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잡지 <사상계> 발행인으로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은 장준하 선생이 귀국 환영을 받고 있다. 박정희는 5·16장학회를 만들면서 ‘막사이사이상’과 같은 국제적인 규모로 만들겠다고 호언했지만 정작 장준하가 상을 받자 다시는 ‘막사이사이상’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⑬ 장준하 선생 의문사 (하)
장준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야권 제일의 박정희 저격수였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과 1967년 5월 박정희를 비판하다가 두 차례나 구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의 비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이건희와 상속분쟁을 벌이는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는 1993년 6월에 발간한 <묻어둔 이야기>에서 삼성에 일본에서 받은 리베이트를 국내로 들여올 때 물건을 사와 처분하여 더 큰 이익을 남기라고 조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고 밝혔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박정희를 “자기 사상을 갖지 못한 사상적 방랑아”라고 공격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사상논쟁을 다시 한번 불러오려는 의도였다. 구속된 장준하는 옥중에서 6월8일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자행한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에서 장준하는 무난히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인걸요”
정치인 장준하의 존재감은 그가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드러났다. 야당 세력이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열되어 있을 때 1967년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언론이 “성 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기적”이라고 비유한 야권 대통합을 이뤄낸 막후 주역이 장준하였다. 당시 야권에서는 대통령 후보감으로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이범석 4인이 거론되었는데 장준하는 4자를 한자리로 불러내 대선후보로 윤보선, 당수에 유진오의 구도로 통합야당 신민당을 창당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 협상에서 대통령 후보를 누가 할 것인가를 두고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백낙준이 4인 모두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말고 젊은 장준하를 추대하자고 제의하여 꽉 막혔던 협상의 물꼬를 텄다고 한다.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져 장준하에게는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게 되었다.
장준하의 정치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집에 세비 한번 제대로 가져간 적이 없었다. <사상계>를 경영하다 지게 된 큰 빚 때문에 세비에 차압이 걸렸고, 집에는 빚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장준하는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산파 노릇을 했던 신민당을 탈당했다. 왕사쿠라라고 불리던 유진산이 당수가 되자 윤보선 등과 함께 국민당을 결성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는 진보당 출신의 박기출을 후보로 내세웠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통합의 산파로, 최고 인기의 찬조연설자로 맹활약했던 장준하는 1971년 김대중이 후보로 나왔을 때는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장준하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손을 뗀 <사상계>도 1970년 5월호의 <오적> 사건으로 폐간되었고 선명야당을 표방한 국민당 실험도 실패로 돌아간 뒤 장준하는 출판사 사상사를 차렸다. 사상사의 첫 출판물은 장준하가 저자이자 발행자였던 <돌베개>였다. 함석헌이 ‘밤중에 우는 장사의 칼’이라 평한 이 책은 청년 장준하가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이 되어 환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돌베개>를 펴낼 무렵 장준하의 나이는 쉰넷. 아직 회고록을 펴내기에는 젊은 나이였지만 장준하는 그래도 이 작업을 통해 숨가쁘게 달려온 30년 세월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의 구심점은 원래 <사상계>였고 장준하였다. 박정희가 근대화 논리를 펴면서 <사상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자유주의적 지식인 세력은 와해되었다. 그냥 와해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서 열심히 사람을 빼갔다. 박정희의 정치적 스승이라 불리던 엄민영은 두 차례나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공화당 정권의 싱크탱크라 불린 정경연구소를 만들었다. 김상협은 군정의 문교장관으로 불려갔고, 유창순도 상공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었다. 한태연은 공화당 의원을 지내고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되기까지 했던 법철학자 황산덕은 인혁당에 대한 사법살인이 집행될 당시의 법무부 장관이었다. 그리고 동경제대 재학 중 학병에 끌려가 장준하처럼 목숨을 걸고 탈출했고 장준하와 함께 밀수 규탄대회의 단골 연사였던 신상초도 박정희 쪽으로 넘어가더니 장준하가 죽은 뒤지만 유정회의원이 됐다. 이들이 떠나간 빈자리에서 장준하는 외로웠을 것이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던 약사봉 그 등산길에 우연히 동행했다는 한 언론인이 있었다. 장준하에게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고 왜 혼자십니까?”라고 했더니 “나는 언제나 혼자인걸요”라고 쓸쓸히 답했다고 한다.
