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시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신광수가 지은 시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광수 본인이 늦은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데 그 때 제시한 시가 바로 登岳陽樓嘆關山戎馬이다. 시의 내용은 마치 두보의 시 등악양루를 풀어 설명하는 것 같다. 두보의 시를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기에 두보나 이백의 시처럼 대칭 되는 시의 구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쓸쓸함과 슬픔이 넘쳐 난다.
어찌했던 우리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쓸쓸함을 느낀다. 이는 또한 서도소리의 특징이기도 하다. 서도소리 하면 우리는 愁心歌와 엮음수심가를 떠올린다. 동시에 배뱅이굿도 생각나고 또 회심곡이나 산염불 같은 곡조도 기억한다. 쓸쓸하고 슬픈 곡조들이 대부분이다. 崔南善은 일찍이 "서도소리는 촉박하고 哀楚傷心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이런 효과는 창법에도 기인한다. 서도소리는 목소리를 많이 떤다. 그냥 서양음악에서의 트레몰로처럼 음을 나누어 나란히 줄을 세워 떨리는 효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음 하나가 무한하게 떨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떨림 소리를 들으면 마치 내 가슴이 파르르 떠는 것 같고 동시에 살이 저며드는 듯한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목청을 높게 뽑으며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하강을 한다. 소리가 하강하며 이루어지는 효과는 감정의 전환인 동시에 무엇인가 낮은 소리로 비애를 느끼게 한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첫 악장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급히 그리고 길게 하강하는데 그 때 느껴지는 감정은 아주 절묘하다. 서도소리는 이런 노래 기법으로 충만하다. 애잔하고 쓸쓸하고 슬프고 한없이 처량한 노랫가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월하는 타고난 가인이다. 그녀가 갖고 있는 타고난 목소리와 재능은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가을 날 우리는 김월하가 부르는 관산융마를 들으며 한없이 빠져들 만큼 쓸쓸한 슬픔을 맛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관산융마의 첫 번째 아름다움인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淸凉함과 고요함 그리고 '비어있음'이다. 슬픔과 쓸쓸함이 넘쳐나면 우리는 병이 생긴다. 가을 날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제 괜스레 쓸쓸해지고 그 정도가 깊어지면 눈물을 흘린다. 지나치면 감상에 젖어들게 되고 그것이 고이면 독이 된다. 이렇게 되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관산융마를 들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회심곡을 듣거나 슬픈 배뱅이굿을 찾아야 할 터. 孔子께서도 일찍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哀而不傷'이라고.(論語 八佾 -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슬퍼도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다. 관산융마가 뛰어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슬프지만 비통하도록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다. 겨울날 맑은 호수처럼 깊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하다. 관산융마라는 노래는 이미 이렇도록 맑은 슬픔을 높은 예술의 경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청승맞기도 하고 구성지기도 한 서도가락이 어찌해서 이런 높은 미적 경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선 원작이 되는 詩의 배경이 좋다. 신광수가 지은 노래가사도 그저 보통 수준의 작품은 되지만 실은 무엇보다 신광수가 이러한 시를 짓게 된 그 배경과 연유가 좋다. 두보의 등악양루를 읽으면 짧은 절구인데도 우리는 절절하게 감동을 느끼게 된다. 신광수가 지은 모두 36구나 되는 시문과 비교가 안 된다. 앞서 인용한 이태백의 시는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그들이 읊고자 하는 동정호와 그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이요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시를 짓고 있는 이들의 처지와 심경이 무척이나 불우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意外之韻으로 감지되는 것은 이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시들을 읊을 수 있게 만든 그들의 심리적 또는 정신적 자세다.
두보는 악양루를 지을 때 굶주림에 허덕일 정도로 비참한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찌 이런 절창을 노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동양문화에서 내려오는 예술정신을 잠깐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미학자 徐復觀은 '중국의 예술정신' 제2장 '莊子의 재발견'에서 '장자'의 제13편 '天道'를 먼저 인용한다.
