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켠 TV에서 인민 루니 정대세가 나오고 있다, 한국 국적을 갖고서 북한대표 축구선수로 뛰고 있는 그를 언젠가는 인터뷰 하고 싶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가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인상적이었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경기 직전 굵은 눈물을 펑펑 흘리던 모습,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남아있다. 강하지만 한편으로 여린 스트라이커 정대세의 이야기를 지난 4일 방송된 SBS TV 힐링캠프 내용을 재구성해 인터뷰 기사로 써보았다. / 필자 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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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세 “나라는 둘로 나눠져 있지만 북한도 한국도 내 나라입니다.” [사진-SBS방송 캡쳐] |
“나라는 둘로 나눠져 있지만 북한도 한국도 내 나라입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조선학교를 나온 정대세는 북한대표 축구선수이지만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일본의 법률은 아버지의 국적을 따르기 때문에 형제들도 모두 한국 국적인 것이다.(형 정이세도 축구선수로 전 한국내셔널리그 골키퍼였다) 그러나 정대세는 북한 대표로 뛰고 싶어서 조선적을 얻고 싶었지만 국적을 바꾸는 것은 어려웠다고. 대신 여권을 갖고 있는 나라의 대표로 뛸 수 있다는 FIFA 규정에 따라 북한 여권을 획득하고 북한대표 축구선수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정대세는 한국국적임에도 자유롭게 한국을 오갈 수 없다. 때문에 인터뷰는 일본 나고야 정대세의 집에서 진행됐다.
“한국에서 출생신고, 호적등록을 하지 않아 세밀한 주민등록번호는 없지만 1000000번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외국을 나갈 때는 북한여권을, 한국을 방문할 때는 임시여권을 발급받습니다. 또 외국에서 일본으로 들어올 때는 일본재입국 허가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도 그가 북한대표 선수를 고집한 이유는 조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정신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정말 좋았다고 설명한다.
“프로에 가기 전에 학창시절 일본학교와 경기하면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경기를 뛰어야 하는데 일본학생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라’, ‘김치 마늘 냄새 독하다’며 차별과 놀리곤 했습니다. 정말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내 나라가 어딘지,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배웠어요, 어린 시절 장래희망을 적을 때면 ‘나는 장래에 조선(북한) 축구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썼습니다.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축구에 있어서 좋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일본 학교에 다니면 기술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요, 그런데 프로 축구선수로 성공하려면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돼요. 정신력과 긍지를 가져야 성공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러나 저는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일본 사람에게 질 수 없다’며 ‘일본 사람이 1만큼 훈련한다면 조선 사람은 2, 3배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조선학교에 다닌 게 정말 좋았어요.”
그가 조선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적인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재일교포 1세대인 정대세의 외할머니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이었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라서 모든 재일동포의 국적은 조선적을 갖고 있었으나 그는 조선적임을 자랑스러워했다고 정대세의 어머니는 설명했다.
“정부수립 후 재일동포들이 한국국적으로 바꾸고 몇몇은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제 어머니는 평생 조선적으로 살고 싶어 하셨어요. 재일동포들은 조선적으로 남기도 하고 한국국적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어느 쪽도 좋습니다. 모두 자기나라입니다. 어서 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어머니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아버지는 일본학교를 보내려고 했지만 정대세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조선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정대세의 어머니는 조선 사람으로 사는 것이 영예롭다고 말했다.
“교육이 사람을 만듭니다. 재일동포들 중에 일본 학교에 보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선, 한국인으로 아이를 키우자 하면서도 일본 학교에 다니면 커서 일본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대세의 형제들은 모두 조선학교를 나와서 다 같이 우리말을 씁니다. 조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고 영예롭습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가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 북한, 일본 모두에 속해있는 정대세가 혼란스럽기도 할 터, 그는 고민이 많은 청년이었다.
“내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는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지만 북한 국가대표가 된 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국적으로 조선(북한)대표를 선택하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생각하고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조선(북한)은 나를 지켜보고 키워준 나라, 일본은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은 내 국적, 고향인 나라임이 분명합니다. 나는 조선의 스트라이커이며 나를 키워준 것은 조선입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경기 시작 전 정대세의 눈물은 모두를 감동시켰다. 이는 타임지 선정 남아공 월드컵 10대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던 이유에 대해 두 가지의 이유로 설명을 했다.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나 한국국적에서 조선 국가대표 선수로 뛰기까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한국국적이고 조선 대표로 뛰고 싶었는데 그동안 겪었던 고생이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 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에 감격 했습니다 월드컵 출전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북한의 월드컵은 1966년 이후 44년 만의 진출이었다.)
감성적인 성격의 그는 한국 드라마 ‘주몽’을 보고도 100번을 울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프로그램 MC인 한혜진이 너무 예뻐 3초 이상 쳐다보지 못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자신 스스로 실물 미남이라고 생각한다며 100명을 만나면 100명이 모두 실물이 낫다는데 자신이 대체 화면에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익살을 떨기도 한다.
이런 그는 독일 FC퀼른으로 이적한 후 슬럼프를 겪고 있지만 힘을 얻기 위해서 인터뷰에 나섰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정대세 팬들에게 어머니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라는 둘로 나눠져 있지만 북한도 한국도 내 나라입니다. 일본 팬들이 대세를 사랑해주는 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인이 우리 대세를 사랑해준다는 것을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기쁘게 생각합니다. 계속 오래 응원해주시길 원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도 우리는 정대세를 만날 수 있다. 힐링캠프는 예고편으로 정대세가 모교 아이찌조선학교를 방문한 모습을 소개했다. 재일교포 3세라는 긍지를 잃지 않은 축구스타, 그 어느 때보다도 통일의 기운이 절실한 요즘, 그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