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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조선노동당의 조직활동과 대중운동

감효전(甘曉典) 2012. 1. 26. 10:21

남조선노동당의 조직활동과 대중운동

진보평론  제8호
김득중(성균관대학교 강사/ 한국사)

1. 머리말

1946년 11월 삼당합당을 거쳐 창당하여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으로 통합하기까지 약 3년여 동안 활동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조공)의 후신이었다. 남로당은 조공과 인민당․신민당의 삼당이 합동하여 만든 당이었지만 합당과정에서 반(反) 박헌영세력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남로당은 박헌영이 주도하는 조공세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남로당의 활동은 해방직후부터 펼쳐진 조공 활동 논리의 누적되고 연속된 결과로 나타난다. 남로당은 기본적으로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당과 대중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활동을 펴나갔고 그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당과 대중조직의 운영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 분파문제에 대한 관념들은 이 시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남로당 결성으로부터 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하여 해소되는 시기는 해방후 친일파처단과 통일국가 수립이 좌절되면서 체제의 성격을 달리하는 분단정권수립으로 귀결되는 때이자 본격적인 체제전쟁인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시기였다. 이에 남로당은 미국과 이승만․한민당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단독정부수립을 반민족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단정반대투쟁을 벌여나갔고 이후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부정하고 북조선 ‘인민공화국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남로당은 미군정 인사까지도 참여하여 창당되었지만, 남북한에 서로 다른 체제가 수립된 뒤에는 정식으로 불법화되었다. 남로당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지도자나 혁명의 근거지는 북한으로 이동하였고 그 결과 남로당의 힘도 북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로당 활동은 정세와 당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삼당합당으로 결성된 남로당이 대중정당을 표방하면서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활동하는 때이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1947년 말 사실상 결렬되면서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게 되자 남로당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2․7구국투쟁’과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벌이게 된다. 이 때 제주도에서는 4․3민중항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분단정권 수립이라는 정세와 이에 대한 남로당의 단선단정반대투쟁이 진행되는 시기를 두 번째 시기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시기는 남북한 정권 수립 후 투쟁의 전선이 본격적인 체제투쟁으로 진입하면서 제주민중항쟁과 여순봉기 그리고 무장투쟁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해방 후 변혁운동의 면모를 온전히 포착하기 위해서는 대중과 관련된 당의 역할과 기능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산주의운동 가운데에서도 특히 당운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강고한 조직과 규율을 가진 볼쉐비키적 당은 물리력을 갖고 있는 지배세력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자부했고 그런 이유로 여타의 사회운동을 자기 품안에 조직할 수 있었다. 운동의 중심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던 생명력은 맑스-엥겔스에 의해 정초된 과학적 이론과 노동자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탈자본주의적인 대중운동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결합은 19세기말부터 광범한 영향력을 획득하였고 20세기를 ‘혁명의 시기’로 만들만큼 세계적 차원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결합은 항상 성공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결합이 어긋나기도 하고 그래서 실패하기도 했으며 전술적으로 성공했을 때조차 전략적 실패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 공산주의 운동’의 궤적이 말하는 바이다.

대중의 역동적 에너지는 이미 해방 직후부터 공장자주관리운동이나 소작료불납투쟁 같은 노동자․농민운동이나 건국준비위원회․지방 인민위원회 같은 자치적 정치조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공이 커다란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와 맞서 싸운 민족해방세력이었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인 대중들의 변혁 열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조공․남로당이라는 좌파정당에 의한 강력한 당운동이 전개되었고, 노동자․농민 등의 대중운동 또한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한 이유는 미소 외세의 규정력 등의 여러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지만, 대중운동과 좌파 정치세력과의 결합관계 속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공․남로당의 좌파세력은 다른 어느 정치세력보다 강력한 대중과의 결속을 과시하였지만, 양자 사이에 놓인 간극을 좁히지 못했는데, 이는 단지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박약이나 불철저한 실천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는 공산주의 운동 일반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검토하는 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평가와 맞닿아 있다. 여기에서는 남로당의 당 활동방식과 대중운동의 흐름을 검토함으로써 양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 시기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남로당의 조직활동

1) 삼당합당

1947년 삼당합당이 이루어질 당시는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였다. 이 시기에 미군정은 조공과 좌파 정치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우익은 1945년 말 이래 ‘신탁통치 반대’라는 목표를 내걸고 미군정의 도움을 받으면서 점점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조공은 대중적 힘으로 미군정을 압박한다는 ‘신전술’과 대중정당을 꾸리기 위한 삼당합당이라는 인적․조직적 변화을 통해 운동을 주도하려 했다. 따라서 삼당이 정치전략과 조직기반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범좌익세력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합당은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합당은 각 당의 차이를 조정하고 힘을 모아내는 데로 귀결되기보다는 각 정치세력의 차이를 공개적으로 확인하면서 조공은 박헌영파와 대회파로 분열되었고, 인민당은 48인파(합당 찬성파)와 31인파(여운형을 따르는 당내 우파세력)로, 신민당은 간부파(백남운세력)와 반간부파(합당 찬성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 분열 과정은 정치정세에 대한 파악과 전술의 상이함에 근거한 것이었고, 시일이 지남에 따라 3당 6파는 각각 남로당과 사로당으로 다시 결집하게 되었다.