聖人之靜也,非曰靜也善,故靜也. 萬物無足以撓心者,故靜也. 水靜則明燭鬚眉,平中准,大匠取法焉. 水靜猶明,而 精神! 聖人之心靜乎! 天地之鑒也,萬物之鏡也. 夫虛靜恬淡寂漠無爲者,天地之平而道德之至也. 故帝王聖人休焉. 休則虛,虛則實,實則倫矣. 虛則靜,靜則動,動則得矣. 靜則無爲,無爲也,則任事者責矣. 無爲則兪兪. 兪兪者,憂患不能處,年壽長矣. 夫虛靜恬淡寂漠無爲者,萬物之本也 王天子之德也;以此處下, 玄聖素王之道也. 以此退居而閑游,江海山林之士服;以此進爲而撫世,則功大名顯而天下一也. 靜而聖,動而王,無爲也而尊,樸素而天下莫能與之爭美. 夫明白于天地之德者,此之謂大本大宗,與天和者也. 所以均調天下,與人和者也. 與人和者,謂之人樂;與天和者,謂之天樂
(*서복관은 본문을 짧게 인용하였으나 여기서 모두 살려 길게 옮긴다)
- 성인이 고요하다함은 고요함이 좋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해서 고요함이다. 만물은 어지럽혀진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니 해서 고요함이다. 물이 고요하므로 맑으니 수염과 눈썹을 밝히고 평평하기는 자와 같아서 이름난 목수라 해도 그 법을 취한다. 물이 고요하면서도 맑으니 하물며 마음과 마음의 움직임에서랴. 성인의 마음은 고요하도다. 하늘과 땅의 거울이요 만물의 거울이로다. 무릇 비어있음, 고요함, 편안함, 담담함, 조용함, 쓸쓸함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하늘과 땅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도와 덕이 이르게 되는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왕이나 성인은 쉬는 것이다. 쉼은 비어있음이요, 비어있음은 여뭄이 있고 여물면 도리가 있음이다. 비어있음은 고요함이요, 고요함은 움직임이며 움직이게 되면 얻음이 있다. 고요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며 각기 일을 맡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즐겁고 즐거우면 근심이나 걱정이 머물 수가 없고 삶이 길어지게 된다. 무릇 비어있음, 고요함, 편안함, 담담함, 조용함, 쓸쓸함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만물의 근본이요 왕이나 천자의 덕이다. 이것에 머물면 현묘한 성인이나, 왕위에 오르지 않고도 왕 노릇을 한 왕들의 도가 된다. 이것으로 물러나 살며 한가롭게 노닐면 강과 바다와 산림 속에서 사는 선비들이 따를 것이다. 이것으로 나아가 세상을 다스리면 공과 큰 이름을 날려 천하가 하나가 될 것이다. 고요하면 성인이 되고 움직이면 왕이 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존경을 받고 소박하면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다투지 않을 것이다. 무릇 하늘과 땅의 덕이 밝고 분명하게 드러난 것 바로 그것을 일러 커다란 근본이요 커다란 뿌리라 하는 것이며 또한 하늘과 화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하를 골고루 조절하고 사람들과 화합하게 된다. 사람들과 화합하는 것을 일컬어 人樂이라 하고 하늘과 화합하는 것을 일컬어 天樂이라 한다.*
서복관은 설명한다. "성인이 고요하다함은 고요함이 좋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해서 고요함이다. 만물은 어지럽혀진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니 해서 고요함이다."라는 설명은 결코 '고요함'을 하나의 이념으로 추구해서는 안 되며 결국 만물에서 비롯되는 옳고 그름과 좋고 싫어함을 벗어날 때 곧 절로 그러함이 자연스러움이요 바로 '고요함'의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담고 있는 의미로 말한다면 동시에 즉 이는 '비어있는' 상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老子의 '致虛極, 守靜篤'으로부터 시작 발전하여 장자의 '無己, 喪我, 心齋, 坐忘'에 이르기까지 이는 비어있음과 고요함을 인생의 본질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으며 동시에 이것으로 인생의 본질을 삼고 있다. 아울러 우주만물이 모두 함께 이러한 하나의 본질이며 그런 까닭으로 커다란 본질과 커다란 뿌리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기의 본질을 파악할 때에는 동시에 우주 만물의 본질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때 우주만물과 일체가 되며 이런 까닭으로 곧 '天地與我 生, 而萬物與我爲一'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니 이로써 만물은 나와 하나가 된다.- 齊物論) (서복관 저, 中國藝術精神, 華東大學出版社, 2001, 49쪽)
