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꾸리고 아들 얻은’ 혜문스님, ‘환속’을 결심한 사연
2015-10-24 14:04
혜문
문화재 제자리찾기에 몸 던져온 그가 승적 버리고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혜문(42·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조계종의 유명 승려 중 한명이었다. 일제 강점기 등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외부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 환수 운동에 앞장서온 시민운동가이기도 하다. 조선왕실의궤, 대한제국 국새 등이 그의 노력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최근 혜문은 더이상 승려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를 쏙 빼닮은 아들도 낳았다.
거처인 봉선사에서도 하산했다. 주목받던 조계종의 승려 혜문은 왜 하산을 결심한 것일까. 환지본처(還至本處). 세상 만물 무엇이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재든 인간이든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혜문의 이러한 철학은 어쩌면 혼란스러운 최근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기본 해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와의 인터뷰는 이달 두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그의 승려 생활 20여년, 문화재 운동 10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승려의 삶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것, 혹은 문화재운동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 대해 말했다.
‘비승비속’의 내 인생 3막은 인간제자리찾기운동
▶ 혜민이 아닙니다. 혜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시기 외부에 빼앗긴 문화재들이 참 많은데요, 이 문화재들을 되찾아오는 데 앞장서온 분이 혜문입니다. 그가 이제 승려직도 내려놓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 3막’을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사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그는 왜 승적을 버렸을까요. 그의 철학과 인생 이야기 같이 한번 들어보실까요.
지난달 17일 승려 혜문(42·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일제 때 무단 반출된 평양 율리사지 석탑의 반환과 관련해 일본 법원의 조정기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혜문은 율리사지 석탑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 오쿠라호텔 쪽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 요청을 한 상태다. 이날 아침 일찍 도쿄 시내 한 호텔에 묵고 있던 혜문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냥 알아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혜문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문화재청 관계자가 혜문에게 더는 스님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호칭을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혜문이 귀국하자마자 문화재청 관계자는 그를 찾아와 승적 정리 여부를 확인했다. “문화재청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니까 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가 보죠 뭐. 하하하.” 혜문은 호탕하게 웃었다. “왜 나 같은 사람이 승려 그만두는 것에 이렇게 민감한 거죠? 원효대사가 아들(설총) 낳았을 때도 이렇게 주목받았을까? 하하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적을 둔 승려 혜문은 지난 10여년간 우리의 빼앗긴 문화재 환수 운동의 선두에 서왔다. 2006년부터는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로 일했다. 2006년 일본 도쿄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47권) 환수부터 2011년 일왕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1205권) 환수까지 혜문이 관여하지 않은 문화재 반환운동은 없었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 때 가져온 대한제국 국새 또한 약탈 문화재라는 사실을 밝혀낸 혜문의 반환운동 덕분이었다. 단순히 우리 것이니까 돌려달라고 하기보다 자료를 통해 언제 어떻게 약탈되었는지 밝힌 뒤 지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을 썼다. 지금까지 50개가 넘는 문화재 관련 사업을 진행한 그는 열정적인 시민운동가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친숙한 불교계 인사 중 한명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혜문은 2012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혜문은 이제 더 이상 승려가 아니다. ‘비승비속, 승도 아닌 속인도 아닌 그저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5일 오후 혜문이 서울 종로구 경희궁 앞 서울역사박물관 앞뜰 연못가에 서자 그의 모습이 물 위로 비쳤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올해 초부터 혜문은 남양주시 흥국사에서 유출된 탱화의 제자리 찾기 운동에 앞장섰다. 유출 의혹의 책임자로는 과거 흥국사 주지였던 일면 스님(현 동국대 이사장)이 지목되고 있다. 탱화 유출을 문제 삼던 즈음 혜문은 20년 가까이 거처로 삼던 봉선사를 나왔다.
이어 더는 승려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젊고 유능한 승려 혜문의 뜻밖의 행보에 조계종 안팎의 이목이 쏠렸지만 그는 구체적인 속사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왔다.