애초에 세 정당의 현단계 혁명규정과 정치노선, 민족통일전선에서 계급동맹의 범위 설정에서 상이했고, 당시 상황을 좌우했던 좌우합작이라는 구체적 정세에서도 대처가 달랐다. 즉 공산당의 반간부파, 인민당의 여운형, 신민당의 백남운 세력 등은 좌우합작 노선을 계속 견지했지만 박헌영은 이를 반대했던 것이다. 인민당․신민당은 좌우합작을 통해서만 미소공위 속개가 가능하다고 인식한 반면 박헌영은 이를 부정하고 대중적 역량으로 민전을 강화시키는 방침을 택했다. 이러한 전술차이는 새롭게 결성될 당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가져왔다. 여운형은 삼당합당을 통해 새로 조직된 당은 미군정과 타협하면서도 투쟁하는 합법적 활동에 치중하는 당이자 좌우합작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결속하는 당이었다. 이에 비해 박헌영이 생각한 합당은 근로대중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민주역량을 결속하여 민전의 투쟁력을 더욱 강력하게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상이한 투쟁전술(좌우합작 추진/민전강화)을 조직 형태(삼당합당)와 관련시켜 본다면, 당시 합당의 주요한 주체들은 대중당에 대해 하나의 동일한 상(像)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삼당합당은 초기부터 각 정치세력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 동상이몽으로 출발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당합당 과정에서는 새로 건설되는 당이 대중당이기 때문에 전위당을 표방하는 공산당에서 노동자․농민․도시 소시민․근로인텔리 등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격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세력이 실제로 추구한 방향은 이러한 대중당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고, 이후의 급속한 정세 변화도 대중당 같은 활동을 허용할만한 사정은 아니었다.

대중당으로의 전환은 동유럽 공산당의 대중정당 전환에 큰 영향을 받았다. 북한에서 이루어진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의 2당 합당 또한 이러한 영향력 하에 있는 것이었다. 동유럽에서 대중정당 건설은 권력을 이미 획득한 공산당이 인민민주주의혁명 과정에서 권력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북한에서도 토지개혁, 노동법령 공포 등의 민주개혁을 통하여 지주세력을 몰락시킴으로써 사회의 계급구조를 노동계급 위주로 재편하였다. 이같은 사회변화가 기초가 되어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은 서로 다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산당의 정치적 주도권 아래에서 대중정당으로 자연스럽게 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조선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해방 후 진주한 미군정은 일제 지배구조를 온존시키면서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강화하고 있었고 대중들은 이러한 구조 내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남쪽에 진주한 후 제일 먼저 지방인민위원회부터 몰락시킨 미군정은 제1차 미소공위가 끝나자 조공을 직접 탄압[정판사 위조지폐 사건]하기 시작하여 조공 조직을 동요시켰다. 이에 따라 조공은 1946년 좌우합작을 미군정의 정치세력재편 공작이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입법기관 설치 의도로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중적 힘을 모아내는 조직개편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과 동유럽에서와 같이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았거나 ‘권력을 장악한 당’의 조직적 전환과 미군정과 우익에 맞서 ‘투쟁할 당’으로서 위치 지워졌던 조공의 조직 전환은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정세적 차이는 조공의 조직 전환을 북로당 건설이나 동유럽의 대중당 건설의 잣대로만 파악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당시 조공은 스스로도 대중당으로의 전환이 세계공산주의운동과 북조선의 영향속에서 추진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점은 소련과 북로당의 영향을 증명하는 것일 뿐 이것 자체가 조공의 중심세력이 의도했던 당에 대한 상(像)을 직접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남로당은 좌파세력을 모아내는데 실패했고 좌파세력은 남로당과 사로당의 두 조직으로 분열하게 된다. 그러나 사로당은 현실적 영향력이 거의 잃어가는 반면 남로당은 좌파세력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외향적으로는 매우 급진화되고 더욱 강력한 투쟁을 펼쳐 나갔다. 따라서 남로당 결성을 곧바로 좌익역량의 감소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먼저 삼당합당의 한계를 최소화시키면서 역량을 결집시켜 나가는 박헌영파의 조직 논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해방후 조공이 만들어질 때부터 ‘조공은 재건파의 당’이었고 남로당 창당은 이에 대한 형식적 완성이었다. 해방직후부터 이미 나타난 박헌영의 재건파와 장안파 간의 갈등은 일단 장안파가 조공에 합류함으로써 봉합되었지만 그것은 이론적이거나 실천적 과정을 거친 해결이 아닌 조공 북조선 분국의 재건파 지지라는 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근본적 해결은 될 수 없었다. 이 대립이 미봉된 상태에서 박헌영의 재건파는 조공을 전위당으로 규정하고 당의 볼쉐비키화를 촉구했다. 조공이 내세운 볼쉐비키 규율은 당원들의 사상적 통일보다는 실천을 위한 조직적 통일을 우선시하고 중앙집권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부르주아 국가의 군대 조직 규율과 유사하다. 사상 통일이 없이도 또 그것을 조건으로 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바로 군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공 재건파가 강조한 볼쉐비키 규율은 자기해방을 위한 계급적 주체를 만드는데 기여하기도 하였지만 당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어용논리로도 기능했다. 한편 당원들에게 볼쉐비키적인 철의 규율에 대한 강조는 하나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였다. 박헌영 계열과 반박헌영 계열의 내부 대립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수치이자 당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당원들에게 비춰졌던 것이다.

