洗川

밀양 상남면 지명유래

감효전(甘曉典) 2014. 10. 4. 11:00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양림간(兩林間) : 예림리 동쪽 강가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옛날에 강물의 범람을 막아 전답을 보호하고자 심은 운례수 한가운데 숲과 숲 사이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림간 마을이라 했으나 지금 그 숲은 없어졌다. 

 

운하마을(울리, 運禮) : 예림 본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운례에서 파생된 이름인 듯하다. 운례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그 안 마을에 해당하는 운내와 대칭되는 지명이다.

 

운내(안골, 울례, 運內, 運谷) : 예림리에서 가장 안쪽 산 밑에 있다 하여 안골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運禮라는 옛마을을 가리킨다. 운래의 이름의 유래는 을자형으로 굽이 돌아 흘러온 응천강 물이 이 마을앞에 이르러 정체되지 않고 운세대로 직류하는 곳이라 하여 운류(運流)가 운례로 표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촌(단촌,단천,唐村,唐泉) : 예림 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여름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타고 온 말이 말발굽으로 땅을 파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그 물맛이 꿀맛같이 달았다고 하여 그 후 사람들이 단물이 나는 샘이라 하여 단샘 또는 단천이라 했으며, 단천의 마을이란 단촌,당촌으로 전와(轉訛)한 지명이라 한다. 

 

동촌(東村당, 양철마, 참나무징이) : 예림 앞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일제 시대때에 형성되었다. 곧 일본인 농장주 탕천이란 자가 계속하여 양철 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 후에도 계속하여 일본인 농부들이 즐겨 양철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자연 양철집 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철마라는 이름이 생겼고 예림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또 옛날 이 부근에는 참나무숲이 있었으므로 참나무징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대성동(大成洞) : 기산리와 예림리에 걸쳐 있는 들마을인데 일부는 기산리에 일부는 예림리에 속해 있는 신생 마을이다. 큰 성공을 기원하는 동민들의 뜻을 풍기는 지명이다.

 

기산(岐山, 箕山) : 기산(岐山)은 본래 기산(箕山)으로 표기했는데 그것은 뒤쪽의 키 모양과 같다고 해서이다. 그러나 키는 앞이 트여 벌어져서 키질을 할 때마다 곡식이 날아가므로 마을의 복과 부가 빠져나가서는 안된다 하여 키의 앞쪽에 해당하는 마을 앞을 가로 막는다는 뜻에서 기산(岐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고늬실(古老谷, 古內谷, 古魯谷) : 고실 북쪽 산 기슭에 위치하였고 고실 보다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고실의 안쪽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고내실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으나 대채적으로 고노(古 魯)또는 고노(古老)로 표기했다.

 

푹실(牛谷) : 기산리 본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는 골짜기로 이루어진 터전 이었으나 아주 오랜 옛날에 큰 비가 내려 산 사태가 지는 바람에 골짜기가 온통 메워지자 평지와 같이 되었다. 푹실이란 지명은 골짜기에 산이 푹 내려앉아 마을이 이루어졌다는데서 생긴 것이고, 우곡(牛谷)이란 표기는 큰 비로 인하여 동네가 된 골이라는 뜻이다.

 

이듬(이드미, 이담, 伊淵, 伊冬音) : 내금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촌이 다.지명을 이듬,이드미,이담이라 한 것은 옛날 이동음부곡(伊冬音部曲)에 서 파생된 것이다. 이연이란 한자 표기는 옛날 이곳에 가연이라는 못이 있어 이동음(伊冬音)과 가연(柯淵) 두 지명을 아울러 취한 듯하다.

 

내금(內今, 舊金洞 또는 今洞, 안금동) : 안쪽에 있는 금동이라 하여 내금이라 하였는데 외금과 대칭되는 지명이다. 본래 금동은 옛날에 금동 역이 있었던 곳으로 동으로 삼랑진읍까지 25리, 서쪽으로 무안면까지 35리, 남으로 하남읍까지 30리인데 사방팔방으로 역원을 둔 영남대로상의 교통요충지였다. 금동(金洞)을 지금과 같이 금동(今洞)으로 지명을 바꾼 것은 금자(金字)의 뜻이 강하고 소리가 나며 부딕힐 때 불꽃이 튄다 하여 부드럽게 완화하기 위하여 같은 음인 금자로 취한 것이라 한다.

 

외금(밖금동, 驛今洞, 外今) : 내금의 동남쪽 국도변에 있는 큰 마을이 다. 일명 역금동이라 한 것을 보면 이곳이 옛날 금동역의 역말 중심이 며 내금에 대칭되는 마을이다. 기록상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그 전성시에는 역장을 비롯한 역사, 역졸, 역노, 관비 등 종사원만도 300명이 넘었고 대, 중, 하로 구분한 역마가 수십 필이나 되어 왕래하는 관인들과 여행객으로 붐빈 도회였다고 한다.

