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개관 이래, 밀양의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리, 종교(사찰), 행정편제 등에 대해 기술한 책으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상을 능가하는 "역사서"는 없다고 보면서, 밀양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편"을 올려드립니다 - 다음카페 [밀양광장]
"점필재 김종직 선생(1431 ~ 1492)"은 시대적으로 "사명대사(1544 ~ 1610)" 보다 한 세기 앞선 인물로서 이 사서(史書)를 보시므로서, 왜구가 조선을 침탈하고 민족을 유린한 "임진왜란(1592 ~1598)" 전의 평화로운 조선과 우리 향토인 밀양의 상황을 역사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 고전국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 경상도 慶尙道 [6]
=== 밀양도호부 密陽都護府 ===
동으로는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9리,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93리,
남으로는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는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 38리,
북으로는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2리이다.
■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인데, 경덕왕이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그대로 부르다가, 성종이 밀주 자사(密州刺史)로 고쳤고,
<현종>이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일컬었고,
<충렬왕>
- 원년(1274)에 이 군 사람 조천(趙仟) 등이 수령을 죽이고 진도(珍島)의 반적(叛賊)에 호응했으므로 낮추어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하여 계림(鷄林)에 붙였다가, 뒤에 밀성현으로 불렀고,
- 11년에 높여서 군으로 하였다가, 얼마 안 되 또 낮추어 현으로 했고,
<공양왕>이 증조할머니 박씨(朴氏)의 고향이므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높여서 부로 하였다.
<본조 태조> 때에 도로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중국에 입조(入朝)한 환자(宦者) 김인보(金仁甫)의 고향이므로 다시 높여서 부로 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태종> 때에 도로 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준례에 따라 도호부로 하였다.
■ 속현
수산현(守山縣) : 부에서 남으로 40리에 있다. 본래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으로 하였고, 현종 때에 부에 내속(來屬)하였다.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풍각현(?角縣) : 부에서 서북으로 50리에 있다. 본래 상화촌현(上火村縣)인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1668)에 내속하였다. 유산(幽山)이라고도 한다.
■ 관원
부사(府使)교수(敎授) : 각각 1명씩이다.
■ 신증
지금 임금 13년(1518)에 부의 사람으로 그 아버지를 죽인 자가 있어서 낮추어 현으로 하고, 부의 땅을 갈라서 청도경산(慶山)영산현풍(玄風) 등의 읍에 나누어 붙였다가, 17년에 복구하였다.
■ 군명
추화(推火)밀성(密城)밀주(密州)귀화(歸化)응천(凝川)밀산(密山).
■ 성씨
본부(本府) 손(孫)박(朴)변(卞)김(金)조(趙)변(邊)양(楊)당(唐) : 절강(浙江) 명주(明州)에서 왔다. ○ 인물 조에 상세히 있다. 이(李)최(崔)윤(尹)조(曺) : 모두 내(來)이다. 풍각(?角) 노(魯)전(田)유(劉)부(斧)태(苔). 김(金) : 청도에서 왔다. 수산(守山) 서(徐). 손(孫) : 금주(金州)에서 왔다. 내진(來進) 변(卞)박(朴). 두야보(豆也保) 백(白)노(魯)박(朴) : 속(續)이다. 금음물(今音勿) 제(諸). 이동음(伊冬音) 제(諸). 윤(尹) : 철원에서 왔다.
(주 레나)
절강 : 중국의 "절강성(浙江省)"을 말함
■ 풍속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밭에서 농사에 부지런하다. : 김주(金湊)의 영남루기(嶺南樓記)에 있다.
■ 형승
긴 내를 굽어 당기고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다. : 김주의 기문에 있다.
큰 강이 비껴 흐르고 늘어 선 봉우리가 겹쳐 에워쌌다. : 성원도(成元度)의 영남루시의 서문에 있다.
먼 봉우리는 하늘에 떠 있고, 긴 강은 뉘어(練) 놓은 듯하다. : 권람(權擥)의 덕민루기(德民樓記) 기문에 있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요, 잇닿 봉우리와 겹친 봉우리이다. : 권기(權技)의 소루기(召樓記)에 있다.
■ 산천
화악산(華嶽山) : 둔덕(屯德)이라고도 하는데, 부의 북쪽 19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추화산(推火山) : 부의 동쪽으로 5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 풍각현의 서북 30리에 있다.
우령산(牛齡山) :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재악산(載嶽山) :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만어산(萬魚山) :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자씨산(慈氏山) :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귀령산(龜齡山) : 수산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려 인종이 여기에 태(胎)를 묻었다.
실혜산(實惠山) :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천화령(穿火嶺) : 부의 동쪽 93리에 있다.
호법현(湖法峴) : 부의 서북 37리에 있다.
영현(鈴峴)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나현(羅峴) : 부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아현(阿峴)이라고도 부른다.
고암산(高巖山) : 부의 서쪽 9리에 있다. 그 남쪽에 일현(日峴)이 있다.
용두산(龍頭山) :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율림(栗林) : 응천(凝川)의 남쪽 기슭에 있다.
운례수(運禮藪) :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마암(馬巖) :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바위가 응천으로 쑥 들어가서[斗入] 모양이 물을 마시는 말[馬]과 같은 까닭에 이름지었으며,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해양강(海陽江) : 부의 남쪽 34리에 있다. 일명 뇌진(磊津)이고, 김해(金海)와의 경계이다.
응천(凝川) : 부의 남쪽 성(城) 밑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청도군의 동쪽에 있는 운문산(雲門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풍각현의 북쪽에 있는 비슬산에서 나와서 청도군 유천역(楡川驛) 곁에 이르러 합류하여 부의 성(城)의 남문(南門)을 지나 해양강으로 들어간다.
월영연(月盈淵) :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재악의 물이 추화산 동쪽에 이르러 응천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수산진(守山津) : 수산현에서 서쪽으로 1백 보 가서 있다.
구연(臼淵) : 천화령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1백여 자이다. 폭포가 돌에 떨어져 움푹 파여서 못의 모양이 꼭 절구와 같은 까닭에 이름지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 "용이 있으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가뭄에 범의 머리를 집어넣으면 물을 뿜어서 곧 비가 된다." 한다.
삽포(鈒浦) : 부의 동쪽 51리에 있다.
우도(牛島) : 응천 가운데에 있다.
내진천(來進川) : 내진향(來進鄕)에 있다. 근원이 화악산에서 나와 수산진으로 들어간다.
용진(龍津) : 부의 남쪽 36리에 있다. 수산진의 하류이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8월의 용진 강물이 평평하고,
물가[渚]가 맑고 모래가 희어서 눈이 더욱 밝네.
물을 거슬러 곧바로 올라가니 밀물이 멀어지고,
양 기슭의 푸른 산이 길손을 전송하네." 하였다.
양량지(陽良池) : 양량부곡(陽良部曲)에 있다.
■ 토산
종이차젓대 : 영정사(靈井寺)에서 난다.
죽전(竹箭) : 용두산에서 난다.
은구어황어붕어송이석심(石?)석류.
밤 : 앞 교외에 밤나무 숲이 있어 몇 리에 가득 찼는데, 해마다 수확이 매우 많고 그 품질 또한 좋아서 세상에서 밀율(密栗)이라고 부른다.
옻벌꿀지황복령반석(班石) : 북정리(北亭里)에서 난다.
신증
삼웅어천문동(天門冬)농어닥나무.
■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6백 70척이요, 높이가 9척이다. 안에 우물 넷과 한 못이 있다. 성화(成化) 15년(1479)에 쌓았다.
■ 봉수
남산 봉수(南山烽燧) :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남으로 김해부의 자암산(子巖山)에 응하고, 북으로 추화산에 응한다.
추화산 봉수(推火山烽燧) :
남으로 남산에 응하고, 북으로 분항(盆項)에 응한다.
분항 봉수(盆項烽燧) :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남으로 추화산에 응하고, 북으로 청도군의 남산에 응한다.
■ 누정
영남루(嶺南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바로 옛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인데, 절은 없어졌다.
지원(至元) 을사년에 김주(金湊)가 군수가 되어 예전대로 고쳐 세우고, 인하여 절의 이름으로써 이름지었다. 뒤에 부사 안질(安質)이 중수하였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에 부사 강숙경(姜叔卿)이 또 중수하여 옛 규모를 넓히니, 크고 아름답기가 비길 데가 없다.