삼당합당 전까지 조공이 당을 꾸려온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합당 후부터 박헌영 계열은 당 내부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당의 불순물을 제거한다. 대회파가 삼당합당 같은 중요한 문제는 당대회를 개최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헌영 계열의 잘못된 당운영을 비판하자 박헌영 계열은 이들을 해당분자, 쁘띠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하고 대회파를 제명하거나 무기정권에 처했다. 대회파를 당에서 축출하는 것은 당내에 존재하는 기회주의적이고 불순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사상과 의지, 실천의 순수성이라는 당관념을 보존할 수 있는 조치로 이해되고 또한 하부조직의 당원을 ‘단련’시키는 효과를 내면서 조직의 형식적 통일성을 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로써 지도부의 위치는 더욱 더 확고해진다.

지도부가 정리된 다음에 당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남로당이 실시한 것은 당원 영입이었다. 남로당 창당 직후부터 실시한 당원 5배가, 10배가 운동은 대구 10월항쟁 이후 검거되거나 도피한 조직원들의 공백을 메웠다. 해방직후 계급투쟁의 넓혀진 지형 속에서 그 기운을 흡입한 2-30대 젊은 당원들은 남로당의 투쟁력을 더 한층 높였다. 하지만 이것은 대중과의 결합을 고양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남로당의 건설은 이전의 당활동방식을 근본적으로 쇄신한 바탕 위에서 대중과 밀착된 대중당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고, 당이 가지고 있던 분파문제를 반대파 축출이라는 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하고, 이전의 대중관계를 그대로 반복, 강화함으로서 대중단체를 당 지도부의 전달벨트로 재고정시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위로는 대회파를 제거하고 밑으로는 당원을 양적으로 확충하여 박헌영계열 주도의 ‘대중당’을 성립시킴으로서 당의 통일성과 전투성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배경이야말로 남로당이 1947년 이후 강력한 투쟁들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힘들이었다.

그러나 그 힘들은 대중과의 유기적 관계에 기초한 힘도, 분파간의 조정 과정을 거쳐 하나로 모아진 힘도 아닌, 허구적이며 가상적인 통일성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상, 의지, 실천에 대한 가상적인 통일성이야말로 세계의 헌병 미국과 테러를 감행했던 우익에 맞서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당원들이 기대는 곳이었고, ‘적의 반동에 폭압에 맞서 투쟁한다는 데서 우리는 하나’임을 절실히 느끼며, 그래서 자신이 당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전선에 나설 수 있었던 좌파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한편 군사주의적으로 당을 운영한 박헌영 지도부는 당 통일성에 대한 당원의 욕구를 박헌영계열에 대한 지지, 충성과 등치시키면서 투쟁력을 고양시켰다.

2) 남로당과 분파문제: 민주집중제의 모순

많은 경우 합당 실패의 원인으로 박헌영 ‘지도부의 편협성과 종파성, 대중정당에 대한 인식부족, 당권욕’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곤 한다. 즉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야말로 당내 파벌문제를 해결하고 좌익을 단결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진정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가 되면, 분파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분파문제는 김준엽․김창순/이정식․스칼라피노 같은 1960-70년대 초기 공산주의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지적한 이후부터 한국공산주의운동을 특징지울 수 있는 문제로서 줄곧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에만 특유한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마치 일제시대 식민사학이 한국인의 당파성을 지적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파문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의 특유한 모습이 아니라 국제공산주의운동사에서 끊임없이 고민되어왔던 문제이다.