서복관은 중국의 예술정신이라 지칭하였지만 실은 이러한 정신은 동아시아 문화전반에 걸쳐 공통된 사항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인 三國遺事에서도 이러한 정신적 자취를 간간이 발견할 수 있다. 圓光法師를 '性好虛靜, 含笑 성품이 비어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항시 미소를 머금었다' 라 하였고, 무장사 절터를 설명하며 '自生虛白, 乃息心樂道之靈境也 저절로 텅 비어 있고 깨끗하니 마음을 쉬게 하고 도를 즐길 수 있는 신령스러운 곳'이라 하였다. 또 신라의 승려 惠現은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험준한 산에 살면서 일생을 오로지 '現靜坐求忘 고요하게 앉아 잊음을 찾다'가 세상을 떠났다. 一然(1206-1289)이 승려지만 중국의 도가서적들을 보았을 확률은 높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미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정신들은 보편화되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유가와 불가 그리고 도가를 굳이 나누어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정신세계들은 당시 상당히 혼재되어 지식계급들에 침투해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공통점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다양한 정신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문화 전통은 면면히 흘러 신광수가 시를 짓고 있는 18세기에도 하나의 뚜렷한 현상으로 살아서 사대부 계급에 각인 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를 짓는 순간에 사람들은 조용하다. 무슨 생각인지 골똘하지만 이미 마음에 충분히 삭혀져 있었던 것이라 그리 괘념할 이유도 없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경관을 보고 마음이 자극을 받아 움직인다. 하지만 그 경관의 모든 대상물들은 동정호처럼 광대하고 무변하다. 또 비어있는 듯 멈추어 있는 듯 그리고 아무런 작용도 없는 듯 절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냥 그렇게 눈앞에 있다. 시인의 마음도 순간 '비어있음, 고요함, 편안함, 담담함, 조용함, 쓸쓸함'의 경계로 건너간다. 경계에 도달하며 동시에 마음의 움직임이 발생하는 것이다(神).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은 밝고 활발해진다(神明). 그러면서 실타래 풀리듯 시구들이 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詩唱 관산융마는 이러한 미적 경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가지 유의하여야 할 사항은 관산융마가 지니는 이러한 경계는 시에서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가 불리는 가락에 의해 성숙해지고 발전되어 궁극적 미의 경계에 도달하고 또 완성되는 것이다. 신광수의 시가 지니고 있는 미숙하고 모자란 점을 음악이 보완하여 아름다움의 극치에 달하게 한 것이다. 백성들이 즐겨 부르는 노랫가락은 긴긴 세월을 흘러가며,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마치 시냇물이 바위와 모래바닥 밑으로 숨어 흐르다가 다시 나타나서 줄기차게 흐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형성된다. 이러한 가락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다듬어진 미적 의식이 덧붙여지면 여기에서 격조 높은 예술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산융마는 바로 서도소리를 바탕으로 하여 앞서 이야기한 예술정신이 접합되어 탄생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미적 경계가 주는 아름다움은 바로 淸凉함과 고요함 그리고 비어있음인 것이다.