혜문은 왜 갑자기 승려의 삶을 내려놓겠다는 것일까.
그가 조계종의 승려로서 바라본 조계종 내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극적으로 승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여러 속사정이 궁금해 혜문을 만났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5일과 19일 서울 종로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실에서 두차례 이뤄졌다. 혜문은 인터뷰 내내 밝게 웃었고 민감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답변을 이어갔다.
일면 스님 상좌가 주지로 와 불편해져
-사람들이 호칭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내가 승려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기 때문에 나를 스님으로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승려는 성스러운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계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호칭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원래 승려(僧侶)는 무슨 뜻이지?
“‘승’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 상가(sangha)의 음역(한자를 이용해 외국어의 음을 표현)이다. 부처님 모시고 사는 출가한 대중의 모임이 상가다. ‘려’는 떠돌아다닌다는 뜻이지.”
-더 이상 승려가 아니라면 일반인으로 봐야 하나?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사람으로 알아달라. 승려도 아닌 속인(俗人·일반인)도 아닌 사람이다.”
-환속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환속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승려 아니면 속인, 속세 아니면 정토(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으로 번뇌의 구속에서 벗어난 세상)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한다. 그냥 하산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산에서 살았으니까.(웃음)”
-그럼 비승비속의 사람으로서 이제 자유롭게 살 것인가?
“수행자의 삶을 포기한 게 아니다. 그건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다. 구도자란 무얼까. 진실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다. 내가 20대 중반(1998년) 어느 날 그 진실을 찾으려고 갑자기 산으로 들어갔다면 이제는 그것을 세상에서 찾으려는 거다. 내 껍데기가 승려이고 승려가 아니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산속에서 부처님 모시고 벽 보고 있는 것도 구도이고, 세상에서 진실을 찾는 것도 구도이다. 불교 사상의 핵심이 ‘불이(不二) 사상’이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다르지 않고, 중생과 승려가 다르지 않다.”
-좀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승려 생활을 그만두는 사람을 아마 잘 못 봐서 그런 것 같다. 승려는 그러나 종신제가 아니다. 많은 승려가 중간에 승려 생활을 내려놓는다. 고은 시인도 원래 승려였다. 먼 과거 매월당 김시습(조선 초기 학자)이나 주원장(명나라 태조)도 승려였다.”
-승려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
“더 이상 계율을 지키고 사는 게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으려면 엄격한 삶을 살고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더는 계를 지키며 살 힘이 없다.(웃음) 인간의 감각기관이 눈·코·입처럼 열려 있으면 관심이 외물(外物)에 가게 되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부처님께서 육근(눈, 귀, 코, 혀, 몸, 잡념)이 도적이라 했다. 그것을 끊어야 수행이 가능하다. 방의 창문을 다 닫으면 외부가 아닌 방 내부에 집중하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 때문에 금욕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금욕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나?
“(일어서서 바지를 살짝 내리며) 불로 지졌다.”
그의 배 아래에는 동전보다 조금 큰 크기의 상처가 나 있었다. “20대 후반에 그렇게 했는데.(웃음) (금욕 결심이 무너질까 싶어) 일부러 여자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여자가 두려웠다. 전화번호를 주면 일부러 안 받았다. 옷도 일부러 지저분하게 입고 다녔다. 내가 잘생기면 반할까봐.(웃음)”
-‘흥국사 탱화 반출’을 문제제기한 것 때문에 종단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가?
“그런 건 아니다. 탱화 반출 의혹을 제기하면서 일면 스님(자승 총무원장 측근)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일면 스님의 상좌(고승의 대를 잇는 중)가 봉선사 주지로 결정됐다. 일면 스님을 모시는 분들이 봉선사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니 내가 더 이상 절에 있기 불편해졌다.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데 마침 부처님 불상을 바라보면서 ‘사내대장부가 쫓겨 다니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인생 3막을 열자’고 결심을 한 것뿐이다.