국제공산주의운동사에서는 분파를 하나의 악(惡)으로 간주하여 당활동에서 분파를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 존재 자체와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시각이 존재한다. 또 한편으로는 당내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분파의 존재와 활동을 하나의 원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는데, 이 시각은 당내 이견을 조정하는 노선투쟁과 이를 작동시키는 조직적 원리로서 민주집중제를 강조한다. 당하부 조직에서의 민주적으로 조직을 작동시킴으로써 지도의 집중성과 통일을 확립한다는 민주집중제는 분파주의를 해소하는 기제로서 생각되는 것이다. 이 관점은 분파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첫번째 입장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언뜻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입장이 실제로는 서로 공유하는 하나의 관념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놀랍다. 즉 두번째 입장이 분파를 인정한다해도 그것은 분파 해소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위치지 울 때만이 그러한 것이지 항상 분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다양한 이견은 조직적 행동통일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제기되었을 때는 연기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또한 두 입장은 모두 분파를 노동계급 운동이나 당내에 존재하는 이견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외부에 있는 제국주의나 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지 계급(성)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분파발생 원인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에서 분할된 존재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대중과 관련시키지 않은 채, 단지 분파가 존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은 표피적인 해결책일 뿐이며 분파문제에 대중운동과 관련시켜 근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

조공 내 최대 분파였던 박헌영 계열이 당 하부로부터의 민주주의적 조직운영을 통해 당내부의 이견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 삼당합당 실패 원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 때 민주집중제는 분파활동과 대비되면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민주집중제는 그 자체가 모순적인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집중제는 궁극적으로 행동의 통일을 상정하고 있다. 현재의 긴급한 정치적 투쟁의 행동통일을 위한 조직적 강제는 사실상 이견 대립을 과거화시키며 결국은 무화(無化)시켜버린다. 계급대립으로 발생한 하나하나의 대립의 현장에서 적과 마주하여 투쟁해야할 당이 ‘통일성의 이름’, ‘당의 이름’으로 당원들을 일사분란한 전투원으로 호명(interpellation)할 때 당원들은 즉각 복속(subject)되는 것이다. 실천적 통일체로서의 당관념과 당내 민주주의는 상호충돌하는 가능성을 가지는데, 현실 역사는 양자가 대립할 경우 우선되는 것은 전자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박헌영파가 1946년 9,10월투쟁에서 당원들을 투사로서 호명할 때 당원들은 대회파에서 떨어져 나와 투쟁에 합류했다. 민주집중제가 당에서 ‘제대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파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분파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론적 투쟁의 부재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진함은 대회파나 박헌영파가 갖고 있는 이론적 미성숙이나 이론적 논쟁과정에 대한 치열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남로당은 당내의 이론적 중심과 실천적 중심을 동일시하였고 당내에 오직 하나의 중심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론적 사상적 차이는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기보다는 현실의 당 권력에 의해 결정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현실 권력의 힘을 우리는 북로당의 개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북조선노동당의 결정은 사로당 해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북로당은 박헌영계열이 제명처분을 내리자 이를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밝히고 대회파는 ‘3당합동을 반대하는 종파적 분열적 반당행동’을 하고 있으며, 사로당을 좌익정당의 분열을 조직하고 민족반역자 진영의 공고화를 방조한 분파주의로 규탄했다. 북로당의 남로당에 대한 지원이야말로 사로당이 분파로 형성되지 못하고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해방후 공산주의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에서 나타났던 박헌영파와 대회파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남로당과 북로당의 갈등이었다. 박헌영 계열(재건파)과 대회파(또는 장안파)간의 대립이 북로당(또는 북조선공산당)의 개입을 통해서만 조정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로당간의 대립이 해방 후 공산주의운동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핵심적인 분파 갈등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양 세력은 미소 분할점령이라는 각기 다른 조건하에서 전략과 전술의 차이를 노정했고 대중을 운동의 주체로 형성하는데서 다른 방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분파는 당에만 한정된 순수한 조직문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당내 의견 차이는 단지 당 이론가들의 말싸움이나 공론이 아니라 대중의 분할이라는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기반한다. 즉 분파주의의 원천은 당 내부가 아니라 대중운동으로부터 주어진다. 지배체제 안에서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대중은 지배권력에 의해 생산과정에서부터 분리를 강요당한다. 이 분리 때문에 대중은 단일하지 않고 부문, 지역, 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존재하게 되며 운동 또한 불균등하게 진행된다. 따라서 당의 임무는 이러한 불균등성을 통일시키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러한 관련에 주목하지 않은 채 분파문제를 단지 당의 조직문제라는 좁은 틀에 국한시켜 보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해방 후 분파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운동의 중대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광범하고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고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당(운동)을 현실의 혁명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모순의 통일(체)로 이해한다면, 당의 문제는 단지 조직문제가 아니라 혁명운동이 제기하는 다양한 모순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당운동에 대한 근본적 반성은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근본적 검토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남로당의 단정단선반대투쟁과 제주․여순항쟁