○ 고려 김주의 기문에,
"밀성군은 경상도에서 이름난 고장으로 그 해우(?宇 관공서의 청사) 동쪽에 누각이 있어 영남(嶺南)이라 하는데,
긴 강을 굽어보며 끼고 있고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어서 더욱 온 군에서 경치 좋은 곳이다.
을사년 봄에 내가 서울을 나와서 군수가 되어 일을 보는 여가에 이 누각을 보았는데,
규모가 좁아 집이 작고 추녀가 짧아 바람이 비끼면 비가 들어오고 해가 기울면 볕이 들어와서,
누각에 오르는 것을 즐긴다 하여도 메마르고 축축함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낡은 것을 고치려고 모두 다 걷어버리려고 생각하나,
공장(工匠)을 얻기 어려워서 군 사람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군노(郡奴) 한 사람이 평소에 훌륭한 공장이라 일컬어졌는데,
이미 늙고 또 병들어 일을 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누워서 지시할 수는 있습니다.' 하기에,
내가 곧 아전을 보내서 불러다가 그 까닭을 말하고,
진양(晉陽 진주(晉州))에 보내서 촉석루(矗石樓)의 제도를 그림으로 그리게 했더니,
돌아옴에 미쳐서는 병이 비로소 조금 나았다.
또 일꾼들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재목을 거두니 날로 조금씩 힘이 붙어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되어 그 척도(尺度)를 헤아리고 승묵(繩墨)을 보고,
그 일을 마치게 되어서는 드디어 아주 병이 나았으니 이 어찌 천행이 아니랴.
집을 네모지게 넓히고 추녀를 겹쳐서 깊게 하니,
마루와 기둥이 넓고 높아서 바람과 비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윽고 단청을 하니,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그런 뒤에 바람과 비가 닥쳐도 근심하지 않고 뙤약볕의 뜨거움을 근심하지 않았다.
손님과 주인이 함께 기뻐하며 술을 서로 권하고 받았는데,
돌아다니고 움직이고 가만이 있기에 오히려 여지가 있고 올라가서 글을 읽으면 가슴속이 후련하니,
대개 좋은 경치의 고상한 멋을 더한 까닭이다.
교대하여 조정으로 돌아가서 8년이 지난 암자년에 외람되게 안부(按部)에 뽑히고,
또 18년이 지난 기사년에 또한 관찰사의 임무를 받고 와서 이 다락에 오르니,
이미 두 번이 된다.
돌아다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으나 누각이 더욱 새로움에 감탄했다.
산은 멀고 들은 넓으며 물은 멀고 하늘은 길며,
바람과 구름이 모습을 바꾸어 봄여름으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참으로 조화(造化)가 무궁한 것이요,
농부가 밭에서 부지런하고 목동이 들에 가축을 놓아 먹이며,
고기잡이가 물에서,
나무꾼들이 산에서 등을 구부리고 가고오는 것이 앞뒤로 잇따르고 사람의 일이 그 사이에서 대사(代謝)하는 것은 또한 조화와 더불어 무궁한 것이다.
예전에 내가 군수가 되었을 때는 나이가 젊고 기개가 날카로웠고,
나와서 안찰하게 되어서는 이미 예전 같지 않았다.
하물며 오늘날에 와서는 또 더욱 쇠약하였다.
24년 남짓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회상하니,
윤택하던 얼굴이 변해서 푸르죽죽해지고 검던 머리가 바뀌어 희끗희끗 해져서 다락 안의 보이는 것은 다 옛날에 보던 것인데 다락 안에서 보는 사람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다.
어찌 바람을 쏘이면서 몹시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소감 중에 작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군수이던 날에는 지위가 낮아 힘이 작았고,
안부가 되어서는 지위가 이미 높아져 힘이 커져서 당시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에 와서는 지위가 더 높아져 힘 또한 커졌으므로 더욱 세상에서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
한 도(道)의 권세를 조종하고 12년이란 오랜 세월을 겪었는데도 한 가지 일도 나라를 돕고 백성에게 넉넉하게 하여 뛰어나게 이목(耳目)에 있고 밝고 밝게 금석(金石)에 새겨,
이 다락의 경치와 더불어 함께 무궁한 후세에 드리울 만하게 하지 못한 것으로 말하면 더욱 한탄할 일이다.
때문에 벽에 적어서 내 뜻을 털어놓는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밀양 군수 강숙경(姜叔卿) 군이 영남루를 새롭게 하고 나서,
글을 나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다락이 읍의 좋은 구경거리인데 좁고 기울어져서 이름에 걸맞지 않더니,
지금 새롭게 하여 모두 3채를 더 달아서 두르고 단청을 베푸니,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형님이 일찍이 기문을 지어주기로 허락하고서 이루지 못했는데,
우리 형을 알기로는 당신만한 이가 없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아, 기문이 가보지 않고 멀리서 되겠는가.
강군은 진산(晉山) 문경공(文景公)의 한배 아우이다.
임금께서 공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공의 어머니가 진주(晉州)에 있는데 늙어서 데려갈 수 없음을 불쌍히 여겨 밀양이 진주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군을 내보내 군수로 삼아 봉양하게 하고,
또 공에게 한 해에 한 번씩 근친하도록 허락하였다.
경진년에 공이 근친갔다 돌아와서 내게 말하기를,
'내 아우가 관리가 되어서 은혜롭게 하지 않는데도 사랑받고 가혹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두려워하며,
일이 닦여져 폐해졌던 것을 일으켰다.
이에 그 낡은 다락을 새롭게 하니 크고 넓기가 비할 데 없고,
큰 공사를 하는데 독촉하지 않아도 모여드니,
그 관리 노릇하는 것이 참으로 내가 미칠 수 없는 바이다.
내가 그 잘하는 것을 기뻐하여 기문 짓기를 허락하고 이미 초고를 지었다.' 하고,
장차 보여주려고 하였는데,
공이 곧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의 아들 윤범(允範)에게 초고에 대해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아, 아깝다. 이제 군의 글을 받고 보니,
먼 것을 어렵게 여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마 기를 짓겠는가.
그러나 또한 기문을 지어서 공의 뜻을 맺지 않고 견딜 수도 없다.
내가 공을 따른 것이 수십 년인데,
남에 대해 헐뜯고 칭찬하기를 가벼이 하는 것을 일찍이 못 보았는데 하물며 친아우임에랴.
군의 잘한다는 것은 역시 믿을 수 있다.
대저 은혜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사랑받는 것은 인자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가혹하게 하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은 중한 위엄이 있기 때문이요,
일을 닦아 폐해졌던 것을 일으키는 것은 정치의 민첩함이니,
인자함과 위엄이 함께 드러나고 민첩함으로써 행하며,
그 미치는 바가 어찌 한 다락에 그치고 말 것이며,
한 고을에 그치고 말 것이겠는가.
이는 참으로 적지 않을 수 없다.
하물려 영남은 예전에 신라의 땅이었다.
고을이 된 것이 크고 작은 것 60여 관청인데,
누(樓)사(?)대(臺)관(觀)이 없는 곳이 없으나,
대체로 다 보이는 것으로 뜻을 취하여 이름지었는데,
홀로 이 다락만이 영남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그 강산의 좋은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니,
올라가 볼 것도 없이 멀리서도 알겠다.
특히 그 강산의 형세가 좋고 이제 영남루가 크고 넓은 것으로써 또한 강산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충분하니,
이에 또한 적을 만하다." 하였다.
○ 성원도(成元度)의 시 서문에,
"내가 사방에 유람하면서 누관(樓觀)의 좋은 것을 관람한 것이 많은데,
반 걸음도 못 가서 올라가 멀리 바라보이는 것이 확 트여 끝이 없는 것으로는 이 다락만한 것이 없었다.
남방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복주(福州)의 영호루(暎湖樓), 울주(蔚州)의 대화루(大和樓),
금주(金州)의 연자루(燕子樓),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협주(陜州)의 함벽루(涵碧樓)인데,
모두 이 다락에 비견할 수 없고,
여강(驪江)의 청심루(淸心樓),
평해(平海)의 망사루(望?樓), 단양(丹陽)의 봉소루(鳳韶樓)로 말하면 그 사이에서 우열을 겨룬다고 할 수 있다.