장준하(오른쪽)와 백기완은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뒤 이를 위반한 혐의로 제일 먼저 구속되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열흘 만에 서명자 40만여명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를 선포
그와 백기완을 구속시켜 버렸다 김영삼이 발을 뺀 건 충격이었다
장준하는 세상을 뜨기 20여일 전
김대중을 찾아 힘을 합치자 했다
장준하-김대중이 손을 잡는 건
박정희로선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의 벗, 함석헌-계훈제-문익환의 공통점 그렇게 다 떠난 자리에 제자리를 지킨 장준하와 그의 벗들이 재야가 되었고 진보의 울타리가 됐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배후 함석헌, 우익 학생운동 패의 주먹대장 계훈제, 주한미군 철수 반대 서명을 받고 다니던 문익환, 국군장교로 한국전쟁을 치른 리영희, 남쪽을 선택한 반공포로 김수영 등 이 땅의 진보세력에게 젖을 먹인 이들은 해방 전후 사상의 스펙트럼에서 맨 오른쪽에 서 있던 분들이었다. 양심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은 전혀 다른 기준을 갖지만, 박정희같이 기회주의적 변신을 일삼은 자가 권력을 잡은 사회에서는 양심을 지키는 것이 엄청나게 진보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가짜 민족주의에 맞서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민족주의자의 길>을 발표했다. 분단된 조국에서 참된 민족주의자의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준하가 개헌청원운동의 준비에 나선 것은 1973년 10월2일 유신 선포 후 처음으로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그 무렵이었다. 장준하는 백기완과 함께 모든 책임을 둘이서 지기로 했다. 형식은 ‘개헌청원’이라는 지극히 온건하고 체제 내적인 방식이었다. 12월24일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본부가 발족하자 국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서명을 시작했다. 서명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박정희는 12월29일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황당무계한 경거망동을 격렬히 비난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던 날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펄펄 뛴 것을 제외하고는 집권 18년 동안 박정희가 쓴 가장 격한 언사였다. 그리고 열흘 뒤인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었다. 유신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사법원에서 징역 15년에 처할 수 있는 황당한 악법이었다. 장준하와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제일 먼저 구속되었다. 박정희가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서명운동이 시작된 지 10여일 만에 서명자 수가 40만을 돌파한데다 이 운동을 장준하가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떨쳐버릴 수 없는 악연이었다. 박정희는 김지태를 상대로 인질강도극을 벌여 뜯어낸 몸값으로 5·16장학회를 만들면서 ‘막사이사이상과 같은 국제적인 규모’로 만들겠다고 호언했지만, 정작 두 달 뒤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자 다시는 막사이사이상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장준하가 풀려난 것은 구속 10개월20일 만인 12월3일 밤이었다.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거동도 힘들어지자 형집행정지로 풀어준 것이다.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친지들이 입원비에 쓰라고 보태준 돈을 쪼개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실었다. 신문에는 1975년 1월10일자에 실렸지만, 서한의 날짜는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선포한 지 1년이 되는 1월8일이었다. 장준하는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같이” 버린 사실을 꾸짖으며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 귀하,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 갔습니다. 그중에 가장이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어찌 되겠는가라는 걱정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계속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박정희의 독선과 아집을 정조준한 것이다. 장준하가 몸을 추스르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국민투표 놀음을 통해 유신체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고, 구속자들이 석방되었다가 또 잡혀갔다. 동아일보 회사 쪽은 독재정권에 무릎을 꿇었고 언론자유를 외치던 기자들은 거리로 쫓겨났다.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법살인을 당했고 서울대생 김상진이 독재에 항거하며 할복자살했다. 