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뜸의 대가 김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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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무식도 침쟁이가 될 수 있소, 다들 배워서 남 주자고요!” |
사람의 몸 안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으며, 아픈 자리에 믿음의 나무를 심는 사람. 6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치료해준 역사의 증인. 그는 수천년에 걸쳐 내려온 민간요법인 침과 뜸을 통해 나눔과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왔다. 오직 낮은 데로 임하며 ‘침뜸 전파’에 앞장서온 아흔의 침쟁이는, 아이 같은 환한 미소로 삶을 긍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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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내가 사로잡혀 있는 생각이 있으니 우선 구당 선생의 환자 이야기에서 출발하겠다.
1915년생이니 선생은 살아온 세월만으로도 역사의 증인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초야에 묻힌 촌로가 아니었고 60년 이상, 역사 현장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을 안방에 눕혀둔 채 만났으니 할말이 숱할 수밖에 없다.
나는 구당(灸堂) 김남수(金南洙·94)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그가 쓴 책 세 권을 단숨에 읽은 후 자연스럽게 뜸 예찬론자가 됐다. 나는 실제로 매일 스스로 뜸을 뜨고 있다. 난생 처음 해봤지만 어렵지 않았다.
책에서 본대로, 선생이 일러준 대로, 잘 말린 쑥을 쌀알 반톨만하게 비벼 뜸자리에 얹어놓고 선향으로 불을 붙여주기만 하면 끝이다. 순식간에 타버리니 뜨거울 새도 없다.
그러나 들인 노력에 비해 효과는 탁월해서, 묵직하던 몸이 순간에 거뜬해지는 것을 매번 경험하는 중이다. 시간이래야 한 10분이면 족하고, 5000원을 주고 쑥 한 봉지를 사면 석 달을 쓸 수 있고, 잠깐 뜨거운 것 말고는 부작용이 생길 일도 없다. 이러니 예찬론자가 되지 않고 배기겠는가. 더구나 뜸은 김남수란 특출한 인간이 새로 개발한 비방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천년 동안 이어온 전래 민간요법인 것이다.
“장준하는 혼자 산에 갈 수 없었다”
내가 먼저 꺼내고 싶어 안달하는 이야기는 북한산에서 실족사했다고 알려진 장준하 선생에 관한 내용이다. 그해 구당 선생은 장준하 선생에게 왕진을 갔더랬다.
“저기 제기동 청파초등학교 앞에 집이 있습디다. 지붕 바로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는데, 어지간히 어렵게 사신다 싶데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집마저 사글세였다고 합디다. 허리 디스크로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거동은 물론이고 앉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기침도 못할 만큼 디스크가 극심합디다. 나한테 침뜸 치료를 받은 후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다섯 번쯤 치료를 받은 후 통증도 많이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긴 해도 방 안을 왔다갔다할 정도는 된다고 기뻐했거든요. 그 얼마 후에 산에서 실족사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봤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기가 막혔지요.”
기사를 읽고 또 읽어도 그건 거짓말이었다. 지팡이 없이는 집 안에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낮은 계단조차 올라서지 못하던 사람이 등산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치료한 사람이 나였을 겁니다. 나는 의술자로서 거짓 없이 증언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그후 오늘까지 아무도 날 찾아와 그걸 물어본 사람이 없어요. 장 선생은 절대로 혼자서 산에 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김재규 정보부장과의 인연
또 한 사람, 구당 선생을 역사현장에 증인으로 서게 한 인물은 김재규다.
1979년 10월25일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구당 선생에게 침을 맞았다. 장충동 중앙정보부장 공관에서였다. 그해 봄부터 김재규 부장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구당에게 침을 맞고 있었다. 침 맞으려고 누워서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옷을 벗고 긴장을 풀고 누웠으니 절로 편안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김재규에게 갈 때는 거의 자정 넘은 시각에 정보부 차가 날 데리러 와요. 비상등을 켜고 신호를 무시한 채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자기들은 그저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해요. 처음 공관에 간 날, 혼자 널따란 방에 앉아 있던 김 부장이 대뜸 ‘나 잠 좀 자게 해주시오’ 합디다.