이 다락이 군의 길 곁에 자리잡아 북으로 소나무 언덕에 의지하고 서쪽으로 관도(官道)에 임했는데 큰 강이 그 사이에 비껴 흐르고,
늘어서 있는 봉우리가 삼면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넓은 들이 아득하고 평평하기가 바둑판 같은데,
큰 숲이 그 가운데에 무성하여 흐리거나 맑거나 아침이나 저물 녘의 사시의 경치가 무궁해서 시로는 다 기록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다 그려낼 수 없으니,
남방 산수의 신령한 기운이 밀양에 다 모여서 이 다락이 껴안고 있다.
내가 지정(至正) 갑신년(1344) 봄에 찰방(察訪)의 명을 받들어 이 도에 나와서 순행(巡行)하다가 길이 이 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군수 유(兪) 공이 나에게 구경하기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긴 구절로 된 율시(律詩)를 지어 판 위에 쓰니,
뒤에 오는 군자들은 서툴고 나쁘다고 꾸짖지 마십시오. 시에 이르기를,
'붉은 난간이 불쑥 솟아 구름 하늘에 닿았고,
줄지은 산 잇단 봉우리가 눈 앞에 모였구나.
아래에는 긴 강이 끊임없이 흐르고, 남쪽에는 큰 들이 끝없이 넓으이.
마을 다리엔 버들이 천림(千林) 비 속에 어둡고,
관로(管路)엔 꽃이 10리 연기 속에 밝구나.
올라가 풍경을 감상하고 싶지 않으니,
사람들이 환영연을 베풀까 두렵네.' 하였다." 했다.
○ 임춘(林椿)의 시에,
"일찍이 듣기를 원교(圓嶠 신선이 산다는 곳)가 푸른 물결을 임해서,
누각이 영롱(玲瓏)히 큰 자라 위에 세워 있다더니,
자라가 기울어지니 바다가 흔들려서 여러 신선들이 놀래누나.
망망히 다 없어져버리고 한 봉우리만 높이 남았는데,
그것이 날아와서 황홀히 이곳에 옮겨져,
가득히 천고에 옛 구덩이에 맞추었네.
우뚝 솟아 하늘에 닿아서 옥을 겹친 듯하고,
백 길 맑은 연못에는 압록(鴨綠 오리 머리의 진한 녹색 같은 물의 빛깔)을 비꼈구나.
물에 뜬 복숭아꽃은 동중(洞中)에서 나왔고,
사는 이들은 완연히 진(秦) 나라의 풍속이 남았네.
푸른 산 그림자 속에는 두세 집인데,
늘어진 버들 그늘 안에는 천만 집일세.
해 저무는 교외 들에 소말 돌아가고,
봄 깊은 물가에는 오리갈매기가 헤엄치네.
고깃배 아이놈의 노질은 나는 듯하여,
시냇가를 몇 굽이나 돌았는지 모르겠구나.
서울에서 오는 손이 언제 오는지.
다락 위에서 천리까지 다 보았으면,
산인지 구름인지 멀리 같은 빛인데,
기러기가 긴 하늘을 점점이 끊겼다 이어지는구나.
하늘가에 저녁 빛이 사뭇 어스름한데,
어찌 그리 집 생각이 다시 바쁜고.
거듭 이 다락에 오르지 않으리,
안개 물결 좋은 곳이 사람을 근심시키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높은 다락에 올라 바라보니 하늘에 오른 듯하고,
경치가 어지러이 앞뒤에 갑작스럽구나.
바람과 달이 모두 맑기는 예나 이제나 한가진데,
강과 산은 10리로 가운데인지 가인지 모르겠구나.
가을이 깊어 관로(管路)에 단풍이 비추는데,
날 저문 어촌에 흰 연기 이네.
손이 오래도록 읊어도 시를 이루지 못하는데,
사군(使君)이 상을 차려 첫 자리를 가다듬네." 하였다.
○ 고려 이인복(李仁復)의 시에,
"더위를 느끼면서 올라오니 가을이 하늘에 가득하고,
눈 안에 장관을 전엔 몰랐네.
산은 서쪽을 따라 꺾여서 구름 겉에 비꼈고,
물은 동에서 흘러와 기슭을 에워쌌네.
가락이 바쁜데 해와 달을 한가히 감상하고,
긴 숲 무성한 풀에 바람 안개를 즐기네.
경치 속에 머물러 거리낄 일 무엇이랴.
곤드레 취해서 끝내 비단 자리를 밟으리."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백 척 높은 다락 긴 하늘을 당기니,
책상 머리에 풍경이 무성히 늘어섰네.
시내가 가까우니 물 소리가 난간 밖에 지나가고,
구름이 개이니 산의 푸름이 처마 끝에 듣네.
1천 휴 밭 이랑에 벼가 비를 겪었고,
10리 거리에는 나무가 연기를 띠었네.
필마(匹馬)로 남으로 와서 경치 좋은 곳을 지나니,
올라와 바라보며 손님 자리에 낄 만하이." 하였다.
○ 하륜(河崙)의 시에,
"뉘라서 높은 다락을 지어 하늘까지 올려 이었나.
벽 사이에 글을 써서 기둥머리 다 채웠네.
흘러 간 세월은 잇고 이어 개울 밑에 임해 있고,
지난 일은 오래도록 기둥 가에 붙어 있네.
10리 상마(桑麻)는 비 이슬에 깊었고,
온 고장 산수는 구름 연기에 늙었네.
늦게 와 이미 저무는 해의 아름다움을 보았으니,
달이 가득한 긴 강에 다시 자리를 베푸네." 하였다.
○ 유관(柳觀)의 시에,
"올라온 것이 바로 9월 가을인데,
끝없이 봉우리들이 앞뒤를 싸안았네.
외로운 따오기는 저녁 노을 밖에 가지런히 날고,
뒤떨어진 기러기는 석양가에 놀라 일어나네.
붉은 난간 푸른 기와는 기운 달빛에 맑고,
큰 들 평평한 숲은 푸른 연기를 비꼈네.
기둥에 기대어 시를 읊다가 잠깐 조니,
꿈 속에서 마침 다시 경연에 입시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높은 다락이 영남 하늘에 높이 있어,
10리의 진기한 풍경이 한눈 앞에 보이네.
낮이 고요하여 여울 소리가 베개 위에 잇달았고,
해가 기우니 소나무 그림자가 뜰가에 떨어졌네.
농부가 봄일 하는데 마을마다 비 내리고,
들 주막에서 밥 지으니 곳곳에 연기 이네.
아버님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신 것을 생각하니,
도리어 소자가 다시 자리를 편 것을 부끄러워하네." 하였다.
○ 도원흥(都元興)의 시에,
"금빛 옥빛 다락이 밝아 물과 하늘을 누르니,
예전에 누가 이 봉우리 앞에 지었나.
한 낚싯대 드리운 어부는 빗 소리 밖에 있고,
10리 길 행인(行人)은 산 그림자 가에 있네.
난간에 들어 온 구름은 무협(巫峽) 새벽에 일어나고,
물결 쫓는 꽃잎은 무릉(武陵) 연기에서 나왔네.
갈매기는 양관곡(陽關曲)만 들으니,
어찌 수심(愁心)의 송별연을 알랴." 하였다.
○ 김계창(金季昌)의 시에,
"눈(眼)은 동남 만리 하늘에 트였고,
한 고장의 풍경은 잔 앞에 있네.
시는 편우(片雨 한 곳에만 오는 비)가 무심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흥은 긴 강이 다하지 않는 곳을 쫓네.
갈매기한테 차인 놀란 물결은 맑은 눈[雪]을 뿌리고,
소가 졸고 있는 꽃다운 풀엔 푸른 연기가 이네.
주인이 놀이하는 이의 뜻을 늘 잘 알아서,
웃으며 봄바람을 거느리고 취한 자리에 들어오네." 하였다.
신증
김계창의 시에,
"누대(樓臺)의 그림자는 물속 하늘에 거꾸로 섰고,
만 가닥 늘어진 버들은 기슭 앞을 터네.
강은 저녁 밀물을 받아 바다 어귀에 돌아가고,
구름은 겨울 비를 끌고 시냇가를 지나네.
배 뚝이 멀고 가까운 곳에 청작(靑雀)이 헤매고,
보리 밭 높고 낮은 곳에 푸른 연기를 폈네.
달 밝은데 아전들 흩어지기를 즐겨 기다려,
퉁소소리 속에서 구슬 자리에 눕네." 하였다.
○ 신부(申溥)의 시에,
"객이 남쪽 고을에 오래 머무르니 한 해가 저물었구나.