세상살이는 연극처럼 막(幕)이 있다. 1막은 누구나 비슷하다. 태어나서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과정이다. 2막은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대개 2막에서 인생을 끝내지만 간혹 3막을 여는 사람이 있다. 나의 2막이 승려의 삶이었다면 3막은 ‘비승비속’의 삶이다. 2막에 빌붙어 살면 적당히 명예도 유지하면서 살겠지만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2006년 도쿄의 조선왕조실록서
2014년 오바마의 국새 반환까지
50개 넘는 문화재 환수 주도
최근엔 흥국사 탱화 제자리찾기
그가 승려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서 귀국하자마자 문화재청서
승적 정리 여부 확인하는 전화
“왜 제 승적에 민감히 반응하죠?
원효대사가 설총 낳았을 때도
이렇게 주목받았을까? 하하하”
고개 돌린 에이칸도 부처상의 울림
혜문 대표의 집무실에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려 뒤를 보고 있는 부처상 사진이 놓여 있다. 그는 지난해 가을 이 부처상을 발견하고 자신의 갈 길을 또한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일본 교토의 에이칸도(永觀堂. 정식 명칭은 선림사이지만 보통 에이칸도로 불린다)에서 고개를 돌린 부처상을 발견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가 열반(세상을 뜸)한 뒤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뼛가루를 흙에 개어서 소조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고 한다. 그 소조상이 뒤를 돌아보는 상이었고 에이칸도의 부처상이 이와 유사하다. 이 부처상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원효가 왜 뒤를 돌아본 것일까. 혈육 때문이었을까. 수행자는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걸까. 높은 곳인가 중생인가 등등. 결국 내가 비승비속의 삶을 택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한 게 이 에이칸도 부처상이다.”
최근 아이를 낳고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혜문 제공
-최근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하던데 모두 사실인가?
“그렇다. 사내아이를 낳았다. 더 이상 승려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말한 건 지난해 초부터다. 모두 그즈음 벌어진 일이다. 결혼은 나와 함께 문화재 운동을 하던 이와 했다. 문화재 운동을 시작하며 10년간 50개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다짐했던 적 있다. 조선왕조실록, 대한제국 국새, (현충사 등) 일본식 조경 철거 등의 일을 2013년 하반기까지 끝냈는데 그중 60%를 지금의 처와 만난 뒤 해냈다. 유능한 사람이어서 큰 도움이 됐고 서로 온갖 일을 겪으며 호감을 갖게 됐다.”
혜문은 최근 찍은 가족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부인과 함께 갓 낳은 아기를 안고있는 혜문의 사진이다.
-아버지가 뭐라시던가?
“손주 보신 것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문화재 운동을 늘 응원해오셨는데 아들 낳은 게 내가 대한제국 옥새를 찾아온 것보다 더 큰 일이라고 칭찬하셨다.
법화경에 삼계화택의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가 불난 집에 갇힌 아들을 구하러 들어가는 이야기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데 아버지가 되는 게 종교적으로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생각한다. 석가모니도 라훌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불경에 아버지와 관련한 비유가 많다. 어쩌면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게 다 부처님의 뜻일 수도 있겠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이제 다시 승려로 돌아오는 건 어렵겠다.
“부처의 제자 중에는 7번이나 출가한 사람이 있다.(웃음) 수행을 위해 출가했다가 자손을 잇는 문제 때문에 다시 속세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게 사실 이상한 게 아닌데, 현대 사회는 속세와 연을 맺는 게 돈과 권력과 연관이 되니까 그걸 금지하는 경향이 있다. 타이(태국)도 그렇고 소승불교는 누구나 출가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렇게 한다. 우리의 태고종도 그렇고. 승려가 종신제라는 건 일종의 편견이다.”
-아들 이름은 뭐라고 지었나?