불면증은 원인이 여러 가지지만 대부분 마음의 병입니다.
심장에 화가 몰리거나 간 경락인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흥분해서 일어납니다.
팔뚝과 등을 보니 간질환을 가진 사람에게서 보이는 간반(肝斑)이 아주 심하더군요. 먼저 심장의 화를 다스려놓고 머리의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백회혈을 수습하고, 간장에 기(氣)가 흘러드는 간유혈을 잡아 침을 놓았지요. 침 놓고 뜸 뜨는 사이 그 사람은 조용하게 잠이 들더군요.”
침뜸으로 효과를 보자 김재규 부장은 밤마다 정보부장 공관으로 구당을 부른다.
거의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사이 둘은 상당히 가까워진다. 침을 맞고 뜸을 뜨면서 불면증은 치료됐고 간반도 거의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제도가 잘못되어 침구술의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구당의 울분에 김 부장은 몹시 안타까워하며 박 대통령과 직접 만날 약속을 잡아준다. 1962년 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침구사 제도의 부활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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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내려온 침과 뜸이 우리 시대에 와서 명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초조감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한다. 누구나 간단한 뜸자리쯤은 알아둬야 한다고, 중·고등학교 체육이나 가정 교과서에 침과 뜸에 관한 언급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명구조의 한 방법으로 구급침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공호흡이나 부목(副木)을 대는 법은 가르치면서 그보다 훨씬 쉬운 구급침과 뜸을 가르치지 않는 처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렇다. 그건 몇천년 닦아온 조상의 지혜를 낭비하는 일이다.
一灸二鍼三藥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는 전통의술의 기본은 흔히 ‘일구이침삼약(一灸二鍼三藥)’이라고 일컬어졌다.
뜸이 첫째고, 침이 둘째고, 그래도 다스려지지 않을 때만 약을 썼다는 의미다. 그런데 상식으로 통용되던 ‘일구’와 ‘이침’이 광복 후 ‘삼약’에 밀려 핍박과 박해만 받아왔다는 사실을 나는 구당 선생을 만나면서 새롭게 인식했다. 그뿐 아니라 종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얽혀 전통의술과 현대의학 사이에 서로 넘어가지 못할 철조망이 높다랗게 쳐져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됐다.
‘구당’이라는 호는 짐작하듯 ‘뜸 구(灸)’자, ‘집 당(堂)’자를 쓴다. 호가 그렇듯 김남수 선생은 아무 겉치레가 없다. 말도 아주 유쾌하고 쉽게 한다. 단순하고 짧은 말이 사태의 본질과 핵심을 탁탁 짚어낼 때 듣는 사람의 속은 후련하고 통쾌하다. 노인이니 말의 어미가 느슨해도 좋을 텐데, 정확한 ‘-습니다’체를 단정하고 간결하게 구사한다.
“침구는 박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글을 한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도 침을 놓을 수 있고 뜸을 뜰 수 있습니다.
그냥 쟁이지요. 침쟁이! 뜸쟁이! 어려서는 쟁이라는 말이 그렇게 싫더니만 이제는 참 좋습니다. 침과 뜸은 학(學)보다 술(術)이 앞선다는 의미잖습니까.”
의사는 ‘병원 폐문 방지자’
“의사가 왜 있습니까. 환자가 없으면 의사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의료인의 목적이 뭐냐고 제가 늘 묻습니다. 환자를 낫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게 의사의 존재이유 아닙니까.
내 것은 옳고 네 것을 틀리다고 말해서는 진정한 의사라고 할 수 없지요. 뜸을 뜨든 침을 놓든 약을 쓰든 환자를 고통 없이 빨리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의사의 태도 아닙니까?
병 치료는 육체와 정신이 같이 움직여 이뤄내는 겁니다. 의사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병을 못 고쳐요. 나는 의사들을 ‘병원 폐문 방지자’라고 부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려고 있는 게 아니라 병원문 안 닫으려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입니다.