또 한가지 관산융마가 주는 느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바로 반주 악기다. 반주는 보통 단소나 대금으로 하는데 바로 이 악기들은 우리 음악에서 가장 淸한 소리를 내는 것들이다. 여기서 淸이라 함은 무엇보다 맑다는 뜻과 함께 높은 소리라는 의미이다. 맑고 청아하게 높게 울려 퍼지는 단소와 대금소리는 정말 신선이 부르는 것 같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도입부로 나오는 단소소리는 이미 노래의 곡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고도 남는다. '청성잦은한잎'은 단소나 대금 독주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곡인데 그 청아함과 적막함 그리고 허허로울 정도로 높은 품격은 하늘에서 버림을 받고 인간세계로 내려온 선인이 부는 소리 같다.
세 번째의 아름다움은 '淳朴不巧'다. 음 하나하나는 깊이가 우주 같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다. 그리고 반복이 된다. 노래의 바탕이 되는 서도소리 또한 복잡함이란 없다. 화려하거나 현란한 면도 전혀 없다. 정교한 배치를 통한 구성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역시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오대산 문수사의 석탑을 설명하며 이런 말이 나온다.
'庭畔石塔, 盖新羅人所立也. 制作雖淳朴不巧, 然甚有靈響, 不可勝記
- 뜰 가에 석탑이 있는데 아마도 신라사람이 세운 것이다.
만든 것이 비록 순박하고 정교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신령스런 울림이 있어 이를 다 기록할 수 없다.' 순박불교는 우리 문화의 정수이다. 淳은 순박하다라는 의미인 동시에 인정이 도타운 것을 말한다. '淳化通於自然'이라는 말이 있는데 순박하고 인정이 많음은 자연에 통하는 것이다. 동시에 깨끗하고 맑다는 뜻도 있다. 순수한 것이다. 朴은 실제로 樸이 전용되어 쓰이는 글자다. 樸은 문자 그대로 통나무를 말한다. 그리고 樸은 道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또 하나의 모습이다. 巧는 기교 또는 기술이나 솜씨를 뜻하며 꾸밈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자연스럽지가 못한 것이다. 巧는 필요한 것이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그 효용을 잃는다. 정말 훌륭할 정도로 뛰어난 기교는 겉으로 요란스럽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통일신라를 정점으로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리의 예술은 쇠퇴하였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아니하다. 기교가 없어 정치하게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순박불교의 미감이 솟아났을 뿐인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 들어서도 면면하게 이어진 우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조선전기에 고도로 발달된 분청사기의 예술경계는 바로 순박불교인 것이다. 각 지방에 널리 흩어져 있는 절벽에 새긴 마애불상들이나 심지어 제주 지방 전래의 돌하루방 같은 것들은 모두 순박불교의 또 다른 사례들인 것이다.
이러한 미적 정신은 우리 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이 역시 동아시아가 공유한 문화전통이다. 중국 仰昭문화에서 발굴된 무수한 陶器에서 우리는 이미 이러한 순박성의 아름다움을 읽는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장자의 천도편에도 '樸素而天下莫能與之爭美'라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정신은 더 거슬러 올라가 노자에 이른다. 제15장에서 '道는 미묘하고 현통하고 또 깊어 알 수가 없지만 굳이 이야기한다면----敦兮其若樸(돈독하기가 통나무와 같다)---.'라 했다. 또 제32장에서 '道常無名樸'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제45장에서는 '大成若缺,---大巧若拙, 大辯若訥'이라 했다. 그리고 莊子를 읽어보면 巧에 얽힌 일화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아름다움은 자유다. 무엇인가 구속을 당하여 이를 벗어나고자 싸움을 통하여 쟁취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자유라고 하면 서양식으로 으레 투쟁을 연상하는데 이는 근대에 들어서 급조된 자유라는 단어 때문이다. 자유는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자유롭다. 정해진 것이 없다. 서양에서 신은 자연과 우주를 창조하고 앞으로의 일을 정해 놓았지만 동아시아의 세계에서 자연은 태초부터 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아무런 구속이나 정해진 틀이 없다. 자연은 태초부터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쓸데없이 스스로 수많은 굴레를 만들어 자기는 물론 타인에게도 강요한다. 슬픈 일이다.