“자겸이라고 지었다. 대학(大學: 경전의 하나)에 여호호색 여오악취(如好好色 如惡惡臭)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 하라는 건데, 군자는 스스로를 속이듯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 아들이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았으면 한다. 내가 아들 낳은 걸 숨기지 않고 이렇게 공개하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원래 이름이 뭔가?
“김영준이다. 혜문은 법명(승려가 된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혜문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에이칸도 부처상’ 액자를 들고 있다. 그는 지난해 이 부처상을 발견하고 승려 생활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터져버린 고막과 어떤 특별한 능력
혜문은 1998년 출가한 뒤 조계종이 승려가 되기 위해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절차를 이수하지 않았다. 조계종 누리집의 승려 교육 과정에는 ‘출가 뒤 6개월간 행자 수련기간을 거쳐 사미(남자), 사미니(여자)가 된 다음 4년간의 승가대학 과정을 거쳐 비구(남자) 250계, 비구니(여자) 348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된다’고 게재돼 있다.
-비구계를 받지 않았던데 이유는 뭔가?
“존경하는 노스님(월운) 곁에서 매일같이 방 닦고 옆에서 공부하고 그런 게 좋았다. 어디 가라고 해도 싫었다. 자기가 앉아 있는 그곳에서 수행을 통해 세상이 열리는 것이지 어디 가서 스펙을 쌓는다고 세상이 열리는 게 아니라는 건방진 생각을(웃음) 했다.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나중에 어르신들이 특별 비구계를 주려고 많이 노력하시긴 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대중에게 존경받는 스님들 가운데에서도 비구계를 받지 않은 분들이 많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불기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군자는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의 틀에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걸 찾고 그 길을 따르며 살고 싶다.”
-어쩌다 승려의 길을 걷게 됐는지?
“원래는 나도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할 뻔했다. 95년 졸업(성균관대 사학과)하고 한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안 맞아서 1년 만에 그만두고 대학원(국문학)에 진학했다.
그때 유충엽 선생(승려·역술인)을 알게 됐다. 그분이 오행과 주역을 정리해줄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냥 컴퓨터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돕게 됐다. 유충엽 선생의 대필 작업을 하면서 소위 ‘명리’라는 학문에 눈을 떴다. 그때부터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유충엽 선생 댁에 고은 시인도 찾아오곤 했는데 자연스럽게 내가 승려에 호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출가를 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
“98년 어느 날 갑자기 승려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발심자경문>이라는 책이 있다. 중이 되면 처음 읽게 되는 책이다. 여기에 ‘나의 말을 들으라’는 구절이 있다. 어느 날 자기 마음속의 진실한 자아가 헛껍데기인 자신에게 말을 거는데 그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선생(유충엽)께서 ‘자네가 머리를 깎으면 마흔둘에 산에서 내려올 거’라고 그러셨는데 정말 그러네. 희한한 분이야. 역시.(웃음)”
-출가 뒤 어떤 깨달음의 순간 같은 게 있었나?
“서른살 되던 해였던 것 같은데 선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버렸다. 인간 이성의 어떤 단계를 넘어갈 때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무너지면 그렇게 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내가 그랬다. 2002년 1월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갑자기 왼쪽 귀 고막이 터져버렸다. 뻥 소리가 나더라. 옆에 있던 스님이 내게 귀에서 피가 난다고 해서 고막이 터진 것을 알았다.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그 에너지가 폭발한 탓 같은데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3년간 광인(미치광이)이 되었다. 사람을 패기도 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불경을 읽으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봉선사 월운 스님이 내 스승인데 그런 때일수록 불경을 읽으라 했다. 회암사에 앉아 3년간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부처님의 설법을 살폈다. 부처님이 49년간 편 일대시교(一代時敎: 부처가 열반할 때까지 전한 가르침)를 3년간 다 보게 된 거지. 그러다 2004년께 광증이 걷혔다. 그 이전에는 금강경이나 원각경 같은 불경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됐는데 그때 이해가 됐다. 벽돌에 뭔가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불경을 보며 한발 한발 내딛는데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하는 능력 같은 게 생겼다.”