몇 밤이나 화산(華山) 앞에서 돌아가는 꿈을 꿨던가.
서리는 수국(水國)의 푸른 오리 밖에 날고,
나뭇잎은 강성(江城)의 흰 기러기 가에 떨어지네.
양 기슭은 갈꽃인데 외로운 배에는 비요,
숲 너머 울타리에는 두어 집에 연기로다.
게을리 놀아 올라와 노는 흥을 다하지 못했는데,
난간을 돌다보니 달이 자리 위에 오르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올라가 굽어보니 마침 늦은 봄[慾沂川]이라,
바람은 얼굴을 스치는데 기둥 앞에 기대네.
남국의 산천은 바다에서 다하고,
여덟 창문의 음악은 구름가에 들레누나.
들소는 코를 들고서 관도(官道 국가가 관리하는 나루)를 가로지르고,
깃드는 해오라기는 새끼를 거느리고 밤 안개를 뚫고 가네.
바야흐로 내가 다니는 것이 외롭지 않음을 알겠구나.
늘 어머님을 뵈러 오느라니 손님 자리를 더럽히네." 하였다.
○ 일본인 용장(龍章)의 시에,
"등림하니 음악이 균천(鈞天 상제(上帝)의 궁궐)인가 황홀한데,
춤추는 소매 앞에 이야기 끝을 끊임없이 잇네.
맑은 안개는 멀리 산 마을 밖에 걷히고,
저녁 새는 물가 마을가를 낮게 나네.
갈대는 한밤의 달빛을 넉넉히 차지하고,
상자(桑? 뽕나무와 산뽕나무)는 만호(萬戶)의 연기를 가지런히 나누었네.
가득 찬 술잔을 사양하지 마오,
내일 아침이면 바다 위에서 이별한 자리가 생각나리다." 하였다.
○ 이윤(李胤)의 시에,
"홀로 높은 난간에 기대어 먼 하늘 바라보니,
한 점 나잠(螺岑 소라모양의 산)이 기러기 진(陣) 앞에 있네.
현자(賢者) 달자(達者)가 고금의 묵은 자취 속에 있고,
강산의 그림은 이 다락가에 다하였구나.
겹친 숲의 나뭇잎은 가을비에 밝고,
먼 동리의 인가엔 저녁 연기 일어나네.
마음껏 취해 소리 높여 노래하고 크게 웃으니,
늙은이가 꽃다운 자리로 가지 못하네." 하였다.
○ 유순정(柳順汀)의 시에,
"호산(湖山) 만리 하늘을 배회하니,
신세(身世 내 몸이 있는 이 세상)는 20년 전 그대로구나.
두어 마을의 물가 대나무 곁에는 소가 울고,
한 덩어리 구름 아지랑이 가에는 새가 가네.
꿈은 꽃 지는 강가 집에 내리는 비에 깨고,
시는 해 지는 버들가 다리의 연기에 이루었네.
늙은 사객(詞客 글 짓는 사람.
문사(文士)사인(詞人))이 옛 생각에 쏠리는데,
어찌하여 잔이 기울고 달빛이 자리에 차는고." 하였다.
소루(召樓) : 영남루 서쪽에 있다.
○ 권기(權技)의 기문에,
"누각으로 영남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니,
예컨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금주(金州)의 연자루(燕子樓), 울주(蔚州)의 대화루(大和樓),
그리고 내 고향의 영호루(映湖樓)가 곧 그것인데,
밀주(密州)의 누각에 대해서만 영남으로 이름 부르니 어찌하여 여러 고을을 내려다보고 한 지방의 명승(名勝)을 독차지하는가.
내가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도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신유년 겨울에 예천(醴泉) 권맹손(權孟孫) 정승이 경기관찰사로 있다가 이 도에 절도사로 옮겨 오는데,
막하(幕下)에 붙어서 이듬 해 임술년 봄에 행차가 밀산(密山)에 이르렀다.
공을 따라 누각에 가서 문서를 살피는 여가에 눈을 돌려서 보니,
진기한 경치와 뛰어난 구경이 과연 평소에 듣던 것과 똑같아서 남쪽 지방에서 첫째일 뿐 아니라,
곧 등왕각(?王閣)악양루(岳陽樓)와 서로 겨루고 또한 나은 것이 있다.
다락의 서쪽에 또 한 다락이 있어 더욱 물에 가까운데, 읍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부사 안질(安質) 공이 옛터에다 지었는데,
읍 사람들이 소루(小樓)라고 부르며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ꡐ무릇 작다고 일컫는 것은 큰 것에 대하여 말하는데,
아마도 영남 옛 다락이 있는 까닭으로 이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은 규모는 비록 옛 다락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추녀와 기둥이 트였으며 들려서 머무르기에 편하고 온화해서 설사 귀빈이 한꺼번에 온다 하더라도 각각 등림하여 편히 쉴 곳이 있으니,
이 다락의 지음새가 참으로 작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여기 올라서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 잇단 봉우리와 겹친 산, 온 하늘에 긴 연기와 천리에 밝은 달을 바라보는 것이 영남루와 같음에 있어서랴.
가까이에서 상쾌한 바람소리가 추녀로 들어오고 맑은 여울이 기슭에 부딪치며,
멀리로는 마암(馬巖)에서 짐승에게 풀 뜯기는 자,
우도(牛島)에서 밭가는 자를 숲 곁에서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
또 옛 다락에 더하는 것이 있는데, 어찌 작다고 일컫겠는가.
마땅히 아름다움으로 편액해야 하니,
그 음(音)을 따라 그 글자를 고쳐 소루(召樓)라고 하라.
소(召)로 소(小)를 바꾼 것을 네가 어찌 알겠는가.
이 다락을 지은 사람은 백성들을 사랑하며 기르기에 수고하고 소송을 판결하는데 밝아서 고을 사람들이 소부(召父)에 비기고,
이 다락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다 남쪽 지방을 선화(宣化)하기에 소백(召伯의 옛 정치를 숭상할 것이니,
소(召)로 이름짓는 것이 그럴 듯하지 않은가.' 했다." 하였다.
신증
부사 이충걸(李忠傑)이 옛것에다가 증축하고 이름을 임경당(臨鏡堂)으로 고쳤다.
덕민정(德民亭) : 수산현(守山縣)에 있다.
○ 권람(權擥)의 기문에,
"정통(正統) 13년 무진(1448) 겨울에 양성(陽城) 이후(李侯)가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다가 이 부(府)로 옮겨 임명되어 와서,
정치는 통달하고 사람은 화목하며 해로운 것은 물리치고 이로운 것은 일으켰다.
수산이라는 속현(屬縣)이 부의 남쪽 30리쯤에 있는데,
부로부터 남으로 가서 서쪽에 다다르는 요충이고,
현의 남쪽에 큰 강이 있어 상산(商山 지금의 상주)으로부터 낙동강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니,
참으로 조운(漕運)이 경우하는 곳이다.
무릇 사명(使命)이 이 현을 지나갈 때에는 부에서 실상 영접한다.
현에는 공해(公?)가 없고 또 아전과 노비들이 모두 부에 들어가 일하는 까닭에,
말린 양식, 평상과 휘장 등 제반 수요 물자를 짐승에게 싣고 허리를 꾸부리고 잇달아 가고 오기에 쉴 새가 없었으므로 부사가 개탄스럽게 생각했다.
3년을 지난 경오년 가을에 현의 서쪽 언덕에 자리를 잡아 가운데에 3칸을 지어 청(廳)의 일을 보게 하고 좌우에 각각 3칸을 붙여 따뜻한 방으로 만드니 따뜻하고 서늘함이 장소를 달리하였다.
단청이 끝나자 무릇 현에서 와서 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딸려서,
무논 몇 이랑을 개간하여 때때로 농사를 권장하니,
해마다 벼 몇백 섬을 얻었다.