동아시아에서 예술이 가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런 자연은 물론 구속된 것이 없이 허허롭고 자유롭다. 예술의 내용이 그래야 한다면 형식 또한 상응하여야 할 것이다. 관산융마는 그런 까닭에 아무런 정해진 양식이 없다. 가곡이 지녀야 하는 장단도 없다. 그저 나오는 목소리를 따라 부르기만 하면 된다. 제멋대로 부를 수 있지만 그래도 누가 어떻게 불렀더니 제일 좋더라 해서 그냥 따라 부를 뿐이지 누구라도 자기 식으로 고쳐 부르면 그만이다.
각 절 첫구 즉 추강, 매화, 오만, 춘화 등은 마치 커다란 한숨을 내지르듯이 시작한다. 구슬픈 단소소리를 기다리다가 그만 참지 못한 듯 한숨을 터뜨리며 시작한다. 그리고 땅이 꺼지듯 긴 한숨은 소리가 잦아지며 밑으로 하강한다. 한숨을 내쉰다함은 탄식이기도 하지만 실은 체념이요 버림이다. 떠나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서 벗어나 멀리 지나가는 것이다. 그 첫머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한숨인 것이다.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고 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자연 밖에 없다.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관산융마를 들으며 허허로울 정도로 텅 빈 그리고 아무 것도 우리를 붙잡지 않는 그런 자유의 미감을 얻게 된다.
어찌 했던 우리가 듣는 관산융마는 매우 단순한 형식을 반복한다. 길기만 하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마치 우주 저편에 갈 때까지 부르려는 듯 시간을 부여하니 길 수밖에 없다. 서양음악처럼 다양한 주제의 편성 그리고 전개와 발전이 보이지를 않는다. 복잡하거나 다양하지를 못하다. 아기자기한 맛도 없고 긴장과 해이 등을 통한 심리적 흥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 관산융마는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음 하나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간결한 구도이지만 이미 노래 자체도 순박하고 티가 없고 맑고 고요한 것이니 그 내용에 그 형식이 아닌가. 서도의 백성들이 수천 년 살아오며 터득한 순박한 삶이 절로 음악에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4. 누가 불렀을까
신광수의 글에 의하면 관산융마의 가락은 평양기생 牧丹이 처음으로 지어 불렀다 했는데 그렇다면 모란이라는 기생은 대단한 음악가임이 틀림없다. 기생의 신분이지만 실제로 생활하는 사회공간은 사대부들의 세계였다. 봉건사회에서 한문을 익혀 이로서 시를 짓기도 하고 또 읊조리며 노래까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양반계급이었다. 그들의 시짓기와 노래하기가 유희로 발전하여 경치 좋은 계곡이나 무슨 누각에서 모임을 가지면 당연히 여인들이 어울려야 했을 것이고 바로 그런 여인들은 기생들이었던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기생들은 천인 계급에 속했지만 그들은 양반의 필요에 의해 양반과 필적할 정도로 지식이나 예술에서 깊은 소양을 갖고 있었다.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官妓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던 사회이니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모란이라는 기생은 누구일까. 이백 년 정도의 과거라면 어느 정도 기록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를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모란을 훌륭한 음악가라고 꼭 지칭하여야 할까.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순전히 서양음악가들을 두고 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있는데 이름도 없는 사람이 만들었다면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이백 년 전에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이런 일은 다반사다. 개념과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악이 형성되는 것은 누구 한 개인의 위대한 천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전통에서 음악은 오직 聖人만이 만드는 것이다. 성인이란 실제로 존재하였고 또 현재도 존재하는가. 세월이 흐르며 성인이란 하늘이요 하늘은 결국 사람이고 백성이 되었다. 결국 백성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백성들이 새롭게 만들고 발전시키는 음악을 능력 있는 특정인 즉 당시로서는 사대부나 지식인들이 취사선택하거나 다듬고 가감을 할뿐인 것이다. 음악은 이미 만들어져 있거나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며 백성들이라는 커다란 강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는 것이다.