제1,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2년 동안 미소대립만을 노정하면서 결국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회부하게 된다.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유엔이라는 다수결의 힘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해주려는 시도였다. 이에 따라 1948년 유엔은 남북한에 유엔조선임시위원단(UNTCOK)을 파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려 했지만 북한은 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남로당의 ‘2․7구국투쟁’은 남북 총선거를 감시하는 임무를 띤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영등포 공장 지대의 전평 파업으로부터 시작된 투쟁은 농민, 사무원, 학생, 시민 등의 궐기로 이어졌고 군중시위․집회․봉화투쟁․삐라살포․쌀투 쟁․선전활동․학생맹휴 등이 전개되었다. 7일부터 10일까지 전개된 이 투쟁은 이후에도 계속 산발적으로 이어졌는데, 이 투쟁에서 남로당은 민중의 단독정부 반대라는 폭넓은 거부정서에 기초하여 투쟁을 계획하고, 반미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 뒤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남로당은 5․10선거를 국토와 민족을 분단시키는 매국적 선거라고 비난하며 단선단정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경찰이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가고 미군이 특별경계령을 발동한 상황에서 단선반대투쟁은 전개되었다. 전평 산하 노조가 5월 8일 총파업에 들어가고 서울시내 대학, 전문학교, 중학교 등도 맹휴에 돌입하였다. 선거가 가까워 오면서 선거반대투쟁은 마을 단위의 집회 같은 대중적 형태보다는 교통․통신수단 파괴, 선거시설 파괴, 선거공무원 공격 등 테러적 성격을 짙게 띠어 갔다. 투쟁은 선택된 특정한 장소에서 소수 당원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2․7구국투쟁’부터 ‘5․10단선단정반대투쟁’에서 남로당원들은 전면에 나서 투쟁을 수행했고 남로당은 이 투쟁에 남아있는 온 힘을 쏟았다. 이러한 투쟁은 총선거를 주도한 미군정에게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정세를 역전시키기는 힘들었다. 이 시기에 전개된 남로당의 단선단정반대 투쟁은 남한의 단독정부를 저지하는 것과 더불어 북조선에서 세워지는 인민공화국 수립투쟁과 병행되었다. 단정반대투쟁은 남한정부수립저지를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승만 신생정부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한편 북에서 세워지는 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남로당의 투쟁이 소수정예분자들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던 것도 이러한 투쟁의 목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시기부터 남로당은 남한 대중에 기초한 대중적 투쟁방법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북한의 혁명기지를 강화하는 노선에 완전히 합류한다. 따라서 ‘남조선 해방’은 북조선에 건설한 혁명기지를 토대로 한 이후 투쟁―한국전쟁―에서 기약되는 것이다.

2․7구국투쟁과 5․10단선단정 반대투쟁이 남로당의 조직 역량을 기반으로 한 목적의식적인 투쟁이었다면, 제주 4․3항쟁이나 여순항쟁은 당이 의도하지 않은 대중투쟁들이었다.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이 진행되던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과 제주도민의 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 단독정부 수립반대라는 정치적 요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의 폭력에 대한 반발로써 일어난 제주항쟁은 1949년에 정점에 달했고, 1953년을 마지막으로 진압 당하기까지 미군정과 경찰, 청년단에 맞서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제주도는 5․10선거가 치러지지 못한 남한의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선거 뒤 무차별 진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제주도민의 약 10%인 3만 여 명이 희생되었다.

제주항쟁은 남로당 중앙조직이 개입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당은 다른 지방 당과는 달리 미군정이 주도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참여하였고, 1946년 10월투쟁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는 등 중앙정치와는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봉기 결정도 제주도당(島黨)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무장봉기는 1948년 ‘2월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고 상급조직인 전남도당(道黨)과의 연락은 봉기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봉기를 결정했던 남로당 전남도당부 제주도위원회의 결정은 이 투쟁이 경찰과 청년단의 폭력적 만행에 대한 방어이자 도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자위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제주항쟁이 일어난 뒤에도 중앙당은 이 투쟁을 지도할 만한 수단이나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었을 때 전국적 운동을 통괄하는 남로당의 전술은 전면 무력투쟁이 아니었고 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을 배합하고 있었다. 또한 남로당은 미군정과 물리력으로 맞설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서 제주도의 무력봉기는 남로당을 당혹하게 하는 돌출물일 수 있었지만 제주항쟁은 대중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당이란 무엇보다도 인민대중의 필요와 창의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평가된다고 할 때, 전국적인 범위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남로당은 대중들에 의해 터져나오는 투쟁들을 추스리지 못하는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당은 대중보다 선진적이며 대중은 지도의 대상이라는 당 관념은 이제 대중들이 당보다 앞서 나가고 당은 그것을 지도하지 못하는 무능과 후진성을 노출하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중앙당의 별다른 지원없이 섬에 고립된 도당차원의 무장투쟁이 어떻게 상당한 기간 동안 진행될 수 있었을까? 항쟁의 동력이 된 것은 해방 후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운동지도세력이 대중과 밀착된 것에 있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육지의 인민위원회가 1946년에 이르러 거의 와해되었던 것과는 달리,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대중과 밀착되어 ‘사실상 제주도 유일의 정부’로서 활동하였다. 인민위원회는 민중과의 강고한 연대 속에 철저히 민중지향적인 정책을 펼친 민중자치기구였다.