-그게 뭔가?
“텍스트를 보는 힘. 뭔가를 읽으면 스캔하듯 머릿속에 자동 저장되기 시작했다. 책을 보면 몇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바로 머릿속에 저장이 됐다. ‘불보살의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힘을 줌)’ 같은 종교의 힘인 듯하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주요 성과
-그 힘으로 문화재 운동을 벌인 건가?
“그런 셈이다. 나의 이 능력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으니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활용하자고 결심했다. 지인인 김용남 변호사를 찾아가 나를 도와달라 부탁했다. 김 변호사와 함께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의 빼앗긴 문화재들을 발로 뛰어 찾았다. 빼앗긴 문화재들이 제 발로 나 여기 있다고 말하며 찾아오지 않는다. 직접 찾아야 한다.
문정왕후 어보 같은 경우도 2009년 1월부터 4월까지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계속 영어로 된 색인을 살펴보며 찾아낸 거다. 마이크로필름이 방 하나만큼 큰 거대한 아카이브를 갖고 있는 곳에서 결국 문정왕후 어보가 약탈됐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문정왕후 어보는 이번 박근혜 대통령 방미 기간 중 미국 정부가 곧 반환을 약속했다. 문정왕후 어보는 조선시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1501~1565)의 인장으로 한국전쟁 기간 미군 병사가 빼돌렸다는 미 국무부의 기록이 있다. ‘아델리아 홀 레코드’라고 명명된 이 기록을 2009년 혜문이 찾아냈고 이를 근거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한국으로의 반환을 요청해왔다.
최근 혼인신고하고 아이 낳자
문화재 운동 응원해온 아버지는
대한제국 옥새를 찾아온 것보다
더 큰 일을 했다고 칭찬해줘
아버지 되는 건 종교적으로 고귀
“수행자의 삶 포기하는 거 아냐
그건 죽을 때까지 하는 거다
중생과 승려가 다르지 않다
천성이 춤추고 노래하기 좋아해
더 이상 계율 지키며 살 힘 없어”
“있어야 할 자리 있지 않은 사람들
우리 사회에 너무 많지 않은가
능력보다 너무 높은 자리의 사람
또는 실력보다 저평가된 사람들
그런 분들 제자리 찾게 해줘야지”
전기선을 끊어간 ‘애국시민들’
-특별한 능력이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쓰여서 다행이네.
“이젠 예전 같지 않다. 마흔을 넘기니 열려 있던 뇌의 어떤 부분이 서서히 닫히고 있는 느낌이 든다. 꼭 내게 생겼던 특별한 능력만이 아니라 약간 기적 같은 운이 뒤따라 문제가 해결된 것들도 있었다. 친일파 재산 환수법(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1945년 광복 이전 친일행위로 축재된 재산에 대해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에 대한 법령. 2005년 12월 제정)이 그렇다. 2005년 봉선사 말사인 내원암 관계자가 사찰 부지 4만평을 빼앗기게 생겼다며 찾아왔다. 어떤 이가 내원암 쪽에 부지 반환 소송을 제기했는데 소송 관련 자료에 호적이 붙어 있더라. 이해창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학 졸업 때 쓴 논문이 친일파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해창이 친일파이고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이란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원암에 소송을 건 사람들이 친일파의 후손이고 이들이 재산 되찾기 소송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계사 앞에서 승려와 시민 3000명을 모아 친일파 재산 환수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촛불집회를 열었고 엄청나게 이슈화가 됐다. 마침 그해가 광복 6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해창(1865년 10월15일~1945년 3월2일)은 조선 후기 왕족으로 계몽운동과 교육사업 등을 벌였으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807인 명단에 기록됐다. 이해창의 후손들은 내원암 소유 부지가 일본 정부가 조상인 이해창에게 하사한 토지라며 2005년 토지반환소송을 냈으나 여론의 반발이 커지자 소를 취하했다.
