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약산 김원봉 장군 1편
1920년대 일련의 암살, 파괴사건이 일제의 심장부를 강타했다.
민중의 가슴에 독립의 희망을 안겨준 이들의 이름은 '의열단'이었다.
조선의용대
피끓는 애국청년들의 발걸음은 무장독립군인 '조선의용대'로 이어진다.
식민의 어둠을 뚫고 태어난 항일의 불꽃.
그 중심엔 의열단 단장과 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있었다.
<김원봉 장군육성>
약산김원봉장군육성기록.mp3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자기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자는 것이요.
우리는 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완전히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중국의 형제들 긴히 악수합시다.
오늘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참으로 우리의 진정한 동아시아 행복사회를 건설합시다.
1938년에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중국중앙정부인 국민당정부가 최초로 인정한 한국인부대였다.
항일전선 최선두의 선전부대로 독립을 쟁취할 민족의 군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전진했던 조선의용대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젊은 혁명가 김원봉.
그는 1920년 청산리전투이래 숨죽어있던 항일무장항쟁의 맥박을 되살린 뜨거운 심장이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폭탄이 터져 수십명의 관헌들이 중경상을 입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7개월간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잡지 못했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일제의 사령탑인 총독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터트린후 유유히 사라졌다.
대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익상'이었다.
<약산과 의열단 / 박태원 저>
비행사를 꿈구던 그가 항일투사로 변모한 것은 24살의 젊은 나이에 의열단장을 맡고있던 김원봉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오.
이것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오.
<1921년 3월 5일 동아일보>
의열단은 1921년 3월 밀양폭탄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파괴와 요인암살을 위해 중국에서 폭탄을 반입한것이밀정의 고발로 발각됐고 그로인해 15명의 단원들이 검거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는 의열단이 중국지린성(吉林)의 빠후먼에서 결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6년 중국유학길에 올랐던 김원봉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지린으로 향한다.
지금은 번화가가 되어 있는 거리.
김원봉이 지린에 도착한 1919년 이 일대는 성외곽에 한적한 농촌이었다.
당시 성곽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8개의 문이있었고 빠후먼은 그중 하나였다.
<유콘(于崑) 88歲>
Q : 옛날 빠후먼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A : 이쪽이다, 전봇대 있는 저쪽이다.
우리가 서 있는곳이 빠후먼 바깥쪽이다.
이쪽은 공장이었다.
Q : 문외에는 다른 여관같은 것들이 없었습니까?
A : 없었다. 여기는 채소밭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지린성 빠후먼 외곽에 외딴집으로 13명의 청년들이 모여든다.
김원봉과 그의 학교 고향동료들이었다.
밤새 회의를 거듭한 이들은 이튿날 새벽, 전부터 뜻을 모아온 항일결사조직의 결성을 선언한다.
그것이 바로 1920년 일제의 주요기관파괴와 요인암살에 나서 세상을 놀라게한 의열단의 탄생이었다.
<조선총독부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 통보한 의열단에 관한 조사서>
조선총독부경무국에서 장문의 조사서를 작성한 정도로 일제는 '의열단'의 활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사서 맨 앞에 기록되어있는 김원봉의 이름.
김원봉은 의열단 결성과 더불어 동시에 만장일치로 단장에 추대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2살에 불과하였다.
의열단에는 5파괴, 7가살 이라는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이하 동양척식주식회사등 5개의 주요파괴대상과 조선총독이하 군부수뇌, 반민족적인사등 7가지의 암살대상을 규정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