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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정일, 평양 시민혁명 때 대비 서방도피자금 40억달러 스위스은행 은닉

감효전(甘曉典) 2012. 1. 2. 20:11

 

                                       25만명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 붉은 깃발 아래  스탈린주의자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소련공산당 정부 붕괴 이후 평양 시민혁명 때 대비 서방도피자금 40억달러를 스위스은행에 은닉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평민층 식량위기와 유엔등 경제제재 조치, 소련등 스탈린주의 붕괴, 자유화 민주화 세력 탈북자 증가들으로 360만명이 거주하는 평양에서도 시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반정부세력 진압훈련 강화와 함께 서방 도피자금을 유럽등지 은행에 예금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비자금이 외국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2000년도 김정일이 약 43억 달러 상당의 외화를 스위스 은행에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히면서부터입니다. 이전부터 김정일의 비자금과 관련한 소문은 많았지만 스위스 은행의 철저한 비밀 유지 정책으로 구체적인 내역을 추적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CIA의 발표가 나오자 언론들은 미 정보 당국이 스위스에서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해 오다 1990년대 말 미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실질적인 부인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 부부로부터 김정일의 스위스 비밀계좌에 대해 이같은 정보를 얻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국제 언론들은 앞다퉈 김정일의 비자금과 관련한 특집기사를 내보냈고 2006년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여전히 약 40억 달러상당의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숨겨 놓고 있다는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북로당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밀 열성자 대회>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에 의거, 창설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모체로 하고 있다
같은 해 8월 29일 중국 옌안(延安)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조선독립동맹을 중심으로 지식층, 소시민층을 망라하고 있던 조선신민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였다 합당선언에서 북조선 노동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중적 정당을 세울 필요에 의해서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강령으로 민주주의적 조선자주독립국가 건설, 일본인. 민족반역자. 지주의 토지몰수와 토지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 일본인 및 민족반역자 소유의 공장. 광산. 철도. 운수.통신기관등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실시,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임금지급등을 내걸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김두봉(부산출신이며 독립동맹주석 출신), 부위원장에 김일성(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 허가이(모스크바대학출신이며 소련공산당 간부 출신)가 선출되었다
북로당은 1948년 8월 정권수립을 위해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권수립(1948년 9월 9일)이후인 194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평양에서 비공개로 열린 남북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1국1당 원칙에 따라 현재의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1)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2)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3)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4)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5)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2.연안파---모택동부대(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1)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2)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3)김무정(무정)----함북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4)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을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의용대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남침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었다
3.소련파----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사진인물, 김일성. 김책)과 소련공산당 출신(사진 인물, 허가이)
(1)소련지역에서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정부에 참여한 인사들
(2)분류
소련군 정찰국이나 대일참전부대---김일성. 김책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
기술자---공군이나 해군등 기술진이나 북한정부 행정요원으로 귀순
당과 행정. 외교관료---허가이등
허가이는 소련정치담당 고문으로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로당과 북로당 합당을 총지휘했으며 허가이는 남로당 박헌영 보증인으로 한국전쟁이후 남로당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과 무장봉기 시도를 하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박헌영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4.조선공산당-----북조선공산당 출신(사진인물,주영하)
주영하등은 김용범이나 현준혁등과 다르게 김일성을 지원했다

 

 