그런데 밑으로부터의 많은 지지를 받던 인민위원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인민위원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인물들은 바로 남로당의 인물들이었다. 물론 인민위는 당의 지시를 곧바로 수행하는 단체는 아니었다. 인민위원회의 역량은 민전으로 이전되었고, 미군정의 탄압이 육지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한 틈을 이용해 좌익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었다. 인민위원회의 활동으로 제주도는 남한 좌익운동 가운데 가장 대중과 밀착된 정치활동의 장소로 남아있었다.

남로당도 대중의 적극적인 동참 없이는 항쟁이 성공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투쟁에도 주력하였고, 국방경비대의 지지를 획득하려 끝까지 노력하였다. 4월 15일에 열린 제주도당부대회(濟州島黨部大會)는 무장봉기를 추인하는 한편 이후의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직 역량을 총동원해 싸울 경우 기본조직과 외곽조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우려하여 능률적인 투쟁을 지속시키기 위해 당과 유격대, 유격대와 대중을 분리개편 하는 동시에 당과 유격대와 민중외곽조직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여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자위대는 인민유격대(인민군)로 개편되었고 전투에 미흡한 구성원들은 하산시켜 생업에 종사하면서 활동하는 자위대로 구성하고, 이를 인민유격대와 민중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로 삼았다.

무장투쟁과 합법투쟁을 결합하면서 출발했던 제주 4․3항쟁은 미군정과 우익이 ‘4․28평화회담’을 무산시키기 위해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키고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자, 이에 대항하는 전면적인 무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애는 삼광삼진(三光三盡) 작전은 한라산 기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마을 단위의 소개작전과 무차별 대량학살 사건들이 일어났다. 무장세력을 완전히 진압하려는 초토화작전으로 일반대중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던 자위대, 여맹, 민애청 등은 와해되었고 유격대는 대중과 분리된 채 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자비한 토벌은 항쟁 초기에 나타났던 당과 민중의 긴밀했던 유대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리게 되었다.

여순봉기는 남한정권 수립 후에도 계속되었던 제주4․3항쟁을 진압하도록 명령받은 여수 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제14연대의 소수의 좌익계 사병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해방 후부터 누적되고 해결되지 못한 정치적 욕구가 폭발한 사건이었다. 여수와 순천에서만 수 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에 알 수 있듯이 최초의 군인봉기는 거대한 민중반란으로 변화되었다. 여순사건은 군인들에 의해 촉발되었으나, 여순이 점령된 뒤부터는 지하에 숨어있던 민주애국청년동맹, 학통, 민주여성동맹, 교원‧철도노조 등의 좌익세력과 그 동조세력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인민위원회’ ‘보안대’ ‘의용군’을 구성하는 한편 5․10단선에 적극 참가한 인사나 친일파, 미국 협력자, 경찰을 체포하였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여순에서는 ‘전면적인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구호가 나왔고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의 무효’와 ‘대한민국 분쇄’를 주장하고 인민위원회 행정을 선포하여 제1공화국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나아갔다. 진압군에 저항한 세력의 대부분은 민간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즉 이 투쟁의 주체는 단지 군인들만은 아니었다. 남원․구례․보성지역에서는 군인들이 들어가기도 전에 지방좌익들이 봉기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순사건에는 남로당원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청년, 학생, 농민, 노동자 등이 참여했던 것이다.

당 차원에서 미리 계획되거나 조직되지 않았던 여순봉기에서는 요구와 구호가 통일적으로 제기되기보다는 수위를 달리하는 여러 요구가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여순봉기는 당 중앙과의 논의를 거친 것이 아니었고 사건의 시발은 우발적이었다. 지방당의 조직원들은 투쟁이 진행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했을 뿐이고 당 중앙의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도 속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남로당 전남도당은 긴급회의를 열고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토의 끝에 당의 거사로 사후 승인했다. 결국 제주항쟁과 여순사건의 두 가지 사건은 남로당이 전국적 차원에서 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48년도에 발생한 제주항쟁과 여순사건은 국가권력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조직된 무장봉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은 강경한 투쟁형태나 수단과는 대조적으로 혁명의 퇴조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1948년 단선단정반대투쟁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전개된 무장투쟁은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남로당의 주요한 투쟁전술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상 여순사건이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면 그것은 사건의 파급이 기본적으로 무장력의 이동에 의해 전개되었고 성패 또한 무장력의 수준에 따라 좌우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남로당이 완전히 비합법적인 무장투쟁으로 전술을 전환했던 것은 해방후 전개된 정치적 갈등이 남북에 성격이 다른 정권 수립으로 귀결된 이후부터였다. 이때부터 남북 정권은 상대방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체제투쟁’을 시작했다.

단정수립 후 불과 두 달 뒤 발생한 여순사건은 앞으로 드러날 남북의 체제갈등과 인민 분열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여순진압작전은 전 주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실시되었다. 시내를 점령한 뒤 즉시 실시된 협력자 색출과정은 어떠한 법률적 절차나 심사 없이 민간인을 마구 처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승만정부는 법령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발포하여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고,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생기면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48-49년 민중들의 수많은 희생은 극우정권과 미군정의 광폭한 폭력을 제어할 수 없는 좌파의 무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순사건에서 이루어진 민간인에 대한 보복 학살은 한국전쟁 초기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보도연맹원 학살의 전주곡이었다.

