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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의 부인들

감효전(甘曉典) 2012. 1. 2. 17:04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정일 유년시절 아버지 김일성 주석, 생모 김정숙과 함께 찍은 사진.

12월 25일은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입니다. 해마다 이맘 때 쯤 이면 남한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기위해 축제 분위기에 있지만 북한에서는 다른 인물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전 날인 12월 24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첫 번 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정숙의 일생을 살펴봅니다.

김정숙은 일제 강점기인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군 오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1922년 김정숙의 가족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김정숙은 1931년 소년선봉대에 입대하고 1931년과 1932년에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37년에는 김일성이 작전 사령관으로 있던 중국의 동북항일혁명군에 가담해 김일성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41년 김일성과 결혼식을 올린 김정숙은 1942년 소련의 브야츠쿠에서 김정일과 김슈라를 낳았습니다. 또 1946년에는 훗날 김정은을 돌보게 될 김경희를 낳았습니다. 16살의 나이로 빨치산 부대에 입대한 김정숙은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사수였다고 합니다. 김정숙의 사격실력은 북한의 조선대백과 사전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1944년 조선인민혁명군 사격대회에 출전에 당당히 우승을 한 것은 물론 훗날 김일성의 경호를 담당할 정도로 뛰어난 사격솜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김정숙은 영부인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지만 그녀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1932년 일제강점기 때 김정숙의 아버지와 오빠는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되고 재산과 토지를 모두 몰수당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습니다. 김일성과 결혼한 이후 김정일과 김슈라를 낳지만 김슈라는 4살을 넘기지 못하고 김일성이 근무하던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예 마을 우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김정숙이 네 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김일성은 김성애라는 여인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고 김일성은 김정숙이 네 째 아이를 출산할 때도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정숙은 결국 1949년 9월22일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아기와 함께 사망했습니다. 김정숙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출산 중 하혈과 과로 등으로 알려졌지만 김일성의 외도로 인해 병이 심해져 죽었다는 설과 임신 중 풍을 맞고 죽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김정숙을 북한의 국모이자 항일투사로 인식하고 있다고 북한 대학교수 출신 탈북자 김현아 씨는 말합니다.

김현아: 조선의 어머니이다. 그러니까 국모이다. 김정숙은 항일투사였다. 김정숙의 첫 번째 업적은 김정일을 나아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다. 그 다음은 여성해방투사이고...

그러나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숙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자리 잡힌 것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지정된 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김정숙이 사망한 후 김일성의 사실상 부인으로 자리를 잡게 된 김성애는 김일성의 총애를 업고 중앙여성동맹위원장 자리에 올라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김현아 씨의 말입니다.

김현아
: 김성애가 여맹을 이끌었다. 김성애는 정치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가...70년 대 부터 여맹이 세지기 시작했다. 여맹은 강반석 여사를 따라 배우자는 운동도 벌였다... 여맹조직이 세지면서 여맹이 한참 떴다.

여맹의 세력을 확장시키던 김성애는 여맹 사무실에 걸려있던 김정숙의 사진을 떼도록 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걸게 하는 등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자신에게 끌어 모으려는 노력을 펼쳤습니다.

어린나이에 생모를 잃고 계모 김성애 밑에서 자라난 김정일 이었지만 자신의 친모 김정숙을 격하 시키려는 김성애의 노력이 곱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 김성애가 김정일을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성애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지금 폴란드 대사를 하는 김평일이 김성애의 아들이다. 훗 엄마와 맡 아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정된 이후 김성애를 완전히 제거했다.

자신의 계모와 이복동생들, 이른바 '곁가지'를 제거한 김정일은 자신의 친모 김정숙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김정숙 우상화 작업에 나섭니다. 서대숙 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김정일이 김일성의 계통을 김정숙과 연계해 백두산의 3대 장군이라고 내세운다. 이것은 전에 없었다. 김정일이 집권한 이후에 나온 것이다.

이후 김정일은 '항일의 여성영웅', '혁명의 어머니' 등 김정숙을 일컫는 찬양 구호를 만드는가 하면 김정숙의 이름을 딴 지역과 대학 등을 만들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대학의 전공학과에서만 가르치던 김정숙 혁명역사를 2000년부터 전 학교로 확대시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학생들이 교육 받도록 지시했습니다.

