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3] 누가 살려줬나
출처 : '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
김창룡이 '구명'제안, 백선엽이 결심 - 오마이뉴스-정운현
육사 8기생 졸업식(1949.5.23)이 있기 일주일 전 쯤인 5월 중순경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 전투정보과 사무실로 불쑥 들어섰다. 당시 전투정보과 과장은 유양수(육군 소장 예편, 현 박정희기념사업회장) 대위였다. 이 자리는 원래 소령 T/O였으나 워낙 인원이 없어 유 대위가 과장 대리격으로 있었다. 백 국장은 유 대위를 향해 반가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임자, 채병덕 (3군)참모총장의 특별지시로 전투정보과를 보강하기로 했네. 이번에 졸업하는 8기생 가운데 임자 마음대로 필요한 인원만큼 선발해서 쓰시오. 참, 가는 길에 계인수(정보국 첩보과장) 중령이랑 같이 가지..." 백 국장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유 대위는 즉각 교무처로 달려가 8기생 졸업생 명부를 구했다. 그리고는 1등부터 30등까지 30명 전원 개인면접을 거친 후 최종 15명을 선발했다. 당시 1등 졸업생은 엄용승이었다. 유 대위는 이들을 전원 전투정보과에 배치시키고는 추가로 15명을 선발, 타 과에도 배치시켰다. 이들은 배치전 2주간 청량리 정보학교에서 기본교육을 받았는데 그 인연으로 '청정회'라는 친목단체를 꾸렸다. 육본 정보국의 '무급 비공식 문관'
"임자, 박(정희) 소령 알지?" "아다마다요, 사관학교 때 우리 중대장을 하셨는데요!" "어때, 지금 그 사람 놀고 있는데 같이 일하면 안되겠나?" "좋습니다. 보내주세요. 과거에 모신 적도 있습니다. "알았네, 나도 도울테니 같이 잘 지내게" 형집행정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한동안 민간인 신분으로 지내다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도움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지냈다. 당시 신분이 민간인 비공식 문관이어서 그에겐 급료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백 국장의 기밀비 일부를 떼고 씨레이션을 팔아 그의 급료를 마련했다. 이 때 박정희는 풀이 죽어 지냈다. 숙군 당시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케이스는 박정희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과연 어떤 사정으로, 누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을까? 박정희가 김창룡팀에 의해 처음 끌려간 곳은 서울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 인근 서울헌병대였다. 당시 헌병대 건물은 콘센트 막사였다. 그는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냈다. 박정희와 육사 2기 동기생인 김안일(육군 준장 예편) 정보국 특무과장은 이 무렵 박정희를 불러 직접 신문한 적이 있다. 김 과장은 박정희에게 양면괘지 한 묶음을 건네며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써내려 갔는데 그 속에서 좌익세포들의 명단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수사팀은 이 명단을 토대로 마치 '고구마 캐듯' 세포들을 색출해 냈다. 김창룡 등 수사팀은 '박정희 리스트'의 위력에 혀을 내둘렀다. 수사실무팀에서 나온 '박정희 구명운동'
"...숙군 5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49년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이 나에게 '박정희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 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봐줄 것을 요청했다. 김 소령은 나의 승락이 있자 곧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내가 박 소령을 면담한 곳은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 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구명운동은 그를 체포하고 수사한 수사팀에서부터 출발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수사실무자인 김창룡과 김안일 과장이 박정희에 대한 신원보증서 겸 구명사유서를 만들어 백 국장을 찾아가서 결재를 받아낸 것이 사실상 구명운동의 시작이었다. 수사팀에서 그를 살리기로 결정이 내려지자 이후 일정은 수사팀 몫이 돼버렸다. 백 국장은 미 군사고문단에 양해를 구하고 또 육본에 재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구명운동은 이밖에도 다양한 채널에서 진행됐다. 만주인맥이 큰 힘이 됐다. 만주 군관학교 교의(校醫, 중좌)를 지냈고, 박정희가 첫 부임한 춘천 8연대 시절 연대장을 지낸 원용덕이 백선엽 국장을 움직였다. 백선엽이 평양사범 졸업 후 의무복무 도중 군관학교에 입학해 말썽이 됐을 때 원용덕이 나서서 도움을 줬는데 이 일을 두고 백선엽은 늘 고마워했었다. 백선엽 역시 만주인맥의 일원(봉천군관학교 9기)이다. 같은 만주인맥의 일원이자 여순가담자 토벌에 참여했던 고 송석하씨(봉천 5기, 육사 2기, 육군소장 예편, 99년 작고)는 "여순사건 때 박정희가 남원까지 온 것으로 안다. 그 때 최남근과 박정희가 안보이길래 우리는 지리산부대(김지회 부대)에 잡혀간 줄 알았다"며 "그 때 원용덕이 박정희를 붙잡아 '살려면 남로당 조직표 내놔라'라고 설득해서 서약받은 후 백선엽에게 구명요청을 했다"고 지난 97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 재판 때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씨는 당시 주변사람들의 구명 노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백선엽 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백 국장은 '박정희가 (좌익활동 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고 피해 없으면 목숨만 살려줄 수 없느냐'며 박정희를 살리는데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지리산'에도 관계하고 해서 일단 잡아 넣은 상태였죠." 김씨는 "백 국장 이외에도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았던 송요찬 장군과 김형일 장군 등도 그의 구명을 요청해 왔다"고 밝히면서 "당시 박정희는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난 것이 없었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데다 머리좋은 수재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회고했다. 숙군 관련 전권을 쥐고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
군내 선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이후 장군으로 진급도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좌익 악령'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사상시비가 단골메뉴로 불거졌으며, 몇몇 좌익사범 사건 때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미국의 감시였다. 미국은 '전향자'인 그의 사상전력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못한 채 집권 기간 내내 그를 감시했다. 박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은 여기서 한 자락이 연원한 측면도 없지 않다. 숙군 회오리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장군으로 승진하고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감시 눈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5.16 직전부터 '거사설'이 나돈 뒤부터 미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장(1957), 연합참모본부장(1959)으로 있던 김점곤 원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5.16 직전 미8군 댄스톤 정보국장이 매그루더 사령관의 친필 메시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20명의 명단이 적힌 한국군 장교들의 명단을 한 명씩 보여주면서 그들의 좌익관련 여부를 묻더군요. 명단 속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의 좌익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장군도 물론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박 장군에 대해 묻길래 나는 '과거 형님의 죽음 관계로 공산당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별을 두 개나 단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공산당으로 갈 것로 보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그와 동행한 여비서가 우리들의 대화내용을 모두 녹음하더군요." '전향자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감시와 의혹의 시선
"민주당 시절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 장군의 중용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장 총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매그루더 사령관과 논의했는데 얼마 후 매그루더가 육본으로 박 장군의 신원조회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형일 참모차장이 '박정희는 레프트(좌익)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매그루더 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당시 박 장군은 육본 작전참모부장이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습니다."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고 말았는데 5.16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 자리에서 예편했다. 그 뒤 2년간 미국 유학후 귀국, 야당으로 투신한 그는 6대 국회 때 정부전복 음모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9대까지 내리 4선을 하면서 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지낸 그는 78년 55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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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호모사피엔스
글쓴이 : 저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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