1948년부터 점차적으로 폭력투쟁으로 이행해가고 있던 남로당은 분단정권이 들어서고 여수에서 군 반란이 일어나, 잔류세력이 지리산으로 입산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1948년 남로당은 지방에 무장부대로서 야산대를 조직했으며 도내(道內)는 2,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구블럭을 만들고, 1개 블록이 몇 개의 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도는 야산대 도사령부-야산 지구사령부(블럭)-○○야산대 식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1949년에는 서울시와 각 도당에 조직부와 군사부를 통합하여 ‘특별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했는데, 이로써 남로당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북분립 정권의 수립은 이제 정치집단간의 갈등에서 정치체제간의 갈등과 무력투쟁으로 이행한 것이다.

남로당이 무장투쟁으로 전환한 원인은 “당이 하나의 전술로 채택한 것이 아니라 여순반란과 같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사후적으로 취해진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무장투쟁이 목적의식적으로 전개된 것이라는 평가도 있으나, 당시 상황을 볼 때 남로당은 여순봉기 후 무장투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조직적 개편과 준비를 통해 사후적으로 대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무장투쟁은 남한의 정치적 갈등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영역에서 이미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상대방 전멸을 통한 승리라는 전쟁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전개된 유격투쟁은 1949년 7, 8월 아성공격(牙城攻擊)과 9월 총공세시기에 정점에 올랐지만, 이 해 겨울부터 1950년 봄까지 전개된 국군의 ‘동계 토벌작전’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도시나 마을에 잠입하여 운동을 지속시키려 한 지하활동도 이미 조직이 노출되거나 파괴된 상태여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쟁 전에 전개된 무장투쟁은 권력을 둘러싼 투쟁과정에서 최고도에 위치하는 봉기형태, 즉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이승만정권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고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한 한정적인 투쟁이었다. 무장투쟁은 마을과 도시에서의 당사업을 병행하면서 유기적으로 전개돼야 했지만 노선의 전화과정에서 나타나듯 남로당의 주요한 역량은 무장투쟁에 투입되어 도시나 농촌에서 활동을 벌일 수 없었고 도시에서의 활동도 이승만정권의 숙청작업으로 인해 거의 이미 조직이 노출된 상황이었다. 또한 무장투쟁에 대한 북로당 지원은 주로 몇 차례의 침투시도와 강원도 게릴라에 관계했을 뿐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북한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게릴라들은 식량과 보급품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처음에 설정된 목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생존투쟁으로 변해갔다.

당과 대중의 관계에서 볼 때, 무장투쟁은 당이 대중과 유리되면서 고립된 섬으로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1946년 박헌영의 월북이래 남로당 지도부는 점차 남한을 떠나 북한에 당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남로당이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사회운동을 이끄는 데 현실적 장애가 되었고 결국에는 남한의 대중운동을 이미 남북로당 사이에서 결정된 당 방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남로당의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의 이행은 결국 남한 대중운동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남로당의 무장투쟁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이 생존할 수 없었던 정세, 즉 대중적 혁명의 퇴조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4. 해방후 당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과 분리

상식적인 생각과는 달리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남한 좌파운동의 역사는 당과 민중의 결합 그 이상으로 당과 민중의 괴리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폭발되었던 몇 차례의 대중운동은 당이 의도하지 않은 그리고 원치 않았던 봉기였다.

1947년에 일어난 대구항쟁도 그러했지만, 제주항쟁이나 여순봉기 같은 이 시기의 중요한 대중투쟁들은 남로당 중앙조직과는 상관없이 일어났다. 제주의 경우에는 남로당 제주도당부가, 여순사건의 경우에는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이 도화선이었고, 여기에 도민이나 지방 좌익이 합세한 것이었다. 사실 남로당 중앙은 이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투쟁을 일으킬만한 동기도 없었고, 계속 진행시킬만한 역량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남로당은 분단정권 수립이 기정 사실화하면서 투쟁의 초점을 북쪽의 인민공화국 수립투쟁으로 이전하고 있었고, 이는 이른바 ‘민주기지론’의 필연적 연장이었다.