아주대 이종찬 교수라고, 거기에 맞서 환자권리 찾기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사는 돈을 몰라야 해요. 국가가 월급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국가가 주되, 대통령보다 더 많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아마 돈 생각 안하고 건강한 정신으로 쓸데없는 약 많이 안 쓰면서 병을 고치려고 할 겁니다.”
저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을 만큼 직설적인 말을 유연하게 하는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하나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흔 넘은 사람과 얘기해본 게 구당 선생이 처음이다. 구당의 아흔은 내게 코페르니쿠스적 발상 전환을 하게 만들었다. 나이 들면 늙고 쇠하는 게 자연의 이치인 줄 알았더니 그 속도는 얼마든지 완만하게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다. 자기 몸을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연령대를 살 수 있다면?
구당은 노쇠는커녕 발랄하달 정도로 기운찼다. 피부가 아이같이 맑고 곱다. 체력과 몸놀림과 사고방식과 일하는 분량이 아흔 아니라 일흔, 아니 마흔이라 해도 믿겠다. 시력도 청력도 순발력도 전혀 감퇴하지 않았다.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다.
“우리 집사람과 같이 누워 ‘삼십대가 우리만 할까?’라는 얘기도 자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지 모르겠네. 하하.”
그는 60여 년간의 임상 경험을 모아 자신만의 쑥뜸요법을 체계화했다. 이름하여 ‘무극보양뜸.’ 무극이란 태극 이전의 우주를 나타내는 개념이지만 쉽게 말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뜻이다. 무극보양뜸은 누구나 어떤 질병에나 쓸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술로 구당 침뜸의 핵심이다.
매일 그 자리에 뜸을 뜨면 몸의 원기가 북돋고 저항력이 길러져 병이 저절로 치료되고 예방된다는 걸 임상에서 수십 년째 확인하고 있다. 8개 경혈 12자리(여성은 13자리)에 뜸뜨기를 생활화하면 국민 누구나 병 모르고 살 수 있다는 복음. 그런데 사람들이 도무지 믿으려고 들지 않으니 허탈하다. 너무 쉽고 비용이 들지 않아 외려 신뢰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있던 것을 뜸자리를 줄여가며 간편하게 정리한 것이지, 내가 새로 발명해낸 건 아닙니다. 나는 120세까지 침뜸 봉사를 하면서 살 작정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저 노인이 무슨 힘으로 저렇게 건강하게 오래 사나’ 하고 관심을 가질 거 아닙니까?
그럴 때 내가 만들어놓은 무극보양뜸을 자랑할 겁니다. 그러면 뜸의 효과를 믿어줄 것 아니겠어요? 하하.”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다. 평정을 잃는 일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필요해서 일부러 큰소리를 칠지언정 진정으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니 사람이란 한 분야에 달통하면 도인이 되나보다.
무극보양뜸과 화상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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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보양뜸
서울 종로구 권농동 ‘시민의 신문’ 건물 침뜸 봉사실 안에서 자그만 체구의 구당 선생이 흰 가운을 입고 환자 앞에 섰을 때 주변이 따사로운 기운으로 데워지는 것을 나는 신기하게 지켜봤다. 온화한 기운은 구당에게서 흘러나와 고요하게 환자에게로 스며들었다. ‘의술이란 인술이라더니 그게 바로 저것이로구나’란 탄복이 절로 일었다. 그건 정성스러운 몰두와 애정이었다.
무극보양뜸도 그 애정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뜸법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는 말이 있어요.
나이들수록, 곱씹을수록 진리라고 여겨집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침이 무한의 가치라는 겁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주고 깊은 병에서 헤어나게 해주는 침이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다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원가가 들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내게 그 말은 침쟁이로서 병 고치는 목적을 잊지 않게 해주고 물질이 정신을 몰아내지 않게 도와주는 경구입니다.”
구당 선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은 화상침법이다.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면 통증이 가시면서 진물이 나지 않는다. 진물은 현대의학으로 말하자면 백혈구다.
상처가 났을 때 인체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백혈구를 증식한다. 통증이 없어지면서 진물이 걷히면 이미 그 자리가 나아간다는 뜻이다. 침으로 치료하면 조직이 상하지 않는다. 흉터는 조직 파괴의 흔적이니 침으로 하는 화상치료는 흉터가 남지 않는다.