                                                                                            김일성과 박헌영

1.남로당(남노선노동당, 南朝鮮勞動黨)
1946년 11월 마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운동 단체 조선공산당과 신민주주의 혁명론 사회주의 계열 모택동주의 그룹 남조선신민당, 사회주의 운동단체 조선 인민당이 합동하여 창당한 단체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다
일제 강점기 1925년 조선공산당을 결셩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재건 하였고 북한에는 같은 해 10월 북조선분국을 두었다
당시 남한에는 여러 좌익정당들이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기습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 선포했다 조선인민공화국 대통령은 이승만박사, 부통령은 여운형선생, 수상은 박헌영으로 추대하여 좌우익연합전선을 표방했지만 미국과 소련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등을 불법화 하였다 박헌영과 그들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건국준비 조직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미국정부가 이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분석도 제기 되고 있다 김구선생이나 여러 임정요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이승만박사로 인정하는 분위기었고 이런 상황을 알고 박헌영등이 미리 선수로 조선인민공화국 건국과 대통령을 이승만박사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정 당국은 미리 소련군부를 엎고 등장한 김일성을 내세워고 박헌영 계열의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 하였다
조선공산당은 그 이후 신탁통치 지지표명 더구나 정판사사건(精版社事件) 이후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남한에서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좌익계이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여운형선생 주도로 일부 지식층이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좌익계 단체들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으로 양분되었다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선생은 좌익계열 모함과 암투로 저격되었다
남조선노동당은 합법적으로 남한의 공산화공작을 계속하였고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대남공작부,통일혁명당과 한민전 모델)을 결성하여 좌우익대립과 폭동등으로 민족분열을 꾀하였다 1946년 8월 29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4월 남북의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한으로 간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그 지도자와 함께 1955년 말까지 온갖 명목으로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대표적인 사건---박헌영등 미국의 스파이로 처형>
2.박헌영
박헌영 선생의 본관은 경북 영해(寧海),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이다 1919년 경성고보(現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이동휘 계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부통령--이동휘선생)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 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은 허헌, 부위원장은 박헌영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1953년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 전복음모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박헌영 보증인 허가이 소련정부 도움 요청등과 함께 이승엽등 강동정치학원 중심으로 무장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
-박헌영이가 남한 민주당 신익희 조병옥선생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도움 요청 죄명
-박헌영이가 남로당 당원을 팔아먹고 미국과 연합으로 한국전쟁을 획책하여 북한을 공격했다는 죄명
-스탈린 사후 평화공존 세력 흐루시초프등의 세력을 엎고 스탈린 계열 김일성 제거하려고 했다는 죄명
-박헌영 전 남로당 당수는 남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였던 언더우드(한국명 원우두)의 아들 언더우드 2세(한국명 원한경)가 키운 스파이라고 북한 통일신보가 주장했다.

8일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통일신보 최근호(10.30)는 "언더우드 2세가 미국을 위해 복무할 간첩들을 체계적으로 선발육성했다"며 "그 가운데는 미국 고용간첩으로 악명을 떨친 박헌영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통일신보는 언더우드 2세가 1939년 박헌영을 고정간첩으로 매수하고 1945년 12월 하지 주한 미 사령관에게 박헌영을 정식 인계했다며 박헌영도 6ㆍ25전쟁 직후 열린 재판에서 이같은 사실을 시인했다고 주장했다.

즉 박헌영은 "미군이 남조선에 상륙한 후 언더우드로부터 정식으로 넘겨져 하지사령관 앞에서 다시 미국간첩으로 종사하게 됐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간첩활동을 하면서 미국에 유리한 모든 활동을 해왔다"고 진술했다는 것.

통일신보는 이어 박헌영이 하지 사령관으로 받은 간첩임무는 △북조선공산당 조직내부에 남로당세력을 적극 부식하고 △중요한 공산당활동에 대해 사전에 통보하며△공산당을 합법ㆍ타협적 방법으로 친미방향으로 인도하고 △미군정청 앞에서 폭동ㆍ 파업 등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지령에 따라 박헌영은 남한에서 민주애국세력을 분열ㆍ와해시키기 위한 각종 모략과 간첩행위를 체계적으로 감행했다며 대표적인 사례는 남한 애국세력의 10월항쟁계획을 사전에 밀고해 끝내 좌절되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신보는 이어 "박헌영이 북반부지역에 잠임해 전쟁시기 북의 중요 군사비밀까지 상전(미국)에 계통적으로 넘겨주고 심지어 정부를 뒤집어엎을 무장폭동까지준비했다"고 주장했다.

비운의 공산주의혁명가 박헌영은 1955년 12월 15일 '북한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은 뒤 이듬해 7월 총살돼 파란만장한 일생을 56세로 마감했다.

 

*평민층 식량위기와 자유화 민주화 세력 탈북자 증가 그리고 인민군 사병들 탈북자 증가...