부엌과 곳간이 이미 세워지자 일용 도구가 또한 저장되어 부엌일 하는 사람과 정원 일 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일에 종사하는데,
도구를 갖추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무릇 전송이나 영접할 일이 있으면 부사가 혼자 말을 타고 가 쌀은 곳간에서 꺼내고 술은 통에서 떠내어 능히 갖추어 접대에 공급할 수 있으므로,
문득 부에서는 손님을 모셔 가는 수고가 끊어지고 현에서는 들어가 일하는 괴로움이 없어져서 피차가 함께 편안하여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내가 미침 객으로 갔더니,
부의 사람 강(姜)박(朴) 두 사람이 나에게 고하기를,
'부사께서 이 정자를 짓고 민폐를 혁파하였으니,
덕은 비록 백성에게 있어서 길이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문이 없을 수 없으니,
장차 당신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보건대, 온 부의 경치가 다 이 정자에 들어 있어서,
그 남쪽은 먼 봉우리가 하늘에 떠 있고 새파란 빛이 하늘에 비껴 있어 먼 곳은 옅고 가까운 곳은 짙은 것이 함께 정자에 모이고,
긴 강은 피륙을 펴놓은 듯하고 평형한 모래 밭은 눈을 깔은 듯하며,
연기는 먼 물가에 가라앉고 달은 긴 섬에 찼으며,
장삿배의 돛은 바람을 가득히 안고 고깃배는 그물을 걷으며,
그 동쪽은 넓은 들이 갈아놓은 듯 평평하여 멀리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밭두둑에서는 농부가 노래하고 뚝에서는 목동이 피리 불며,
외로운 마을에는 늙은 나무가 있고, 땅거미가 질 때에는 연기가 비끼며,
그 북쪽은 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데,
물결 위에는 연꽃이 피어서 우뚝한 푸른 일산이요,
윤기 있는 붉은 옷엔 바람이 비껴 불고 비가 윤기 있게 내려 적시고,
물가의 난초와 기슭의 향풀은 이슬을 띠고 연기를 머금었으며,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날아 모이고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헤엄치며,
못 가운데에 섬이 있어 푸른 대나무가 길쭉길쭉 아름답게 무성하여,
바람을 맞으면 구슬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달빛을 띠면 금가루를 키질하는 것 같으니,
이것이 또한 이 정자의 가장 좋은 경치이다.
아, 부사가 정자를 지은 뜻이 어찌 이에 있으랴.
이 강과 이 산이 있은 이래로 일찍이 얼마 동안이나 풀이 우거져 논밭이 묵고 쓸모 없는 언덕이었던가.
그러더니 오늘에 와서 이 정자가 빨리 이루어지자 묵은 폐단이 갑자기 새로워지니,
또한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감추었다가 우리 부사를 기다려서 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 참으로 이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어찌 다만 승지를 유람하는데 그치랴. 우리 부사의 덕은 부가 부담을 벗고 현도 편히 자게 하였다.
부사가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백성이 덕에 감복한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강의 연변에 멱례리(覓禮里), 감물지리(甘勿池里) 등이 있어 무려 수백 호가 장마로 물이 부는 때를 당할 때마다 늘 집이 물에 잠기는 것을 걱정하나 백성이 모두 일정한 곳에 옮겨 편히 살지 못하므로,
부사가 그 산 언덕에 자리를 잡아서 모두 옮겨 지어 산의 터에 의지하게 하니,
샘이 달고 땅이 기름져서 갈고 파서 먹으며 그 직업을 길이 세웠으니,
그 백성에게 덕을 베풂이 또한 크도다.
그러므로 특별히 덕(德)과 민(民) 두 자를 들어 정자에 이름붙였다고 한다.
부사의 이름은 백상(伯常)인데,
일찍이 몇 군을 맡아서 다 어진 정치를 하였다.
강(姜)은 본관이 진주로 이름이 극창(克昌)이고,
박은 본부 사람으로 이름이 학문(學問)이다." 하였다.
○ 서거정이 읊은 사시시(四時詩)에,
"들 넓고 하늘 얕아 손바닥인 양 평평하고,
봄 강물은 오리 머리인 양 밝구나.
연기는 비단 같은 꽃 천 그루를 얽고,
비는 낭간(琅?) 같은 대 몇 줄기를 씻네.
제비가 영접하니 버들개지가 날아 내리고, 갈매기가 전송하여 가는 배에 비끼네.
예나 지금이나 방초(芳草)와 청천(晴川)의 한은 같은데,
황학루(黃鶴樓)가 이름을 독차지 하다니." 하였다.
○ "겹친 산마루는 큰 뚝을 누르고,
발을 걷으니 청산(靑山)의 살아 있는 그림이 밝구나.
연꽃은 살살 부는 바람에 묵은 잎새를 추켜들고,
줄과 부들은 물이 넉넉하여 새 줄기가 자라네.
섬은 늘어 선 나무를 두르고 하늘과 함께 지나가는데,
골짜기는 맑은 강을 묶어 땅을 깎고 비껴 있네.
술통의 술이 흥을 다하지 않았으니,
내 몸 밖에 다시 무슨 공명을 알랴." 하였다.
○ "소슬한 강 언덕에 초목이 평온하고,
누대 홍벽(紅碧)은 구분이 선명하구나.
빗소리는 댓잎[三湘葉]에 먼저 곁들고,
가을 빛은 난초 줄기[九?莖]에 길이 머무네.
물이 줄어 여울에 물고기 내려가고,
구름이 깊어 고개에 기러기 비끼네.
예로부터 송옥(宋玉)이 요락(搖落)을 슬퍼하였으나,
비추부(悲秋賦)를 지었으니 벼슬 재미인지 나그네 근심인지 이름짓기 어렵구나." 하였다.
○ "긴 하늘이 흐려 언 구름이 낮게 흐르고, 1
0리 강산에 개인 눈이 밝구나.
이 생도 옥계(玉界)를 헤맬 수 있으니,
신선은 금경(金莖)이 필요하지 않으리.
솔에 바람 불어 만 골짜기에 추운 소리 크고,
매화에 달 비추어 천 수풀에 여윈 그림자 비끼네.
이런 강산에 돌아가야겠는데,
하찮은 벼슬이 공명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 학교
향교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정수홍(鄭守弘)의 중신기(重新記)가 있다.
■ 역원
용가역(龍駕驛)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무흘역(無訖驛)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수안역(水安驛) :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금동역(金洞驛) : 부의 남쪽 23리에 있으며, 예전에 이동음역(伊冬音驛)이라고 불렀다.
양동역(良洞驛) : 수산현에 있으며, 부에서 41리 떨어졌다.
유산역(幽山驛) : 풍각현에 있으며, 부에서 60리 떨어져 있다.
금곡원(金谷院) :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정원(北亭院) :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남정원(南亭院) :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조화원(助火院) : 부의 남쪽 13리에 있다.
마산원(馬山院) : 부의 남쪽 28리에 있다.
무량원(無量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성덕원(成德院) : 부의 서쪽 34리에 있다.
이창원(耳倉院)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작원(鵲院) :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서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巖)이라고 부른다.
그 서안(西岸)이 곧 김해부(金海府)의 도요저(都要渚)이다.
입량적원(入良赤院) :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신증
임강원(臨江院) : 수산현에 있으며, 앞에 나루가 있다.
해양원(海陽院) :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 교량
인교(茵橋) : 부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내진천(來進川)의 하류이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나그네는 다소 보이는데,
나같이 한가한 이 드물구나.
산을 사랑하여 곳에 따라 머무르고,
시구를 얻어 홀로 읊조리며 돌아오니,
절에는 가을이 막 이르렀고,
관도(官塗)에는 이슬이 마르지 않았네.
마친 이 무릎을 낄 만하니,
강 위에 낚시터가 있네 그려." 하였다.
사포교(四浦橋) : 작원 앞에 있다.
■ 불우
영정사(靈井寺) : 재악산(載嶽山)에 있다.
만어사(萬魚寺) : 만어산에 있다.
안수사(安水寺) : 종남산(終南山)에 있다.
봉천사(鳳泉寺) : 화악산(華嶽山)에 있다.
용천사(湧泉寺) : 비슬산(琵瑟山)에 있다.
영은사(靈隱寺) : 남산(南山)에 있다.
■ 사묘
사직단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추화산(推火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부리(府吏) 손긍훈(孫兢訓)이 고려 태조를 도와서 공이 있으므로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를 추증하고, 광리군(廣理君)을 봉하였으니, 바로 사신(祠神)이다." 한다.
여단 : 부의 북쪽에 있다.
신증
■ 종묘
김종직(金宗直)의 묘 : 지동(池洞)에 있다.
■ 고적
귀화 부곡(歸化部曲) :
고려 원종 12년(1271)에 군(郡) 사람 방보(方甫)계년(桂年)박경순(朴慶純)박평(朴平)경기(慶祺) 등이 장차 진도(珍島)에 있는 삼별초(三別抄)에 호응하려고 부사(副使) 이이(李?)를 죽이고 드디어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라고 일컬으며 군현(郡縣)에 이첩(移牒)하고,
그 무리를 보내어 청도 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을 죽이니,
청도 사람들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하여 섬멸하였다.