화상 당한 부위를 ‘아시혈’이라 부른다. ‘바로 그곳’이란 뜻이다. 아픈 그곳에 침을 놓으면 통증과 가려움증이 사라진다. 이런 탁월한 화상치료법을 찾아내 학술지에 발표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화상전문 병원에서는 침 치료를 여전히 외면한다. 아니다.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려는 트인 의사들도 있다. 그러나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다가 고발을 당해 인천과 부산의 어떤 병원은 45일간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듣고 있자니 참 코미디도 이런 희한한 코미디가 있나 싶다.
구당의 일주일은 온통 봉사활동 계획으로 꽉 차 있다. 홍릉 근처에 남수침술원을 개업했지만 돈 받고 환자를 받는 날은 목요일 단 하루뿐이다. 덕분에 목요일이 되면 뜸집 근처가 새벽부터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700∼800명이 몰려오지만 선착순으로 하루 50명만 치료한다.
“1인당 5만원을 받아요. 그러니 하루 250만원을 버는 꼴 아닙니까? 일주일에 그것만 벌어도 충분하지요. 젊어서부터 나는 돈을 잘 몰랐어요. 돈을 벌기로 작정했으면 하늘 꼭대기까지 쌓았을 겁니다. 요새는 좀 후회가 되기도 해요. 침구사를 합법화하려고 그렇게 발로 뛰어다닐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차라리 돈을 벌어 로비를 했더라면 지금쯤 성사됐을지도 모르겠다 싶거든요. 우리 집에 사람이 몰리는 건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침과 뜸의 효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겁니다.”
원래는 화·목요일 이틀간 환자를 받았는데, 올봄부터는 화요일 하루를 더 빼서 근골계 질환을 앓고 있는 현대자동차 근로자들의 치료를 위해 울산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했다.
“5만여 명의 직원 중에서 근골계 질환을 앓는 산재보험 대상자가 1만명을 넘는답니다. 병이라기보다는 과로인데 그런 질환에 침과 뜸이 특히 효과가 있거든요.”
‘뜸사랑’의 봉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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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뜸을 이용한 응급처치비법
월요일은 감사원에, 화요일은 울산 공장에, 수요일은 창덕궁 앞 시민의 신문사에, 금요일은 국회에, 토요일은 그가 만든 봉사단체인 ‘뜸사랑’ 가족들에게 돌아다니며 침을 놓아주고 뜸을 떠준다. 일주일에 하루도 몸 뺄 날이 없지만 그는 지치지 않는다. 침은 직접 놓지만 뜸은 그에게 침뜸을 배운 뜸사랑 회원들이 맡는다.
구당이 침뜸 봉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이다. 침구사가 제도화되기를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전파하기로 작정하고 침뜸을 교육한 것도 10년째다. 그간 1500명에 가까운 이들이 그에게 침을 배웠다. 그 제자들이 모인 봉사단체가 바로 뜸사랑이고 작년 한 해 뜸사랑 회원들이 시술한 사람 수가 무려 8만명이라니 한 사람이 뿌려놓은 씨앗이 펴져가는 속도는 이토록 놀랍다.
침뜸 교과서를 쓰다
뜸사랑의 모토는 ‘배워서 남 주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내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구당 선생의 일관된 가르침인 ‘참된 인술은 나눔과 희생’이란 선언을 실천하고 있다. 뜸사랑은 지금 창신동 봉사실을 상설 운영하고 있다. 65세 이상 생활보호대상자들과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열린 공간이다. 국회의사당에도, 과천 정부종합청사에도, 재정경제부 청사에도 침뜸 상설봉사실이 개설돼 있다. 누구든 그곳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구당 선생은 증세에 따라 아예 뜸자리를 펜으로 표시해준다. 제자(구당은 제자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냥 똑같이 하니까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편을 좋아한다)들도 물론 똑같이 한다. 한번만 다녀가면 집에서 가족이 서로 떠줄 수 있다. 누가 뜨던 뜸의 효과는 다르지 않다니 이런 편리한 의술이 다 있나. 이런 의술을 만들어 보급하는 ‘민중의료인’의 위대성을 알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수입한 슈바이처만 성자이고 영웅인 줄 알다니, 우리 눈이 너무 어둡고 몽매하다.