기생 모란은 바로 서도소리라는 강물과 그녀가 양반사회라는 계급에서 회자되고 또 그들이 즐겨마지 않는 미적 경계를 함께 버무려 하나의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동양의 전통예술에서 표절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典故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과거의 좋은 작품이 있으면 그것을 모방하거나 일부를 그대로 베껴서 자기 작품 창작에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한 베끼기를 교묘하게 잘하면 잘 할수록 그의 재능은 인정을 받는다. 우리가 詩仙과 詩聖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백이나 두보의 시편들도 따져보면 많은 작품들이 표절이다. 현대의 기준 즉 서양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르면 그들은 마땅히 격하되어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해서 누가 당시에 유행하고 있는 소리들을 절묘하게 조합하여 새로운 격조 높은 예술음악을 창작하였다 해도 그것이 크게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이고 요란하게 기록으로 남길 일도 아닌 것이다. 모란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모란은 자질이 뛰어난 기생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양반묵객들 보다 실력이 더 좋았을 것이다. 마치 황진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능화가 말했던 것처럼 평양의 기생들은 이후 관산융마를 잘 부르기로 소문이 난다. 모란이 처음으로 만들었지만 그 이후 세월이 흘러가며 많은 기생들이나 양반가객들이 손질을 하여 다듬었을 것이고 누가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저 우리는 현재 우리가 듣고 있는 관산융마로써 충분히 만족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어디서 이런 멋들어진 노래를 불렀을까. 평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가보지 않았어도 구구하게 여러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대동강 강물이 푸르게 넘실거리고 성벽에는 乙密臺, 牧丹臺, 浮碧樓 등이 세워져 있고 강의 한 가운데는 綾羅島, 半月島, 兩脚島, 河中島 등이 절경을 자랑한다. 오죽하면 속담에 평양감사도 자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벼슬아치나 한량들에게 평양은 놀기에 딱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배를 띄워놓고 등불을 킨 다음에 어느 기생은 거문고를 뜯거나 笙篁을 분다. 양반은 기생을 품에 안거나 술을 마시고 도도하게 흥에 잠긴다. 18세기 말 申潤福(1758-1813이후)의 '舟遊圖'를 보면 이런 정경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남정네들은 모두 갓을 쓰고 수염을 길렀으며 헐렁한 도포를 걸치고 있다. 여인들은 트레머리에 가슴이 드러날 듯 아니 거의 드러난 저고리를 입고 속곳 바지가 훤하게 드러나는 치마를 두르고 있다. 艶情이 물씬하게 배어난다. 이런 곳에서 모란은 관산융마를 불렀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노래는 꼭 요란스럽게 놀 때만 부르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시대 김홍도(1745-1805이후)가 그린 '後園遊宴'이라는 그림을 보자. 이끼와 풀이 묻어난 바위 밑에서 한 양반은 두건을 쓰고 곰방대를 물었고 한 양반은 갓을 쓴 게 아니라 머리 뒤로 걸치고 앞에는 기생인 듯한 여인이 모자를 쓰고 무릎머리를 하고 앉아 있다. 멍석을 깔은 자리는 이미 흥이 도도한 듯, 거문고를 뜯는 손은 바쁘고 가운데는 백자 호리 술병이 오똑하다. 자리가 무르익어 계집종들이 안주와 음식을 막 나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자리라면 마땅히 詩唱 한 수쯤은 읊어야하지 않을까. 