또 군 사람들을 소집하여 일선 현령(一善縣令) 조천(趙仟)을 함께 모반하게 하니,
조천이 따랐다.
금주 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 경주 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 등이 와서 토벌하자,
조천이 곧 손일(孫逸)과 함께 방보 등을 꾀어 죽이니,
반적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대간(臺諫)들이 읍호(邑號)를 낮출 것을 여러 번 청했으나,
권세를 쥔 사람이 읍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고 늘 막았다.
충렬왕 2년(1276)에 이르러 대간이 다시 극론(極論)하여 비로소 귀화부곡으로 낮추어 계림(鷄林)에 붙이고 소복별감(蘇復別監)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두야보(豆也保) 부곡 :
일명 도련(道連)이라고도 하며, 풍각현(?角縣)에 있다.
이동음(伊冬音) 부곡 :
일명 금산(金山)이라고도 하며,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금음물(金音勿) 부곡 :
부의 동남 15리에 있다.
내진향(來進鄕) :
일명 통가(通駕)라고도 하며,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운막향(雲幕鄕) :
세상에서 백족(白足)이라고 부르는데,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신포향(薪浦鄕) :
곧 삽포(鈒浦)이다. 섶[薪]과 삽은 사투리로 서로 비슷하다.
저대(楮代) 부곡 :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오정(烏丁) 부곡 :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평릉(平陵) 부곡 :
부의 동북 15리에 있다.
음곡소(陰谷所)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고매(古買) 부곡 :
청도군 동촌(東村)과 경주 서촌(西村)에 넘어 들어가 있으며, 부에서 95리 떨어졌다.
곡량촌(谷良村) 부곡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파서방(破西防) 부곡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근개(近皆) 부곡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양량(陽良) 부곡 :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밀진현(密津縣) :
일명 죽산(竹山)이라고 한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경덕왕이 개명하여 밀양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했는데, 지금 상세히 알 수 없다.
○ 지금 살펴보건대, 권근(權近)의 《사략신라지리(史略新羅地理)》에는, 추화(推火)의 주(注)에 밀양이라 하고,
상약(尙藥)의 주에 영산(靈山)이라 하고, 추포(推浦)의 주에 밀진(密津)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영산에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멸포(蔑浦)가 있는데,
밀[推]과 멸(蔑), 밀(密)은 사투리의 음이 같으므로,
이것이 그 땅인 듯하다.
더욱이 고려 때에 영산계성(桂城)이 모두 밀양의 영현(領縣)이었으니,
이 땅도 밀양에 붙었던 것은 분명한데, 상고할 곳이 없다.
수산제(守山堤) :
수산현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을 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 한다.
못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마름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다.
세종 때에 물길을 트고 수문(水門)을 설치하여 나라의 둔전(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병구(兵區) :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김훤이 조천을 토벌할 때 병영을 주둔시킨 곳이다." 한다.
영원사(瑩原寺) :
자씨산(慈氏山)에 있다.
고려의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중 보감(寶鑑)의 비명이 있다.
○ 절에 선조루(先照樓)가 있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선조루 안에서 중이 좌선하니,
밝은 마음과 자취가 둘이 서로 알맞네.
어느 해에 한 갈대[一蘆] 위로 바다를 건넜던가.
오늘날 쌍수(雙樹) 앞에서 불경(佛經)을 뒤적이는구나." 하였다.
엄광사(嚴光寺) : 실혜산(實惠山)에 있다.
만어산 경석(萬魚山磬石) :
산중에 한 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돌이 모두 종과 경쇠 소리가 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화했다." 한다.
세종 때에 채굴하여 경쇠를 만들었으나 음률에 맞지 않아 드디어 폐지하였다.
장군정(將軍井) :
객관의 동북쪽에 있다.
샘물이 맑고 차며,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차다.
그 깊이가 10여 척은 되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속에서, "김석(金碩) 장군의 우물."이라 한다.
삼랑루(三郞樓) :
부의 남쪽 30여리에 있다. 응천(凝川)이 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 고려 중 원감(圓鑑)의 시에,
"호수 위에 청산이요, 청산 아래 누각이로다.
아름다운 이름이 길이 물과 함께 흐르네.
물가의 가게는 달팽이 껍질을 늘어놓은 듯하고,
물결 쫓아 바람 받는 배에는 바람개비가 춤추네.
상자(桑?)에 연기 깊어 천리가 저물고,
마름꽃과 연꽃이 늙어 온 강에 가을빛이로구나.
낙하 고목(落霞孤鶩)은 낡은 말일세.
새 시 지어 경치 놀이를 적노라." 하였다.
추화산 고성(推火山古城) :
산꼭대기에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3백 60척이고, 안에 샘이 둘, 못이 하나 있다.
■ 명환
고려
정운경(鄭云敬) :
충혜황 때에 밀양 사람이 정승 조영휘(趙永暉)에게 베를 빌린 일이 있었는데,
영휘가 어향사(御香使) 안우(安祐)에게 부탁하여 이첩해서 징수하게 하니,
운경이 말하기를, "밀양 사람이 베를 빌린 것은 조영휘가 스스로 거두어들일 것이지 공소(公所)에서 문책하기에 마땅한 일이 아니다." 했다.
안우가 노하여 좌우 사람들을 시켜서 욕보이니,
운경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이제 이미 천자의 명을 교영(郊迎)하였는데, 장차 어떻게 나를 죄주시렵니까. 공이 천자의 말씀을 펴서 먼 곳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감히 이렇게 하십니까." 하자, 안우가 굴복하여 그만두었다.
유희(劉曦) :
의종 때에 어시(御試)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장원 급제는 보통 있는 일이지만, 천자의 문생(門生)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하였다. 뒤에 지방에 나가서 주(州)의 원이 되었다.
윤송균(尹松筠) :
원 노릇 하기를 청렴하고 곤궁하며 엄하고 굳세게 하였다.
본조
유두명(柳斗明)이교연(李皎然)성순조(成順祖) :
모두 부사였다.
임수창(林壽昌)허계(許誡) :
모두 정사에 임하기를 청렴하고 대범하게 하였다.
신증
이세전(李世銓)이세응(李世應) :
정사에 임하기를 엄하고 밝게 하여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 인물
고려
박의신(朴義臣) :
본부의 아전으로서 학문을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거듭하여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박영인(朴永寅) :
의신의 5대손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림랑 감찰어사(文林郞監察御史)에 이르렀다.
박의중(朴宜中) :
전라도 김제(金堤) 우거(寓居) 조 아래 자세히 나온다.
박인간(朴仁幹) :
과거에 급제하였다. 태위심왕(太尉瀋王)을 따라 토번(吐藩)에 들어갔다가 귀국하자 익찬공신 첨의평리(翊贊功臣僉議評理)가 되었다.
본조
박위(朴?) :
처음에 우달적(于達赤)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이르렀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4번 수령이 되고, 3번 남쪽 변경을 수비하니 구적(寇賊)이 평정되어 백성이 편안했으므로 크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당성(唐誠) :
절강(浙江) 명주(明州) 사람인데,
원(元) 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하여 동으로 와서 본조 초부터 사대 이문(事大吏文 중국에 보내는 공문서)을 전담했다.
벼슬은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렀다.
나라에서 명하여 본부로 그 본관(本貫)을 삼게 하였다.
박돈지(朴敦之) :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비서감(?書監)에 이르렀다.
박언충(朴彦忠) :
고려 말기에 왕복명(王福命)을 따라 왜병을 격파하고 동래성(東萊城)을 회복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호조 참의를 지냈고,
지방에 나가서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가 되었다.
나이 97세에 죽었다.
박홍신(朴弘信) :
인충의 아우인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무예의 재간이 있다.
벼슬은 사재 감정(司宰監正)에 이르렀다.
세종 기해년(1419)에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종군하여 선봉으로 상륙해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변계량(卞季良) :
자는 거경(巨卿)인데,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세자의 스승이며 20여 년 동안 대제학을 지냈고, 사대교린(事大交隣)하는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춘정집(春亭集)》이 있다.