“동양 삼국을 다 다니며 침뜸을 비교해봤습니다. 침에 대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했거든요. 북한에도 2001년 이후 해마다 갔습니다. 북한은 침을 모르면 아예 의사로 인정을 안하더군요. 허익근 세계침구협회 북한회장을 만나 침뜸 교과서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았어요. 이제 8권이 출간됐습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도 걱정 없습니다. 아, 공부할 교과서가 있지 않습니까. 여태껏 사람으로 태어나 뭔가 해놓고 죽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 허무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어딜 가든 침뜸 교과서를 만들고 간다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중국 침은 아프고, 일본 침은 너무 약해요. 우리 것이 효과가 가장 좋습니다.
젊은 사람이 침뜸을 배워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21세기 의료 경쟁에서 침뜸이 단연 최고입니다. 나이든 사람은 배워서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앞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나 의료비도 점점 더 늘 텐데 무극보양뜸 하나만 익혀놓으면 온 가족이 걱정 없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선생 슬하의 1남3녀 중 둘이 침뜸을 공부한다. 딸은 미국 침구대학원에 유학중이고 아들은 남수침술원에서 함께 일하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1951년 우리나라 국민의료법이 공포될 때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는 의료업자로, 접골 침술 구술 안마술사는 의료유사업자로 나누어졌다. 질질 끌다 의료유사업자 자격시험 규정이 1960년에 생기기는 했으나 한번도 시행되지 못하고 다시 5·16을 맞는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의료유사업자 규정을 완전 삭제해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식 침구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구당은 물론 광복 이전에 침구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다. 현재 살아 있는 침구사가 100명 정도지만 거의가 연로해서 직접 시술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침구사법이 없어진 후로 그걸 새로 만들기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장군들치고 저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군부대마다 찾아다니며 다친 장병들에게 침 놓고 뜸 떠주고 했거든요. 장군들이 힘이 셀 때 아닙니까. 멍석 깔고 지랄하는 것 빼고는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5공화국 때도 침구사 제도 통과가 문턱까지 갈 뻔한 적이 있었다. 1980년 당시 천명기 보건사회부 장관이 “침구사 제도를 부활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 너무 기뻐도 쇼크가 되는 법이다.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 같더니 심장의 화기운이 균형을 잃어 그는 그만 쓰러져버린다. 병원으로 옮겨져 40일을 산소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
“정신을 잃었으면서도 ‘저혈압에 진통제를 놓으면 안 되는데 지금 진통제를 놓는구나’ 하는 식의 분별은 있었어요.”
6개월간 병원에서 심근경색 치료를 받았다. 심장의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죽든지 살든지 집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자신의 몸을 임상대상으로 놓고 침뜸을 하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말한다.
“내게 뜸을 떠다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응급실에 가기 전에 뜸을 떴기 때문이다. 설령 내 명이 다한다 해도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큰 효과이고 축복이니 걱정마라.”
건강의 본질은 ‘인체 치유능력’
예상대로 그는 살아났다. 뜸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건강의 본질은 병이 없는 게 아니라 인체의 치유능력입니다. 살면서 전혀 아프지 않을 수야 없겠지요. 아파도 가볍게 앓고 얼른 회복하면 그게 건강입니다. 뜸은 바로 인체의 치유능력을 높여주는 의술이에요. 혈행을 촉진하고 세포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고 신경 및 내장 기능을 조절하고 호르몬의 분비에 변화를 줍니다. 경혈에 자극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피부에 작은 화상을 입혀 일종의 가열 단백체가 생체 각 조직에 화학적 자극을 전달하도록 하거든요.”
우스꽝스럽게도 기껏 발표되어 그를 기쁨으로 쓰러뜨린 침구사 부활건은 나중에 까닭 없이 유보되고 말았다.