‘친일파 재산 환수법’ 제정과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 환수의 일등 공신 혜문은 그러나 최근 애국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잇단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한국 절도범들이 2012년 쓰시마섬(대마도)에서 훔쳐온 통일신라·고려시대의 불상(일명 대마도 불상)을 일본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한겨레> 2014년 8월23일치 4면 혜문 스님 “쓰시마서 훔쳐온 동조여래입상 즉각 반환해야”) 이런 주장을 하는 밑바탕에는 그가 지금까지 ‘우리 문화재 환수운동’을 해온 게 아니라 ‘문화재 제자리찾기 운동’을 벌여왔다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한겨레신문 등을 통해 대마도 불상을 일본에 돌려주자는 주장을 한 뒤 봉선사에 머물고 있는데 누가 전기선을 끊고 가는 일도 있었다. 아마 ‘애국시민들’이 벌인 일일 텐데 친일파 재산 환수법 제정에도 기여한 사람을 친일 인사로 매도하다니.(웃음) 지나치게 감정적인 접근은 항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능력이 아직 우리 사회에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해온 문화재 운동은, 이 문화재가 어느 나라 유물인지 구분하자는 운동이 아니었다. 어디에 있는 게 제자리에 맞는 건지 고민하자는 운동이었다. 도둑놈이 훔쳐온 것을 우리 거라고 주장하는 건 억지다. 사실 위에 기반을 두지 않은 진실은 폭력이다. 부처님이 도둑질하지 말라 그랬는데 그걸 도둑질해 오면 어떡하나. 그것도 부처님(불상)을.(웃음)”
-문화재의 제자리는 어디라고 생각하나?
“세상의 모든 물건은 인연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타의에 의해 부당하게 옮겨진 것은 그 옮겨지기 직전의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 제자리라는 건 우리 시대가 만드는 거다. 예를 들어, 바람나서 가출한 어떤 여성이 있다 치자. 이 여성의 제자리는 어디일까. 가정일까? 아니면 현재 사랑하는 사람 옆일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여성의 자리가 달라지겠지. 마찬가지다. 문화재의 제자리는 그런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환지본처(還至本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와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이 불교 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우리 거니까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어쩌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 왜 시민단체가 나서서 문제제기를 하고 정부가 수습하는 식으로 되는 걸까?
“2011년부터 문화재청이 재단을 만들어 환수운동을 하고 있는데 성과가 별로 없다. 문화재 운동을 하다 보면 꼭 지켜보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문화재를 되찾아오면 꼭 자기가 성공시켰다며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들이다. 죽 쒀서 관료들 치적 홍보하는 데에 쓰이는 일을 어떤 공무원이 하고 싶어할까. 어떤 성과를 내고 싶어서 문화재 운동을 해선 안 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13년 9월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이 문정왕후 어보를 한국에 돌려주겠다고 한 결정에 대해 “한국 시민운동가들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문정왕후 어보 반환 결정에 힘입어 혜문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제국 국새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일명 ‘응답하라 오바마’)을 벌였다. 그러나 지난해 4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대한제국 국새를 반환하자 “이번 반환은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긴밀한 공조의 결과입니다”라고 언급하고 말았다.
혜문은 2004년 일면 스님의 지인으로 알려진 비구니의 집에 흥국사 탱화가 보관된 사실을 알게 된 뒤 이의 반환을 요구해왔다. 일면 스님이 흥국사 주지일 때 어떠한 이유로 이 탱화가 유출되었는데 그 경위를 놓고 올해 초부터 공개적으로 각종 의혹이 제기된 상황이다. 일면 스님은 이 사건과 관련해 자세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한겨레> 2015년 7월18일치 12면 일면 스님은 ‘저승사자’ 유출에 시치미 떼는가)
절은 용과 뱀이 섞여 사는 곳
-‘흥국사 탱화 사건’은 어떻게 될까?