또 있다. 金得臣(1754-1822이후)이 그린 여덟 폭 병풍 풍속도를 보면 넷째 그림에 흥이 한창이다. 계곡이 바위틈을 흐르고 거대한 고송이 굽어보는 펑퍼짐한 마루바위에서 한량들이 모여 앉아 있다. 모두 7명의 선비들과 두 명의 여인들이 보인다. 한 남자는 무릎 위에 거문고를 걸치고 연주에 몰두하고 있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무슨 詩會라도 열었나 보다. 이런 정황이라면 아무래도 가락이 있어야 할 터. 아마 여인들은 기생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분위기 따라 노래 몇 수를 불렀을 것이다. 사대부 계층들이 즐긴 노래라면 가곡이나 시조창 아니면 관산융마 같은 시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金壽長(1690-?)이나 金天澤(1680?- ?)같은 노래에 자신이 있는 歌客이었다면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기생들과 남창 여창하며 번갈아 부르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가을날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가는 깊은 계곡에 낙엽들은 흐르는 계곡물에 하나 둘 빠져들고 무심한 계류는 이들을 둥둥 데리고 흘러간다. 물소리는 요란해도 들릴 듯 말 듯 그냥 배경으로 정지해 있고 소나무는 왜 그렇게 큰지. 솔잎들은 청청 변함이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름의 기둥에 붙어 있는 소나무 껍질이 마냥 투박하기만 하다. 벌써 가을이구나. 앞에 둘러앉은 친구들의 머리카락도 벌써 많이 희어 있다. 허무하고 무상하기만 한 세월이로다. 그렇다고 슬프고 쓸쓸하기만 할소냐. 술도 있고 님도 있고 거문고도 있지 아니한가. 마음은 순간적으로 흥이 돋고 그 순간은 텅 빈 듯 모든 시름을 잊고 주위 경관의 자연과 합일해서 그리고 더불어 사는 친구들과 화합하여 하나의 경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시를 짓고 노래를 한다. 얼마나 멋있는 놀음인가.
5. 金月荷 - 아름다운 歌人
김월하는 아름다운 가인이다. 나는 김월하를 생전에 만난 적도 없으려니와 사진이라도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 여인이 어렴풋이 마치 본 것처럼 생각이 난다. 미인이었을까. 아니다. 그냥 곱고 정숙한 그런 여인이었을 것이다. 마치 가야금의 명인인 성금연을 앨범 쟈켓에서 보았을 때 통상적인 우리 나라 여인의 모습이되 우아하고 곱게 늙은 그런 얼굴이구나 생각했던 것처럼 김월하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금연은 지영희와 결혼하여 무려 열 명의 자식을 둔 여인이었다. 아는 바 없지만 김월하도 평범하게 살며 자식을 많이 둔 그런 여인네였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요염하고 아리따운 여인이라면 뭐가 잘못되었을까. 이름도 김월하다. 月荷는 달빛 속에 핀 연꽃이라는 의미다. 얼마나 화사할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달빛 가운데 핀 꽃은 아름다움보다 깨달음이 먼저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 김월하의 목소리에서 그런 것을 느낀다. 중국의 고전음악 가수들처럼 꾀꼬리 같은 목소리는 우리의 것과는 어울리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詩唱을 부르며 남도소리처럼 목이 쉬거나 탁할 이유도 없다. 그저 한마디로 사람 냄새가 물씬 나지만 그래도 그러한 사람의 정을 넘어설 정도로 청아하고 우아하고 담담하면서도 젖어 있는 듯 축축하여야 한다. 바로 김월하의 목소리가 아닌가. 김월하의 창은 타고난 재능과 목소리에다 끊임없는 노력을 쏟아 부은 결과일 것이다. 조선가곡의 마지막 곡 太平歌는 남창과 여창이 어우러지는 곡이다. 당대 내로라 하는 명인 가객들, 월하의 스승인 이주환은 말할 것도 없고 김경배나 김호성 할 것 없이 다투어 청하여 김월하와 함께 태평가를 부른 것은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현재 태평가를 부른 음반은 남자 또는 여자 따로 독립하여 부른 것은 몇이 있어도 본디 남자 여자 함께 부른 음반은 과문인지 몰라도 김월하가 유일한 것이다.