“왜 갑자기 유보됐는지 그 이유가 늘 수수께끼였는데 천명기 장관 사후에 밝혀졌지 않았습니까. 의사협회로부터 5억원인가를 뇌물로 받았다지요.”
구당 선생이 돈을 많이 벌 걸 하고 후회한다는 대목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그는 열한 살에 처음 침을 잡았다. 선친도 침을 놓았고 하나뿐인 형님도 침구사였다.
“우리 형님은 중풍을 특히 잘 고치는 명의셨어요.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고 내가 그 짝이지요.”
의원이신 부친은 화제(약방문)만 낼 뿐 환자에게 약을 지어주지 않았다. 침과 뜸만으로 병이 잘 나으니 굳이 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약 짓는 약방은 따로 있었다. 의원은 침을 놓고 화제를 써주면 그만이었다.
“당시는 그야말로 의약분업이 아주 잘 돼 있었던 겁니다.”
선친이 따로 치료비를 받는 건 본 적이 없다. 가을이 되면 동장이 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모곡을 걷어줬다. 있는 사람은 넉넉히 내고 없는 사람은 내지 않아도 좋았다.
“그게 바로 그 시절의 의료보험이었지요.”
따로 배울 필요도 없이 부친과 형님에게서 보고 들은 대로 그는 28세에 남수침술원을 개업한다. 그후 60년 넘게 한번도 침통을 놓지 않고 살았다.
침의(鍼醫) 허임의 재발견
“화타나 편작이 명의라고 하지만 나보다 오래 의원 노릇을 했을까요. 조선에는 허임이라는 걸출한 어의가 있었어요. 허임도 72세 이후로는 종적을 감췄다고 나와 있으니 아마 역사상 침을 가장 오래 놓은 사람이 내가 아닐까 싶어요.”
사극에 나오는 허준이 약을 짓고 침뜸 시술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는 완전히 어긋난다. 그는 약의(藥醫)였고 허임이라는 침의(鍼醫)가 따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는 약의 허준과 침의 허임이 선조의 편두통을 함께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금이 “짐에게 침을 놓는 게 어떠한가” 묻자 노의(老醫) 허준은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릅니다”라고 물러나고 대신 허임이 병풍 뒤에서 침을 놓는다는 기록이다.
허임은 자신이 일생 축적한 임상 경험을 모아 조선 최초의 본격 침구서인 ‘침구경험방’을 펴낸 걸출한 침의였다. 허준에 견주어 하도 묻혀 있는 인물이라 앞으로 구당 선생과 뜸사랑 회원들은 ‘허임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 예정이다.
세부사항도 착착 만들어지고 있다. 그 일을 통해 침과 뜸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높여나가는 게 목적이다.
침뜸에 관한 잘못된 속설이 있다. 침뜸을 동시에 하면 기운이 빠져 못쓴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구당 선생은 속 시원히 해명한다. 예전에는 침 만드는 사람이 귀했다. 침을 만들면 재수없다는 소문이 떠돌아 손 없는 날을 골라 금세공업자가 섣달 그믐날 하루만 침을 만들었다. 그러니 가는 침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고 할 수 없이 대침을 썼다. 대침은 위험하다. 잘못 찌르면 신경을 손상할 수도 있고 복막염이 될 수도 있었다. 침에 녹이 슬 수도 있었다. 뜸도 크게 떴다. 커야 좋은 줄 잘못 알고 몸살을 앓을 만큼 크게만 떠댔다.
지금은 다르다. 현대는 제철기술의 발달로 값싸고 질 좋은 스테인리스 호침이 머리카락 굵기만큼 가늘게 생산된다. 쑥도 쌀알 반톨만하다. 힘들 게 전혀 없다. 경혈을 동시에 자극하면 더욱 효과적일 뿐이다.
경혈이란 인체의 오장육부와 경락의 기가 모이고 출입하는 곳이다. 우리 몸의 초인종인 셈이다. 침뜸은 몸의 급소인 경혈을 자극해 불균형과 이상을 바로 잡아준다는 원리다. 몸이 알아서 저절로 제 균형을 잡아가라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이다.