그리고 공산군의 탱크가 사이공(호찌민)에 입성했다. 당시 용어로 월남이 ‘패망’한 것이다. 채명신도 “그분이 출마하면 맨발로 뛰며…” ‘월남 패망’ 3주 뒤인 1975년 5월21일 박정희의 제안으로 열린 여야 영수회담 이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반유신투쟁 대열에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장준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2월21일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회복 노력의 단일화와 개헌의견 통합을 주장해왔던 터였다. 신민당은 진산파와 반진산파가 갈라져 싸우다가 속수무책으로 유신이라는 날치기를 당했다. 반진산파가 갈라져 나와 민주통일당을 만들었고 장준하도 여기에 가세했지만, 민주통일당은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겨우 3석을 차지해 명맥만 유지했다. 하나로 힘을 합쳐도 시원찮을 판에 김영삼의 신민당 따로, 양일동의 통일당 따로, 윤보선 따로, 김대중 따로 그리고 재야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1971년의 분열에 전혀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는 장준하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민주세력의 단일화에 나섰다. 그가 음지에서 움직인 덕에 3월31일 마침내 윤보선, 김대중, 김영삼, 양일동이 모여 개헌투쟁 대열의 통합과 재야 수권태세의 확립을 위한 4자회담을 열고 야당 통합의 대원칙에 합의했다. 중앙정보부는 다음날인 4월1일 김대중, 장준하 등을 포섭하려 했다는 김달남, 유정식 등 재일동포 간첩사건을 발표하여 야권통합 분위기에 빨간 칠을 하려 했다. 유신정권의 이런 장난에도 불구하고 통일당은 5월7일 전당대회를 열고 야당통합에 대한 권한을 양일동 당수에게 위임하기로 결의했다. 장준하가 나서서 간신히 만들어 놓은 야권통합의 토대는 박정희가 나서서 김영삼을 빼감으로써 무너졌다. 여야 영수회담 이후 김영삼이 반유신투쟁에서 발을 뺀 것을 두고 박정희와 모종의 밀약을 맺었다는 무성한 소문을 낳았지만, 김영삼은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장준하는 세상을 뜨기 20여일 전인 7월 말 김대중을 찾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당에 몸담고 있던 장준하는 김대중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이제 장준하가 준연금상태에 있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장준하는 광주로 홍남순 변호사를, 원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다니며 김영삼과 신민당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 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박정희로서는 영 꺼림칙한 일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헌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윤보선이나 김대중 같은 정적이나 정치적 위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와 얼치기 광복군 출신으로 두 차례나 국헌을 짓밟았던 박정희에게, 진짜 광복군 출신이자 진짜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가요 ‘애모’가 나오기 훨씬 전의 일이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가 딱 장준하 앞에 선 박정희의 처지였다. 장준하가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두고 숱한 추측이 난무했다. 혹자는 야당의원이었지만 군에서 깊은 존경을 받았던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같은 이는 “그런 분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맨발로 뛰어다니며 운동하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했다- 장준하가 군사쿠데타를 도모했다고 믿기도 하고, 혹자는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와의 각별한 인연에 무게를 두기도 하고, 혹자는 장준하가 광범위한 민중봉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고 믿지만, 2기 의문사위원회는 이런 거사설을 증거가 부족하다며 채택하지 않았다. 그의 사인 역시 진상규명 불능으로 나왔다. 4·19 묘지 앞에서 장준하는 “지금의 우리를 대신해서 이 민족이 당했던 그 무서운 시련을 죽음으로 감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 가슴속에 그들이 살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면 어찌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준하처럼 살고 장준하처럼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유족들은 사글세방을 전전한다는데 우리 마음 한구석에라도 장준하가 살 자리를 비워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장준하는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당한 젊은이들에게, 삭막해질 대로 삭막해진 분단한국의 사상계에 <사상계>를 통해 영혼의 자양분을 대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정작 다섯이나 되는 제 새끼들은 대학교육 시키지 못한 못난 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