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오 히로부미가 절명의 순간에 흘린 핏자국
- 안중근의사의 하르빈 의거 100년의 흔적을 찾아서
- 이토 절명당시 입던 옷 , 대량 출혈의 흔적
이토 히로부미의 핏자국, 절명당시 이토가 입고 있던 셔츠이다.
1. 들어가는 말
이토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곳은 도쿄의 식당이었다. 그날 나는 일본 공산당의 카사이 의원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얼마전 중의원 선거에 재선된 카사이 의원의 당선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민주당 출범과 더불어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환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또 최근에 내가 출판한 ‘조선을 죽이다 : 명성황후 기록과 역사의 진실’이라는 책을 카사이 의원에게 전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책의 출판은 안중근 하르빈 의거 100년을 기념하는 남북불교계의 공동작업으로 계획된 것이었으므로, 화제는 자연스레 이토오 히로부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조선을 죽이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8012539
거기서 나는 이토오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萩)시에서 ‘이토오 히로부미와 그의 시대’라는 이토오 사망 10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토오의 흔적을 찾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토오의 흔적을 찾아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신칸센으로 9시간을 타고 내린 신 야마구치역 거기서 버스를 타고 2시간이나 더 가서야 이토오의 고향 ‘하기시’에 닿을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100년전 하르빈의 영웅 안중근의 흔적과 만났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 하기시의 풍경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설명 : 그는 일본 초대 총리를 지냈으며, 일본 헌법을 제정해서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고 적혀 있다. (사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
2. 100년전의 하르빈 역을 생각한다
1909년 10월 26일. 첫추위가 불어닥친 하르빈의 플렛포옴을 떠올려 본다. 러시아 군인들의 호위속에 기차에서는 이토오가 내렸고, 의장대는 환영대오를 사열하고 팡파레를 울린다. 순간 천지를 뒤 흔드는 7방의 총성. 잇딸아 쓰러지는 4명의 일본 귀빈들. 잠시의 얼음처럼 흐르는 정적을 뚫고 조선청년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 코리아 우라(대한독립만세) ”
안중근. 그는 일본의 심장-이토오를 향해 7발의 총알을 쏘아 조선의 기개를 떨쳤다. 그리고 정확히 100년이 지난 지금. 그날 조선 민족의 분노에 가슴을 관통, 절명했던 이토. 그가 흘렸던 핏자국을 발견했다. 아아 !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3. 이토오 저격의 순간
하르빈 역에 내린 이토오 히로부미. (모자를 벗고 있는 사람) 사망 직전 촬영된 사진
플랫홈에서 오래동안 서서 기다리던 러시아 대장대신 꼬꼬프체프가 차 내로 올라갔다.서로 인사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토는 그와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이어 귀빈들은 러시아관리들이 호위하여 동북쪽으로부터 서남방향으로 플랫홈을 따라 러시아 군악대, 러시아병대, 각국 영사단,중국 병대, 일본 관민들 이런 순서로 의장대와 환영대오를 사열하고 서남쪽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되돌아 걸어오고 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7방의 총소리, 첫 세방의 총탄이 모두 이토에게 명중됐다. 저격당한 이토는 집중탄을 받은듯 꼬꼬프체프쪽으로 쓰러졌다.
이때 안중근의 머리속을 스치는 생각. 이토의 모습을 모르는데 만일 잘못 쏘았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것이다.다시 그 뒤쪽을 향해서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일본인을 목표하고 4발을 발사했다.
이토의 왼쪽에 섰던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총영사 가와카미토시히코가 오른 팔 골절 관통상을 입었다이토의 오른쪽에 섰던 일본 궁내대신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야스지로가 왼쪽 허리를 관통하여 복부 피하에 철알이 박혔다. 국내대신 모리의 곁에 섰던 남만철도주식회사 리사 타나카세이지로가 왼쪽 다리 관절이 관통되었다. 남만철도주식회사 총재 나카무라 제코의 외투를 뚫고 철알이 오른편 바지에 밝혔다.