 

평촌부락(平村部落) : 평촌이란 지명은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서북쪽 낮은 산기슭에 등을 지고 응천강의 흐름을 동남쪽으로 바라볼수 있는 배산임수의 평화스러운 마을이라 할수 있다. 동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크고 작 은 국난을 당했을 때 이 마을만은 피해를 당하지 않고 평화를 지킬수 있었다는데서 평촌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동네는 평안하고 살기가 좋아 날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났는데 1982년에는 단위마을로는 너무커 서 1구,2구,3구로 행정단위를 구분하였다.

 

대흥동(대흥동) : 평촌에서 동북쪽 응천강 가에 자리잡은 들 가운데 있 는 마을이다. 1030년 전후에 응천강 제방공사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숙 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가건물을 공사를 마친후에 개조하여 민가로 삼고 그 자리에 눌러 앉음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은 당시의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한번 크게 일으켜 보자는 결의의 뜻으로 1932년에 마을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다.

 

말미(馬山, 馬山院, 馬山驛) : 동네 안산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라 불리어 오고 있는 고촌이다. 마을 안 이곳저곳에서 지석묘와 각종 석기, 패총 유물 등 매장 문화재가 발견된 일이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주거지 임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다. 이 마을 서쪽에 이웃해 있는 무량원이란 관영 여숙(旅宿)이 이조초기에 폐쇄되어 옮겨온 후 무량원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금동역이 백족으로 옮겨지고 백족에서 다시 이 마을로 옮겨짐에 따라 마산원이 역으로 승격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곳은 역 마의 사육과 관리 등으로 말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고 영남대 로의 교통 요지로서 관인과 여행객의 출입이 빈번한 도회를 이룬 마을 이다. 그러나 역은 곧 없어지고 원도 제도의 폐지와 함께 그 자취가 사라졌다.

 

무량원(無量院) : 마산리 서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초 기 이래의 원(院)터가 남아있다. 원이란 역과 역 사이 또는 역 부근에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설치한 국영의 여숙소(旅宿所) 같 은 곳인데 원집 이라고도 하였다. 원집에는 원주를 두어 소속된 전답을 경작하여 경비충당을 했으며 인근의 승려들을 원주로 삼은 경우가 많았 다. 이 곳에도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며 무량이란 지명도 절 이름과 관 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산(배죽, 白足, 白竹, 仁山) : 중세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동국여 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운막향의 옛터라 하여 속칭 백족(白足)이라 고 표기하였다. 옛날 마산 앞에 있는 돌더미에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마시고 사라져 버린뒤에 그 발자국을 남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동산(東山) : 배죽의 남쪽 들가운데 서쪽 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다. 동산이라는 독뫼(獨山)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촌인데 어은동과 외산 리와 인접하였다. 조선 후기에 창녕조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며 창녕 성씨의 구거지 이기도 하다.외산(外山) : 외산리의 본동으로 행정구역이 다른 동산과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외산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오산들 너 머에 있는 바깥 산 마을이라는 일설과 동산 바깥에 있는 들 마을이라는 다른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산(오미, 吳山, 鰲山, 吳山) : 외산리 가장 큰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 인데 오미 또는 오산(吳山)이라 부른다. 한자상의 표기로는 원래 오산 (鰲山)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독뫼의 형상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 뒤 오산(吳山)으로 바뀐어진 것은 글자 쓰기가 너무 어려운 데다가 이 마을에 오씨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바꾸었다는 일 설이 있다. 오산(烏山)이라는 지명에 대하여는 어느때 낙동강이 범람하여 온 들판 이 물에 잠겼는데 이 마을 독뫼의 꼭대기만 물 위에 나와 있어 그 곳에 까마귀들만 남아서 까옥까옥 울었다는 설화에서 기인된 것이라 한다.

 

어은골(魚隱谷, 魚隱洞) : 큰 어은동과 작은 어은동으로 땅이 나누어져 있다. 풀숲이 우거진 마을앞 질펀한 늪속에 물고기가 숨어 살았다 하여 어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곳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보아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는 낙동강 물이 밀어닥쳐 마을 앞 숲속으로 고기가 숨이 들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조동(棗洞, 召音) : 조음리의 본동이 곧 조동인데, 서쪽 들판에 위치한 조서와 대칭되는 이름이다. 마을의 동,남,북 셋방향이 모두 산으로 둘러 싸이고 서쪽으로 하남 평야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늑한 옛 마을이 다. 밀주구지 등 옛 문헌에는 마을이름이 소음(召音)으로 되어 있는 바 이는 소자의 속음화에 따라 후일에 음이 동일한 조음으로 표기된 것이다. 

 

조서(棗西) : 조음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임 지명이다. 조동 을 조음 본동이라 한다면 조서는 조음의 서부 곧 명성과 하남읍 남전리 에 속하는 효자문껄을 아울러 지칭하는 곳이다.

 

남산리(南山里) : 북쪽으로 종남산이 서쪽으로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려 지고 동쪽에만 들판이 전개된 산중 마을이라 할수 있다. 종남산 아래쪽 에 있다고 하여 남산리가 되었는데 옛날에는 남산에 영은사와 봉수대가 있어 비교적 마을에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본래의 동명(洞名)은 구법리 혹은 구박리하고 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동, 평 리, 새마를 아울러 남산리가 되었다. 

 

평리(平里) : 남산 동남쪽의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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