 있다.




    ★  헌  책 방

    40대중반 이상이면 학창시절 헌책방에 얽힌 추억을 하나쯤은 간직하고있다.
    미팅으로 만난 여 학생과 대화를 위해 고전 문학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던 곳,
    멀쩡한 교과서나 사전등을 팔아 군것질을 하기위해 찾았던곳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새책값으로 헌책을 구입하고 나머지는 군건질이나 미팅 비용에 슬쩍했던 일등….




    ★ 뻥   튀기 장수

    먹을 것이 흔치 않았던 60∼70년대의 풍경이다.당시는 주전부리 라고 해봐야
    고작 찐 고구마,감자,옥수수 등이 전부였다.
    봄 부터 여름 까지 과일등 으로 입을 달래던 꼬마들은 날씨가 선선해 지면서
    주전 부리를 할  먹 거리가 별로 없어 심 심 하였다.    이런 가운데  뻥 튀기
    장수라도 올라치면 최고의 군것질 거리가 생기는 것이었다.물론"눈깔사탕"과
    같은 것도 있었지만  큰돈 들이지 않고 먹을수 있는것이  뻥  튀기였다




    ★ 측    간

    결코 아름답거나 향기롭지 못했던 것들도 현실이 탈색되면 향수의 대상이 된다.
    "측 간"(厠間)이란 말에는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가려주는 시간의 먼지가 소담하게 쌓여 있다.







    ★ 지    게

    북청 물장수 물지게, 영 호남의 바지게 등 온갖 지게는사실상 용도 폐기되고
    몇개는 박물관으로 옮겨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하지만 난데없이 ‘지게차’란
    서양차가 태어나 지긋지긋한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




    ★ 전  당  포

    전당포가 절박한 삶의  마지막 구원처가 되었던 그때 그 시절이 있었다.
    고작  몇 천원짜리 꼬리 표를 매단채 시커먼 금고 속으로 사라지는 고물
    태엽 시계 같은 삶의 사연들로 전당포 문지방이 닳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 서 커 스 단

    빨간 코에 얼룩무늬 옷을 입은 피에로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재롱을 피울 때는
    부초(浮草)같이 떠도는 그네들의 삶의 서글픔 마저 배어났다.




    ★ 엿   장  수

    보리 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배고픈 시절  엿 장수는 시골
    어린이 들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 이었다.  동네 입구에서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집집마다 꼬마들은 부리나케 움직인다.
    엿 장수가 오길 기다리며 모아 놓았던 갖가지 고물을 챙기느라 부산하다.




    ★ 흑 백  탤 레 비 죤

    시골에 처음 흑백 T V 가 들어온 것은 60 년대 말에서 70 년대 초.
    값이 비싸  대개 한 동네  통 틀어 제일 잘사는 부자 집  한 집에만
    T V 가 있기 마련 이었다. 라디오 보다 몇 백배나 신기하고 재미있어
    저녁마다 그 부자집 마당은 T V 를 보러온 마을 사람들로 꽉 차곤 했다.
    T V 를 가진 부자 집의 "TV 유세" 는 대단했으며 이들은 흑 백 T V 를
    보물 단지 모시듯 했다. 낮 에는 자물쇠 를 채워 놓은 집이 흔했다




    ★ 꽃   상 여

    기억 나시지요.  아득한 들길 멀리 너울  너울 꽃  상여가 떠나고  마침내는
    "어 화 널   어 화 너 얼   어화리 넘 자  어 화 너얼"  애잔한 상두꾼들 소리조차
    가 물  가 물 아지랭이에  먹힐 즈음이면  뜸부기 우는 들 가운데 서서 까닭없이
    눈 물을 훔 쳤던 콧 잔등 싸 한 추억이.....




    ★ 양은 도시락

    지난 80 년대 까지 도시락 대표 주자는 양 은(洋 銀) 도시락 이었다.
    재질이 별로여서 뚜껑이 뒤틀려 맞질 않았고 빛 바랜 색깔도 엇 비슷해
    집안 에서도 곧잘 바뀌었다.
    밑 바닥은 송곳으로 쑤신 것처럼"송송"올라와 하얀 녹이 슬기도했다.
    겨울에 언 밥을 덥히기 위해 도시락을 난로에 올려놓은 후유증이었다.


    ★ 소  달 구 지

    우리와 함께 숨쉬던 달구지가 70년대 근대화 바람으로 리어카와
    경운기에 밀려나 골동품 신세로 전락했다






    ★ 방  앗  간

    정미소가 사라지는 것은  쌀 생산량이 줄어 들어서가 아니다.
    농 협에서 운영하는 대형 도정 공장 때문이다.
    도시에서 대형 유통 업체가 구멍 가게를  몰아내는 적자 생존의
    법칙이 농촌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 요    강

    돌이켜 보면 요강 만큼 우리 삶의 흔적을 많이 함축한 것도 흔치않았습니다.
    염 치(廉恥)가 중했던지라 낮에는 딴전 부리듯 마루 한쪽에 엎어두지만 부엌일
    마친 어머니 요강 단지를 방 한쪽 구석에 들여놔야 비로소 일과가 끝났습니다.
    바로 뼈 빠지는 노동의 대 미(大尾)에 요강이 있었던 것이지요.




    ★ 학  교  종

    조용하고 아늑한 시골 교정에 맑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든
    학교  종소리.  땡  땡  땡,그 소리가 그립다.




    ★ 고  무  신

    20 여년 전만 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용되던 고무신이 요즘은
    특 별 한때 특 별한 곳에서 쓰는것으로 인식될 만큼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 성    냥

    선진국에서도 성냥산업이 사양 산업으로 분류돼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 물  장 수

    집  집으로 물을 팔러 다니는 물장수 의 모습에는 급수 시설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옛 시절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우리들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상수도가 본격 보급된뒤 "물장수"라는 말이 거의 사라졌다.

출처 : 어디로 갈꺼나
글쓴이 : 이강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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