安重根(안중근)이 伊藤博文(이등박문)을 겨냥하여 쏜 탄환은 3발이다. 그 1탄은 오른쪽 팔 윗부분을 관통하여 갈비뼈 사이를 뚫고 왼쪽 肺(폐)에 다다랐다.
제 2탄은 오른쪽 팔 관절로부터 갈비뼈 사이에 들어가 胸腹部(흉복부)를 관통하여 왼쪽 갈비뼈 아래에 있었고 제 3탄은 오른쪽 갈비뼈 옆으로부터 복부에 들어가 左直腹筋(좌직복근)속에 달하고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쏜 총알 . 현재 일본 국회헌정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4. 안중근의 하르빈 의거
안중근의 저격은 이른바 조선 백성의 울분과 통한을 실어 쏘아 보낸 사건이다. 이것은 국모를 살해하고, 임금을 윽박질러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한 ‘민족의 원수(怨讐)’에게 향한 조선의 일갈(一喝)이다. 이 셔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서늘히 씻어내리게 한다. 피로써 피를 씻어내린 ‘한일간의 무한한 업보’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왈칵 말로 써내려가기 힘든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울컥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게 뭔지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
이토 히로부미의 핏자국. 의사가 응급치료를 위해 옷을 잘라낸 흔적이 남아 있다. 다량의 혈흔은 절명의 순간을 증언한다. 자세히 보면 총탄이 관통한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셔츠에 대해 당시 이토오의 수행원인 무로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토오는 총에 맞은 뒤, 응급치료를 받았고, 브랜디를 두잔 마셨다. 한국인이 가해자란 발을 듣고 ‘빠가야로(바보같은 녀석)’ 라고 읖조리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저격후 30분이 지난 후 였다.
나는 이 셔츠를 본 뒤 이말이 거짓말이란 생각을 했다. 3방의 총알이 흉부와 복부에 박히고, 이 정도 다량의 출혈을 했다면 브랜디를 두잔이나 들이키고, 말할 여력이 남아 있었을리 없다. 아마 이토는 그 자리에서 즉사 했을 것이다. 브랜디를 마시며 ‘빠가야로’라고 읊조렸다는 말은 이토오의 영웅스러움,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비하를 위해 후대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에 불과 할 것이다. 그들은 또 다시 그렇게 사실을 왜곡, 이토의 영웅스러움을 치장해내는 수선떨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5.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가 ?
다시 안중근을 생각한다. 안중근은 왜 이토오를 저격했는가에 대한 10가지 이유중 첫번째로 ‘우리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죄’를 들었다. 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사건의 죄과를 이토오에게 물은 것이다.
바로 그 명성황후의 시해와 관련된 기록들. 시신이 불태워져 향원정에 한줌의 재로 뿌려진 뒤, 시신이 없어서 2년 2개월동안 치루어 진 세상에서 가장 슬픈 국장의 기록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의 기증으로 일본 천황궁 황실도서관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표지에 원 소장처를 표시한 오대산이란 글자가 눈에 띄인다.
이 슬픈 역사의 기록이 천황궁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발걸음을 일본으로 기울이게 하는 인연으로 작용해왔다. (나는 지난 3년간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의 반환운동을 진행해 왔다)
이것은 2006년 8월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로 이끌어 명성황후를 살해한 자객의 칼 ‘히젠도’를 만나게 하더니, 이제 나를 도쿄 헌정기념관으로
이 세가지가 의미하는 피비린내는 안중근의 서거 100년을 맞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안중근이 도폭탄을 도시락 폭탄을 던졌는지 권총을 쏘았는지가 혼돈스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보면서 역사를 향해 뚜벅뿌벅 걸어갔던 많은 선각자들에게 자꾸만 죄송스럽기만 하다.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된 히젠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로 알려져 있다. 칼집에 단칼에 늙은 여우를 베었다 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제공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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