 

 

 


 

 

 

 

 

동독 공산당정권 붕괴와 독일통일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도 "유족과 러시아 국민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면서 "그는 러시아 민주화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미국인들은 탱크위에 올라 쿠데타를 저지하던 그의 모습을 잊지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소련 공산당정부 붕괴와 자유화 민주화 정부 러시아 국가 탄생)

*스탈린은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 당원으로 (북한 노동당은 스탈린주의 노선)

 스탈린이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그룹과 직접 관계를 맺었던 것은 1898년 8월이었다 즉 <멘세비킨=메싸메.닷시>라는 사회민주주의 그룹에 가입하여 비밀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이후 볼세비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스탈린의 권력을 장악한 과정은 우선 부하린과 손을 잡고 트로쯔키등의 좌파그룹을 내쫓은 다음 그는 우파마저 탄압하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때 그는 서기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는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는 분파주의자라고 매도하였다"
결국 트로쯔키는 1929년에는 소련으로 추방되었고 1940년 망명 중인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한편 스탈린과 삼두정체를 꾸몄던 좌파의 지노비예프와 까메네프도 우파의 부하린과 더불어 1936년에 숙청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곡물조달의 위기를 맞아 부하린. 즈이꼬프. 또스끼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면적 농업집단화 즉 위로부터 혁명을 단행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지도적인 당원은 다음의 셋 그룹으로 나눠져 레닌이 그것을 통괄하고 있었다
첫째그룹은 트로쯔키(뜨로쯔키)에 의해서 대표되는 좌파로서 이들은 세계혁명이 없이는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공산당은 국외의 혁명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국내에 있어서도 강력하게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네프(NEP,신경제정책)의 채용을 반대했다 지노비예프나 까메네프등도 기본적으로 트르쯔키 정책을 지지하였다
"네프(NEP, 신경제정책)은 소련이 1921년부터 레닌과 스탈린이 실시한 경제정책이다 1921년이전의 전시(戰時)공산주의와 비교하여 신경제정책이라고도 한다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정책의 극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전시공산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식량할당 징발제가 폐지되고 식량현물세가 도입되었다 납세 뒤의 잉여곡물처분은 당초 시도되었던 조직적 상품교환의 실패 후 농민의 자유에 맡겨졌고 현물세도 차츰 화폐납입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농촌의 관계에서 상품경제가 지배하게 되었고 소상품 생산자인 농민의 물질적 관심이 촉진되었다 한편 국영공업은 트러스트로 재편성되어서 상업계산제롤 옮겨졌으며 또한 일부 기업은 다시 사유화되어 중소규모의 사영 상공업 경영이 합법화 되었다 1925-1926년에는 공업생산 가운데 사적 부문의 비중이 27.1%까지 달했으나 이때에도 대공업. 은행. 운수. 외국무역. 터지등 관제고시(관제고시)라고 일컬어지던 중요한 경제영역은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1923년의 협상가격차 공황의 극복, 다음해 화폐개혁의 성공등을 거쳐서 경제부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뜻에서 신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경제정책은 레닌 스탈린 그리고 부하린등이 지지했으며 좌파세력인 트로쯔키등은 반대했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련도 강제적 농업집단화. 국유화정책등의 극단적 공산주의 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자료이다."

 

둘번째 그룹은 부하린에 의하여 지도되는 우파이다
이들 역시 러시아라는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당면한 세계혁명의 시기가 없는 이상 현실과 타협하면서 네프(신경제정책)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하린노선이 우파민족주의 경제이론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케이즌경제학 입장에서 자국 경제발전이 없는 한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외세종속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소비가 투자라는 입장이어야 국내 경제가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자국경제규모로도 잘 살아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공황을 예방할 수 있다
부하린과 스탈린은 이런 입장에서 좌파그룹 트로쯔키 계열의 공산주의 경제이론 집단농장과 무산몰수, 무산분배정책을 견제하고 제거하는데 공동 노력했다

셋째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의 지지자이다
이들은 원대한 소련은 인구도 많고 자원도 풍부하기 때문에 가령 세계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가 건설 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지지했다 세계 무산혁명과 강제적 농업집단농장 그리고 국유화정책을 지지하고 네프(신경제정책)을 반대한 좌파 트로쯔키노선과 상반된 우파 노선이었다

출처 : Intelligence Center[Night Watch]
글쓴이 : CIA bear 허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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