박중손(朴仲孫) :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하고 중요한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서 밀산군(密山君)을 봉하였고,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아들 미(楣)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손비장(孫比長) :
2번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명(文名)이 있으며, 벼슬은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신증
박건(朴健) : 중손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박열(朴說)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 우거
현석규(玄碩圭)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이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다.
■ 효자
본조
이신(李申) :
벼슬을 거듭하여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중(喪中)에는 밤에 허리띠를 풀지 않고 애통해 하다가 쇠약해져서 뼈가 드러났다.
모든 상구(喪具)는 여러 형제와 함께 마련하지 않고 손수 부담하였고,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김불수(金不受) :
부모를 위해 여묘살이 6년을 하였는데, 정문하였다.
박심(朴尋) :
벼슬하여 남해 현령(南海縣令)이 되었다.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면서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하였다.
금지(今之) :
12살에 어머니를 따라 가서 산밭을 매다가 마침 날이 저물었는데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자, 금지가 한 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호미를 쥐고 범을 때리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구해 달라고 외쳤다.
백여 보쯤 가서 붙잡고 있던 어머니가 점점 굳어지니 범이 버리고 가버렸다.
시체를 거두어 집에 안치하고는 밤새워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옷을 팔아 관을 사서 장사지냈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려하였다.
신증
전불산(全佛山)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죽어서 여묘살이를 하는데, 밤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반드시 무덤 앞에서 호곡(號哭)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복(服)을 마치고 또 3년을 여묘 살았는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하였다.
■ 열녀
본조
손씨(孫氏) :
윤하(胤河)의 딸인데, 16살에 초계(草溪) 사람 안근(安近)에게 시집 가서 겨우 며칠 만에 남편이 죽자, 울면서 3년 동안 예를 갖추어 손수 잔을 올렸다.
복을 마치게 되자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나이가 젊은 것을 가엽게 여겨 그 수절하려는 뜻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손씨가 죽음으로 굳게 항거하였다.
할아버지의 위엄과 노여움이 닥치자, 손씨가 몰래 뜰 안의 대나무 숲에 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그 형이 마침 보고서 풀어주었다.
손씨는 곧 시댁으로 돌아가서 살았는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먼저 지아비에게 제사지내고 나서야 먹었다.
32살에 죽었다.
신증
난비(卵非) :
정병(正兵) 김순강(金順江)의 아내였다가 뒤에 버림을 받자, 그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니, 난비가 목놓아 울면서 말하기를, "한 몸으로 두 남편을 섬기는 일은 죽어도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곧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지금 임금 18년에 정려하였다.
■ 제영
노공주거회(路控舟車會) : 임춘(林椿)의 시에,
"산군(山郡)에 경치가 좋은 곳이 많아,
이름이 높아 한 고장의 으뜸일세.
지세가 영특하여 사람이 스스로 잘나고,
들이 기름져 풍년 잦으이. 길이 당겨 배와 수레가 모이는데,
풍속은 아직 예의(禮義)가 있네.
선비가 많기로는 촉군(蜀郡)과 같고,
경치가 좋기로는 여항(餘杭)보다 낫구나.
송국(松菊)은 팽택(彭澤)에 거칠고,
연파(煙波)는 악양(岳陽)에 움직이네.
산이 깊어 새가 지저귀고,
하늘과 물은 푸르고 넓구나.
산이 푸르러 새 경계를 열고,
호수가 맑아서 분단장한 듯하네.
하늘까지 닿은 나무 장막이 늘어섰고,
눈이 날려 차나무가지에 아롱거리네.
사시에 떨기진 대나무 푸르고,
집마다 세버들 누렇구나.
술잔과 쟁반에 산해 진미 넉넉하고,
현관(絃管)은 음률이 묘하구나.
승경(勝景)을 만나 시흥(詩興) 더하고,
여가에는 술잔에 곤드라지네.
봄에는 오리떼 어지러운 물가에 가고,
저물녘에 연봉루(燕鳳樓) 서늘한 곳에 잔치를 하네.
꿈은 서창(書窓)의 달빛에 깨고,
옷은 술 취한 잠자리 향기에 엉켰구나.
마음은 위로하고 일은 즐기고,
흥겨워 청광(淸狂 미치지 않고서 미친 듯이 하는 것)을 함부로 하네.
오래도록 산천의 만류를 받으니,
돌이켜 길 먼 것이 서글프구나.
남아 있는 노을에 등왕각(?王閣) 바라보고,
밤비에 소상(蕭湘)의 대나무 소리 듣네.
가는 말에 채찍하여 떠나는데,
마음은 기러기 따라 바쁘구나.
왕발(王勃)의 문필이 없음이 아깝구나.
낙하고목(落霞孤鶩) 솜씨로 남창(南昌) 적듯하지 못하네." 하였다.
탄성격석훤여우(灘聲激石喧如雨) : 정추(鄭樞)의 시에,
"여울은 돌에 부딪쳐 비처럼 요란하고,
밤 기운은 하늘에 떠서 연기처럼 옅구나." 하였다.
영남루하대천횡(嶺南樓下大川橫) : 이색의 시에,
"영남루 아래 큰 개울 비끼고,
가을 달과 봄바람이 태평하구나." 하였다.
운횡고첩천년수(雲橫古堞千年樹) : 김근(金謹)의 시에,
"구름은 옛 성 천년 나무에 비꼈고,
벼는 가을바람 부는 만호(萬戶)의 연기 속에 익어 있네." 하였다.
황요취롱번풍맥(黃搖翠??風麥) : 이발(李潑)의 시에,
"누렇게 흔들리는 것은 푸른 두둑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보리요,
희게 끌리는 것은 푸른 언덕 물가의 연기로다." 하였다.
십경(十景) 서거정의 시이다. 우령한운(牛嶺閑雲) :
"우령이 멀리 겹친 청강석을 꽂은 듯하니,
영남의 아름다움이 천하에 제일일세.
아름다운 누각은 들보에 금오(金鰲)의 머리를 그렸고,
한가로운 구름이 둘러 있어 오색(五色) 위에 높다랗구나.
누가 구름을 무심타 하는가,
생령을 윤택케 하니 원래 술법이 있더라.
어찌하여 일찍이 해를 가려 부질없이 하늘을 막는다 하였던가.
큰 가뭄에 며칠 안에 장마를 이루어 주리라." 하였다.
마산비우(馬山飛雨) :
"동풍에 발이 걷혀 12난간이요,
한번 바라보는 안계(眼界)는 동남이 트였구나.
긴 숲이 가렸다 비쳤다 하여 물가와 물가가 새뜨고,
마산(馬山) 한 점은 청아환(靑鴉?)일세.
문득 강 구름이 옻같이 검더니,
소낙비 날려 은 살대 번득이네.
긴 바람이 강을 쓸고 가니,
반변(半邊) 청산이 지는 해를 머금네." 하였다.
응천조정(凝川釣艇) :
"응천이 멀리 은하수에서 와서,
누 앞을 푸르게 물들여 포도주를 괴네.
간밤에 작은 비가 삿대에 반이나 물을 불리니,
고기잡이 거룻배 뜻대로 물결 따라 돌아오네.
복사꽃 뜬 잔잔한 물결에 쏘가리 새끼 살쪄,
쟁반에 회를 치니 눈 날리는 듯하구나.
얼큰히 취해 북[鼓] 밑에서 창랑(滄浪)을 읊조리니,
인대 황각(麟臺黃角)은 알 바 아닐세." 하였다.
삽포어등(鈒浦漁燈) :
"삽포에 아침이 오니 새물이 일고,
하늘이 촉촉하여 가을 밤이 맑구나.
잎 떨어져 성긴 숲에 강바람 아니 불고,
어등(漁燈)이 반짝반짝 별을 늘어 놓았네.
야로(野老)들이 기뻐서 나뒹굴 듯하는구나.
금년에 풍어(?漁)이니 돈 걱정 마라.
술에 가재 안주로 다시 서로 위로하니,
외로운 배가 갈꽃 가에서 밤을 새우네." 하였다.
용벽춘화(龍壁春花) :
"용두산(龍頭山) 위에 봄이 정말 좋구나,
철쭉꽃이 벼랑 가득히 봄이 한창일세.
하룻밤 좋이 온 비 진국술 같아서,
꽃이 만발하여 타는 듯 붉구나.
뉘 집 젊은이가 금장니(錦障泥 비단으로 만든 말 다래)했나.
술병 지니고 동에 서에 노니네.
날 저물어 돌아오니 봄빛이 얼굴에 가득하고,
말굽 아래 무수히 꽃잎 날리네." 하였다.