우리 몸 안에 에너지가 다니는 통로를 경락이라 부른다. 동양의학은 병이란 그 선로의 흐름이 고르지 못한 상태라고 본다. 그럴 때 가까운 역(경혈)을 찾아가 자극한다. 그러면 멈춰 있는 기운이 잘 돌아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락 이름은 다 뜻이 깊어요. 머리 가운데 있는 백회(百會)는 100가지 경락이 모여 있다는 의미지요. 이곳에 뜸을 뜨면 머리가 맑아져 집중력이 좋아집니다. 머리칼이 새로 돋기도 합니다. 예전에 백회에 뜸뜨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해서 흔히 서울대 뜸자리라고도 불러요. 어깨 아래 고황(膏?)이란 아주 깊은 곳이란 뜻입니다. 병이 깊이 들었을 때 여기다 침을 놓습니다. 천종(天縱)이란 심장과 뇌라는 뜻이에요. 뇌나 심장에 병이 있을 때 사용하라는 자리입니다.”
구당 선생은 침뜸을 ‘종합의료기’라고 부른다. ‘이동병원’이라고도 말한다. 부러지고 잘라진 외과적 상처말고 내인성 질병은 어느 병이든 침뜸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걸 임상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특히 디스크와 당뇨와 중풍에 탁월한 효능을 나타내는 게 침과 뜸이다. 남수침술원은 환자들 사이에 흔히 ‘침 한번 집’으로 불린다. 침 한 번 맞으면 말짱해진다는 건데 물론 다 그렇진 않다. 오래된 병은 오래 다스려야 하지만 침 한번에 거뜬해지는 경우도 많다.
’YS도 감탄한 ‘침 한번 집
한번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 자택으로 구당을 불렀다. 선거운동 하느라 수도 없이 악수를 하다보니 어깨 통증으로 팔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어깨 바깥쪽 견우혈에 침을 한 번 찔렀다. YS는 “듣던 대로 ‘침 한번 집’이 맞네” 하며 금방 악수를 청했다. 나중 YS가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도 몇 번 가서 침을 놓아줬다. 침구사는 청와대를 뒷문으로 몰래 출입해야 했다. 효능을 눈앞에서 확인해도 침구술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노쇠한 몇 명만 빼면 지금 침구술을 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엄밀히 말해 무자격자라는 거다.
“의사가 침구를 활용할 수 없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남한뿐입니다. 의료 서비스가 개방되면 전통의학과 현대의학 사이에 쳐놓은 철조망은 얼마 못 가 무너져요. 그럴 때를 대비해 늦기 전에 의사, 한의사를 대상으로 제대로 된 침구교육을 해야 하는데….”
아픈 곳에 믿음의 나무 심는 사람
그는 젊어서 일본 소설 ‘인간수업’을 읽었다. 거기 사람이 하는 짓은 온갖 것을 다 해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름도 잊지 않았다. 린겐노 슈교.
“내가 그걸 동경했어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이젠 거의 해봤어요. 하다 못해 바느질하는 것과 상여 메는 것까지 다 해봤지요.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 내 삶에 불만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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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瑞鈴 |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
샘이깊은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 |
구당 선생은 아기같이 고운 볼로 활짝 웃고 허허 웃고 정답게 또 웃는다. 그리고 내 팔의 곡지혈에 쌀알 반톨만한 뜸을 올리고 선향에 불을 붙였다.
“자, 뜸맛을 한번 느껴봐요. 맛을 봐야 글을 쓰지.”
박노해 시인이 선생을 위해 쓴 시가 있어 여기 두 연만 옮겨 적는다.
"물은 세 걸음만 걸어도 스스로를 맑게 하듯 그대 몸 안에 숨은 치유의 힘이 있다고 아픈 그 자리에 믿음의 나무를 심는 사람
그는 첨단 장비를 들지 않았다네
가늘고 순하고 오래된 침 하나라네 그는 비밀스런 영약을 들지 않았다네 이 땅의 가장 흔한 마른 쑥 한 톨이라네 그는 값비싼 면허증을 들지 않았다네 그대 자신이 의사고 병원이라고 임명해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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