해방후 한국전쟁까지 남한에서 일어난 3대 항쟁이라 할만한 1946년 대구항쟁과 제주4․3항쟁 그리고 정부수립 직후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남북분단정권 반대 등의 정치적 구호가 전면에 나서기도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이 사건들의 성격을 설명하기 힘들다. 분단정권수립 반대 등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친일파 경찰과 청년단 폭력에 대한 반발, 쌀문제 같은 생계문제 등이 놓여 있었다. 중요한 것은 봉기를 통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생활상의 고통과 모순이었다. 누적되는 민중들의 요구는 당의 정치적 구호를 앞세워 등장했다. 민중들의 봉기 원인과 그 진행과정은 당의 의도와 목적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봉기들은 당에 의해 통제되지 못했고, 당이 예상하는 것 이상의 폭력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당과 기층 민중과의 인식상, 실천상 거리는 당 지도부에 의해 거의 인식되지 못했다.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던 미군정은 소련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을 제1차적 목적으로 삼고, 남한 우익세력을 원호하면서 좌익 탄압에 나서는 한편 대중을 체제내화 시키는 선거나 적산농지불하 등의 제도적 절차를 계속 마련해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남로당은 농민․노동자가 지배권력으로부터 고통받는 있는 존재이므로 이들과의 결합을 자연스럽고 예정된 것으로 여기면서, 미군정이 취하고 있는 경제 정책으로부터 비롯된 대중포섭이라는 현실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는 남로당이 이미 비합법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은 억압받는 존재상태 때문에 필연적으로 당과 결합할 수밖에 없으며, 당이 해야하는 임무는 이데올로기적 주입이라는 인식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승만정권이 단독정부 수립 후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파시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 김구암살이라는 ‘49년 6월 공세’나 국가보안법으로 정적을 치는 정치세력 간의 테러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사회를 꽁꽁 묶어두려는 조직적 옥죄기가 이미 발동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정권은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기만 하면 도착지의 해당 경찰서에 주민이 신고하도록 하는 유숙계(留宿屆) 제도를 실시했고,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청장년은 민보단과 대한청년단으로 묶었다. 사회 각 계층에 대한 촘촘한 그물망이 짜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반공이야말로 민족과 국가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선전이 강화되고 있었다. 숨막힐 것 같은 사회조직들이 겹겹이 싸고 있는 현실은 대중들의 신체를 직접 구속하면서 좌파가 주장하는 정치적 주장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생활상의 옥죔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감각했다. 그런 것은 제기할만한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결국 정치권력의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제와 반동 통치배들로부터 남반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 북쪽의 인민공화국 수립에 매진해야하고 혁명기지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정권이 주장한 반공(멸공)과 남북 좌파세력이 주장한 조국해방이라는 두 가지 민족국가형성의 담론에서 인민들의 자리는 찾기 힘들었다. 조공․남로당은 예상하지 못한 대중적 봉기를 민중의 자발적인 항거로 인정하면서 사후적으로 그것을 추인했지만, 이같은 대중운동의 양상 앞에서 당활동은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점은 남로당 시기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해방직후 조직되었던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부정하고 미군정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주장함으로써 부정당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인민위원회와 조공은 모스크바삼상안에 대비하여 운동의 중심을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이전시켰고 그 결과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각개 격파에 의해 각 지방에서 와해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 자치운동이라 할 수 있는 공장자주관리운동 또한 전평과 조공의 산업건설운동 노선으로의 전환으로 인해 꺾여 나간다. 하지만 당운동의 논리에 따라 봉합되었던 대중의 잠재적인 투쟁력은 1946년도에 대구에서, 1948년에는 제주도와 여수에서 폭력적인 봉기의 방식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대중운동들이 당의 조직활동과 일정하게 분리되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선험적인 당-대중운동의 결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해방후 대중을 사로잡고 있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민족주의였다. 미군정의 존재는 대중이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민족국가 의식을 집어넣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였다. 일제식민지 시기와 똑같이 피억압민족의 민족의식은 그 자체의 내부로부터가 아니라 지배국가의 정책을 통해, 또 그것에 반대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일제시기부터의 품었던 독립국가건설의 소망은 해방후 미군정 통치로 이어지면서 좌절되었고 이는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건설의 더욱 강한 추동력을 갖게 했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대중의 요구는 해방 공간에서 내내 주장되었고, 이러한 민족주의 요구는 분단정권수립에 반대하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남로당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해방공간에서 영향력을 넓혀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지형 속에서였다.

5. 맺음말

당-대중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를 폐절하려는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대중운동을 그 안에 포섭하고 있는 당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상황은 ‘당 형태’로 전개된 반자본주의운동이 그 역사적 시효를 완료한 것으로 비추어진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실 사회주의운동의 순환의 역사 앞에서 해방후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운동을 허무적으로 무화시키는 것 또한 올바르지 않다. 거기에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숱한 고민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계급적 주체로 세우는데 당이 기여한 역할을 규명하고 그럼에도 끝내 대중과 함께 이루지 못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랬는지에 대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상 혁명의 20세기에 진행된 공산주의운동의 역사는 당운동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복세력이었던 당은 혁명으로 지배권력을 무너뜨린 순간 바로 그 때부터 국가체계의 핵심에 자리잡았다. 혁명당은 국가권력으로 전화하여 자본주의 국가와 경쟁하면서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통치했다. 가상적인 통일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당 이데올로기와 국가이데올로기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리가 역사적 공산주의운동이 남겨놓은 이 엄청난 딜레마와 함께 당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혁명의 동학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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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mcandle
글쓴이 : 무지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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