“일면 스님이 그것을 훔쳐서 개인 사유재산으로 만들려 한 건 아니었을 거다. 그냥 지인인 비구니에게 불사(절의 사업)가 잘되는 데 쓰라고 주지 않았을까. 문제가 제기됐을 때 진작 돌려놓았으면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어떤 ‘침묵의 카르텔’ 구조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의혹을 부인해 오던) 그 비구니 스님이 최근 솔직하게 탱화 입수 경위를 밝혔다고 한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펑펑 울었다고 하더라. 나는 그냥 부처님의 성보(聖寶)를 지키려 한 것이고, 탱화 유출을 문제제기한 것뿐이지 누구를 괴롭히려던 게 아니다. 결국 탱화는 제자리인 흥국사로 가게 될 것이라 본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언제까지 할 건가?
“원래는 50개만 바로잡고 끝내려 했는데 이미 50개 이상의 과업을 완수했기 때문에 곧 그만둘 때가 올 거다. 이제는 인간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할까 고민 중이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다. 온갖 부정한 방법을 활용해 자신의 능력보다 너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또는 실력보다 너무 저평가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들 제자리 찾게 해줘야지. 단체를 새로 하나 만들어야 하나? 인간 제자리 찾기라고.(웃음)”
-고평가된 사람, 제자리 찾아줘야 할 인물 하나만 거론한다면?
“글쎄. 이승만? 나라를 세운 국부로 보기는 어렵지. 경복궁에다 지은 이승만 낚시터(하향정)도 빨리 철거해야 하는데. 하하하.”
혜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승려이지만 조계종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승려는 아니다. 다만 그가 출가해 조계종단의 승려로서 살아온 18년의 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혜문에게 조계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 몇가지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자승 총무원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승 총무원장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은 알고 있다. 총무원장께서 반대파의 목소리를 좀 경청할 필요는 있다. 권력이 너무 한쪽으로 몰려 있도록 시스템화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주지 자리를 놓고 최근 곳곳 사찰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어떻게 보나?
“우리 사회가 갈수록 경제 논리를 따라가고 부패해지니까 그런 것을 닮아가는 거겠지. 승가의 혼란상도 사실은 세속의 반영이다. 다만 조계종에는 ‘문중문화’라는 게 있어서 내부 다툼 이런 것들이 오래 못 가고 다 자정작용을 거치게 돼 있다. 다투면 문중에서 징계를 당한다.”
-문중문화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어른에게 제대로 지적을 못 하는 것도 있지 않나. 탱화 사건도 그러다 곪아터진 것 아닌가?
“조계종 내부에서 권력형 비리는 좀 은폐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얼마 전 한 사찰에서 주지가 국고보조금을 횡령했는데 그 주지의 상좌가 대신 처벌을 받고 넘어갔다. 그런 일들이 조계종 내부에 왕왕 있다.”
-왜 주지 대신 처벌을 받지?
“(웃음) 미래가 보장되니까 그런 거 아닐까. 그런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 다만, 절에는 용과 뱀이 섞여 사는 것이다. 어느 한면만 보고 절을 평가해선 안 돼.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다.”
“법정 불려온 700여명 미안합니다”
-서의현 전 총무원장의 복권을 결정한 최근 조계종 호법부를 보면 내부 자정기능이 마비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부처님 제자 중에 ‘앙굴리마라’라고 있다. 999명을 살해한 죄인인데 천명째를 죽이려 하다 부처님을 만나 교화되어서 성불한 사람이다. 불교는 참회의 기회를 주는 종교다. 호법부도 서의현 전 총무원장에게 그런 기회를 주려 했던 것 아닐까. 다만 서의현 때문에 우리 불교가 너무나 큰 고통과 혼란을 겪었다. 서의현의 복권을 비판하는 분들의 말도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내부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잘 정리해 나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
“중노릇하면서 나 때문에 상처 입은 분들이 많다. 나로 인해 법정에 불려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700명쯤 되는 것 같다. 친일파 후손들과 문화재 담당 공무원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냥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개인감정으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발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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