북한의 예술작품에서도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숙 그리고 김정일을 의미하는 '백두산 3대 장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영화와 연극 그리고 음악에서도 이들을 찬양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모에 대한 우상화 작업은 김정일 세대에서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숙의 우상화를 통해 자신의 세습을 정당화 하려 했던 김정일처럼 지금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도 생모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서대숙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김정일이 죽거나 활동하지 못하게 되면 고영희에 대한 업적이 많이 내세울 것이다.

김정은의 후계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면 문맹이었던 김정숙이 이제는 모든 북한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여성으로 추대 되는 것과 같이 기쁨조 출신 고영희도 언젠가는 위대한 여성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담배농사를 잘지은 청년 작업 반장 김순화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김일성 주석 화보 자료.

김일성은 본처인 김정숙이 사망하기 전 김성애라는 여인과 인연을 맺습니다. 1949년 김정숙이 사망한 뒤 김성애는 김일성과 결혼하고 북한정치의 막강한 권력자로 올라서게 됩니다. 그렇지만 김성애와 그 주변 인물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계모였던 김성애에 대해 살펴봅니다.

192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김성애는 한국전 당시 김일성의 집무실 비서로 일했습니다. 김일성은 본처 김정숙이 살아 있을 때부터 김성애와 만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김정숙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다큐멘타리 김정일'의 저자 이자 북한 전문 인터넷 뉴스인 데일리 NK의 손광주 국장은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손광주: 농민의 딸이었는데 6.25 전쟁 시기에 김일성을 도와서 비서 역할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김일성과 동거를 하게 됐다. 원래 김일성은 김정숙이라는 첫 부인이 있었고 그런 가운데 김성애와의 동거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정숙이 사망한 이후 김성애는 사실상 김일성의 아내가 되었고 1954년에는 김정일의 이복동생이 되는 김평일을 낳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는 김일성과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손광주 국장의 말입니다.

손광주: 김성애는 김일성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아들 둘을 낳는다. 첫째가 김평일이고 둘째가 김영일 이다. 딸은 김경진이라고 있다. 김성애는 아들 둘을, 김평일은 군의 리더로 김영일은 내각의 주요 인물로 키우려는 욕망이 있었다. 김성애 스스로는 1970년대에 여맹 위원장을 맡았다.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은 김성애는 그 때 부터 북한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북한 대학교수 출신 김현아 씨의 말입니다.

김현아: 김성애가 정치무대에 안 나서고 있다가 북한에서 당의 역사사상체계를 67년부터 시작된 세우던 사업이 시작되면서...

김성애는 당사업과 행정사업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었으며 중앙당 부장과 책임자들을 호령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고 이들은 김성애의 말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손광주 국장의 말입니다.

손광주: 한때는 김성애가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의 정치적 역할보다 앞서 나가는 중량감이 나가는 인물로 평가 받은 적도 있다. 그 이유는 김성애가 1970년대 여맹위원장을 맡으면서 김일성이 노동신문에 김성애 여맹위원장의 말은 나의 말과 같은 정치적 비중을 갖는다고 말해 김성애의 정치적 위상이 상당히 올라간 적이 있다.

김성애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지자 북한의 언론들은 김성애의 사진을 김일성과 똑같은 크기로 싣고, '김일성의 교시'와 '김성애 여사의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고 김일성이 한 말과 똑같이 '교시'로 표기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성애는 또 '어머니 교양실' 운동을 통해 자신의 '어록'을 뿌리고 다녔고 '김성애 여사 말씀 연구록'이라는 책까지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을 교육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김성애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70년대 무렵 김일성은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큰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장남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게 됩니다. 당시 김정일은 자신의 친모 김정숙을 격하 하려는 김성애의 노력에 앙심을 품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손광주: 김성애가 비교적 김정일에게 잘 하려고 했지만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김성애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김정일의 입장에서 김성애는 비록 계모이지만 자신의 어머니이자 김일성의 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김성애에 대한 모함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1973년 중순, 김정일은 김성애를 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됩니다.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이 김일성이 아끼던 인민대학습당 부지에 허락 없이 집을 짓고 살던 것이 김일성에게 들통 나면서 김성애의 신임은 떨어지게 됐고, 김정일은 이 기회를 틈타 김성애의 월권행위와 비리를 아버지에게 일일이 고해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장성택을 통해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들춰내게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성애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김현아 씨의 말입니다.

김현아: 김성애는 곁가지로 완전 매장됐다. 자기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 까지는 안 보냈지만 거의 사회적으로 고립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정일은 김성애 일가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써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보장받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이번 주 순서를 마칩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  

 

출처 : Intelligence Center[Night Watch]
글쓴이 : CIA bear 허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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