율도추연(栗島秋煙) :
"누 앞의 10리 앵무주(鸚武洲)에는,
밤 꽃이 눈 같고 향기 넘치네.
늘어진 밤송이 별같이 많아서,
가을이면 만섬 황금 거두네.
나무 끝에 희게 비낀 것은 연기 아닌 연기인데,
만가(萬家)의 연기는 멀리 서로 이었구나.
태평한 기상을 그릴 사람 없구나.
묘수(妙手)로 용면(龍眠 이공린(李公麟))을 수고시켰으면." 하였다.
영봉초욱(塋峯初旭) :
"금계(金鷄)가 꼬꾜 우니 부상(扶桑)의 새 아침일세.
육용(六龍)이 해바퀴를 떠받쳐 올려,
짙은 붉은 빛 햇살이 찬랁하여 산호 빛이요,
큰 물결 만 두둑에 금빛 번득이네.
조금 뒤에 만 길 언덕에 날아 올라서,
하루에 끝없이 푸른 하늘 한 바퀴 도네.
긴 밧줄로 구오(九烏 해의 별칭) 묶어다가,
만고 하늘 한가운데에 달아 놓았으면." 하였다.
나현적설(羅峴積雪) :
"강 구름이 컴컴하더니 먹을 흠뻑 뿌리네.
눈송이 훨훨 자리[席]보다 크구나.
하늘 땅 사이에 온통 맑은 기운이요,
한 조각 안개만한 틈도 없구나.
예전부터 삼백(三白)하면 풍년을 기약한다는데,
집집마다 백옥 같은 천 두둑 밭이니,
황충(蝗蟲)이 천 길 땅속으로 들어가고,
명년에는 집집이 벼를 거두리." 하였다.
서교수계(西郊修?) :
서 자는 동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 "봄날이 사람에게 알맞게 옥과 같이 따뜻하고,
서교의 방초(芳草)는 베보다 가늘구나.
교외에 가득히 꽃비 붉게 날리고,
봄 물결이 쏴쏴 유수곡(流水谷)일세.
동리 푸닥거리에 구름같이 모여서 잔질 빨라 어느듯 모두 흥청거리네.
풍류는 영화(永和) 봄만 못지 않은데,
취해 쓰는 글이 누가 왕장군(王將軍)과 같을꼬." 하였다.
남포송객(南浦送客) :
"아침에 조금 오는 비는 기름같이 윤나고,
관가(官街)의 푸른 버들 명주실같이 가늘구나.
아이 하나 말 한 필에 쌍 술병 달고서,
손님 전송하러 남포교(南浦橋)를 바로 지나니,
인생의 모이고 흩어짐이 뜬구름 같아,
부별(富別) 빈별(貧別)이 모두 상심하는데,
이구(驪駒 송별곡) 한 곡은 노래 이미 한창이요,
하늘 길고 물 멀어 사람 근심시키네." 하였다.
[비고]
■ 연혁
중종 13년(1518)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부(府)의 땅을 갈라 청도(淸道)영산(靈山)경산(慶山)현풍(玄風) 등의 읍으로 나누었다.
17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
선조(宣祖) 33년(1600)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였다가 이듬해에 파했는데,
37년에 다시 겸했다.
인조(仁祖) 7년(1629)에 파하고 19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했는데 현종조(顯宗朝)에 파했다.
■ 고읍
밀진(密津) :
지금 영산현 남쪽 34리이다.
멸포(蔑浦)는 곧 현의 땅이다. 본래 신라의 추포(推浦)인데 죽산(竹山)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16년에 밀진으로 고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을 삼았고 고려 초에도 이에 속했다.
수산(守山) :
남쪽으로 40리이다. 본래 천산 부곡(穿山部曲)이며,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에 수산으로 승격하고 현종 9년(1018)에 내속하였다.
■ 방면
부내(府內) : 끝은 10리이다.
부내초동(府內初同)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부내이동(府內二同)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부내삼동(府內三同) : 위와 같음.
부북(府北)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동(上東)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동초동(上東初同)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동이동(下東二同)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중초동(中初同)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80리이다.
중이동(中二同) :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7리다.
중삼동(中三同)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상남(上南) : 끝은 30리이다.
하남초동(下南初同) : 끝은 20리이다.
하남이동(下南二同) : 끝은 30리이다.
하남삼동(下南三同) : 끝은 50리이다.
상서초동(上西初同) :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서이동(上西二同)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서삼동(上西三同)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중서(中西) :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고미(古彌) : 동북으로 처음은 80리이고, 끝은 1백 20리이다.
내진향(內進鄕) : 다른 이름은 통가(通駕)로, 서쪽으로 20리이다.
운막향(雲幕鄕) : 통속적으로는 백족(白足)이라 한다. 남으로 25리이다.
신포향(薪浦鄕) : 즉 급포(級浦)이니, 아래에 보인다.
이동음 부곡(伊冬音部曲)은 일명 금산(金山)이라 하며, 남쪽으로 20리이다. 지금의 음물 부곡(音勿部曲)은 동남쪽 아래로 5리이다.
오정 부곡(烏丁部曲)
평릉 부곡(平陵部曲)은 동북쪽으로 15리이다.
고매 부곡(古買部曲)은 청도(淸道) 동남 경계와 경주 서쪽 경계를 넘어 들어갔으며, 동북쪽으로 95리이다.
곡양소 부곡(谷良所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다.
파서방방 부곡(破西防防部曲)은 남쪽으로 30리이다.
근개 부곡(近皆部曲)은 서쪽으로 25리이며,
양량 부곡(陽良部曲)은 북쪽으로 10리이다.
음곡소(陰谷所)는 서쪽으로 25리이다.
■ 봉수
성황(城隍) : 즉 추화산(推火山)이다.
백산(柏山) : 남쪽으로 40리이다.
■ 영아
읍창(邑倉)
북창(北倉) : 고칭면(古稱面)이다.
동창(東倉) : 상동면(上東面)이다.
하동창(下東倉) : 하동면(下東面)이다.
남창(南倉) : 남쪽으로 30리이다.
서창(西倉) : 서쪽으로 35리이다.
○ 삼랑창(三郞倉) :
후에 조창(漕倉)이라 불렀는데, 남쪽으로 40리 강변이다.
영종(英宗) 을유년(1765)에 우참찬 이익보(李益輔)가 건의하여 설치하고,
밀양(密陽)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김해(金海)양산(梁山) 등 여섯 읍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운송하여 서울로 보냈는데, 밀양 부사가 받는 것을 감독하고 제포 만호(薺浦萬戶)가 거느리고 가 바쳤다.
■ 진도
뇌진(磊津) : 남쪽으로 35리이다.
수산진(守山津) : 남쪽으로 40리이다.
용진(龍津) : 남쪽으로 36리이며, 수산진 하류이다.
오우진(五友津) : 남쪽으로 40리이며, 용진 하류로서 오른쪽으로는 김해(金海)와 연접하여 통한다.
■ 교량
내포교(內浦橋) : 작원(鵲院) 앞에 있다.
누정 읍승정(揖升亭)응향루(凝香樓) : 모두 읍내(邑內)이다.
■ 사원
예림서원(禮林書院) : 명종 정묘년(1567)에 건립하고 현종 기유년(1669)에 사액하였다.
김종직(金宗直) : 자는 계온(季溫)이고, 호는 점필재(?畢齋)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인데 영의정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한주(朴漢柱) : 자는 천지(天支)이고,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연산주 갑자년(1504)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이고,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표충사(表忠祠) : 영종 계해년(1743)에 건립하고 같은 해에 사액하였다.
석 휴정(釋休靜) : 자는 현응(玄應)이고, 호는 청허(淸虛)라고도 하고 서산(西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성(俗姓)은 최씨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선조 임진년(1592)에 승군(僧軍)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니, 국일자도 대선사 도총섭(國一紫都大禪師都摠攝)의 호를 하사하였다.
석 유정(釋惟政) : 자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사명(泗溟)이라고도 하고 송운(松雲)이라고도 하는데, 속성은 임(任)씨이고, 본관은 풍천(?川)이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이고, 사시(私諡)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임진년에 휴정을 대신하여 도총섭(都摠攝)이 된 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석 영규(釋靈圭) : 임진년에 중 7백 명을 일으켜 창의(倡義)하였다.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다가 금산(錦山)에서 순국하였다. 지중추부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