단연코 이야기하는데 관산융마는 김월하를 만남으로써 20세기 들어 화려하게 부활하고 그리고 21세기 첨단의 시대까지 생명을 존속하고 있다. 음식재료가 풍부하고 다양하다고 일품의 요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류 숙수가 어루만지고 다루어야 맛있는 일류의 요리가 나오는 것이고 또한 주어진 재료가 제 값어치를 하는 것이다.
김월하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자세한 자료가 없다. 작금의 못난 문화현상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아쉽기만 하다. 몇 개의 음반에 실린 소개를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김월하의 본명은 김덕순으로 1917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음악과는 상관없이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가 몸에 지닌 병 때문에 아침마다 새벽 산책을 나섰고 거기서 운명적으로 시조창을 부르던 동아리 패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 여섯 때 일이라 한다. 참으로 늦게 예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후 처음에는 이병성에게 가곡을 배우고 나중에 서울로 올라와 이주환에게 사사를 받는다. 이병성이나 이주환 모두 하규일에게서 전승 받은 일세대 명인 명창들이다. 천부적인 소질로 인하여 그녀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낸다. 1969년 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 1970년 시우단체 총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되고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된다. 그리고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하여 후학양성과 국악발전에 진력하였다. 일생동안 그는 근검 절약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작고한다. 언제? 아무리 찾아도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국립국악원에라도 전화를 하여야 할까? 참으로 적막하고 쓸쓸하다. 모두가 무상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김월하를 생각하며 관산융마를 다시 듣는다.
6. 맺음말
특정 예술 형식은 형성, 발전, 수렴, 해체의 과정을 순환적으로 갖는다. 그러나 서도의 詩唱 관산융마는 이런 과정을 갖지 못한다. 안타깝다. 평안도 지방에서 백성들이 즐겨 부르는 서도소리를 바탕으로 하고 다시 사대부들이 즐기는 漢詩 律調를 얹은 律唱으로 진전된다. 그리고 예술의 미적 경계에 이미 들어선 예인들이 이를 만나 다듬어 소위 우리가 듣는 詩唱 관산융마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꽃을 피우면 열매를 무수히 맺어 다음 해에는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무리를 지어 꽃무리를 이루어야 하건만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열매를 맺었는지 아니면 맺힌 열매를 잃거나 싹이 돋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있었길래 하나의 예술형식이 발전을 하다가 멈추었을까.
밑바닥 기층의 백성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예술의 초보적 형식은 대단히 원초적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근본 심금을 울릴 정도로 감동적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니 그 창의적인 면도 상상을 절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백성들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눈썰미가 있는 전문 예인들이나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대부 호사가들은 당연히 이를 주목하게 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거친 형태의 기층 예술 형식과 내용을 더 다듬거나 가감하여 소위 말하는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전통예술에서 이러한 과정을 겪어 형성된 예술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면에서 관산융마는 이러한 접합점을 이룩한 참으로 귀한 예술작품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게 형성된 하나의 예술형식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멈추어버렸다는 사실에 우리는 한껏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의 노래가 수백 년이 넘도록 온전히 전승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김월하라는 뛰어난 가인을 만나 노래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으니 예술의 목숨이란 이다지도 기구하도록 질긴 것인가. 우리는 김월하의 창법에 주목한다. 그리고 현재의 예인들은 첫째로 노래 해석을 다양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김월하의 수준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더 피나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작곡가들은 고전 자료를 탐색하여 가능하면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예술 작품이 있으며 발굴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고전에는 아름다운 한시들이 무진장 널려 있으니 그 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구슬들을 찾아 음악이라는 실이나 줄로 꿰어야 한다. 전통미감을 바탕으로 하되 필요하다면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작곡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우리는 김월하의 창에 아름다움을 느끼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의미를 찾아내고 또 부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우리 나라는 새로운 21세기를 당당하게 맞이하며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새로운 문화예술의 전통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미 그리고 또 아름다움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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