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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인 만주군 장성 & 조선의용대 김원봉장군

감효전(甘曉典) 2012. 6. 6. 14:16









일제 때 조선인으로 자원입대해 만주국 군대의 중장까지 오른 인물을 포함,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인들과 전쟁포로 등 4800여명의 인적 기록을 담은 문건이 러시아에서 발견됐다.

 

특히 광복 이후 남한에서 미군정하에 친일파들이 계속 득세했던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전쟁포로들을 상대로 친일행적 조사를 주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행 정자치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군사문서보존소에서 만주군 보급대장 박병두(朴柄斗) 중장이 1946년 1월 반민족 행위로 소련군에 의해 체포돼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56년 일본으로 송환된 기록을 찾았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 "만주군 장성급 중 조선인이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온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국 가기록원이 확인한 40여장의 기록철에는 박씨가 1894년 평안도 안주군에서 태어나 교사로 재직하다 1919년 자원입대했다고 기록돼 있다. 박씨는 일본 첩보기관 소속으로 중국군에 침투한 뒤 정기적으로 중국군 장성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고 10여명의 중국군 장성을 포섭했다.

 

박씨의 최종 직책은 만주군 보급대장으로 계급은 중장이었다. 박씨는 1946년 1월 평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돼 2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10년간 복역한 그는 1956년 본인 희망에 따라 일본으로 송환됐다. 앞서 박씨는 수용소에서 총리와 철도청장 등 일본의 유력 인사에게 수차례 탄원 편지를 보냈다.

 

1945년 2월 54세에 중령 예편한 김인욱씨는 이듬해 1월 북한에서 체포돼 1950년 일본으로 송환됐고, 최석건 중위는 1945년 11월 체포돼 1947년 수용소에서 사망하는 등 6000여명의 조선인 출신 일본군과 친일행위자들이 소련 군정 시절  북한에서 붙잡혀 처벌받았다. 이들은 소련 보위성 산하 전쟁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됐다가 원하는 곳으로 송환됐다.

 

공개된 기록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수용소가 6곳이었으며 1948년 2162명의 조선인 전쟁포로 및 친일행위자가 송환됐고 49년 83명, 50년 189명, 51년 2483명 등 모두 4817명이 송환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군사문서보존소 관계자는 "수용소에서 사망했거나 소련에 귀화한 조선인도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5000∼6000명의 전쟁포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국가기록원은 올 하반기 군사문서보존소가 보관 중인 조선인 전쟁포로와 친일행위자 기록을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넘겨받기로 약정을 체결했다.

이것들을 단칼에 ... 

이왕가 직계중 어느 누구도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자 단 한명도 없었다 이것들을 단칼에 ... 


 



▲▲▲▲▲ 자기 안일을 위해  일제넘들 국부나 빨고 잇을때




 



 현충원 ‘이상한’ 묘역 배치


장군·친일 논란있는 인사 臨政 요인보다 위에 안장...장군들에 지휘받는 형국


 


↓ 조선민중은 이렇게 싸우고 있엇다▼▼▼▼▼

그는 자주적인... 인간세상.  평등한 인간세상을 꿈꾸었다...
노예로 살 바엔 싸우다 죽을 길을 택하였다...

국공분렬과 국민당내 군벌혼전을 거치면서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혁명가들은 2 국공합작이 이룩되고 1937 전면적인 중국 항일전이 개시되자 다시 무한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1928 아나키스트들 ()


 1938 하반기 상해, 남경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자 상해, 남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 조선혁명자들이 무한에 왔다. 이들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면서 조선 혁명단체와 당파의 대단결을 이룩해 나갔다.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 할것없이 무한에 모여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김원봉을 위수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 조선혁명자련맹(朝鮮革命者聯盟) 대표적인 당파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선혁명자 김규광과 박건웅(), 김산(장지락) 주축으로 1936년에 창립되였다. 일찍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이들은 안전하게 광주를 탈출한후 장시기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상해가 함락된후 무한으로 왔던 것이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군복 입은 약산 김원봉.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 이때 한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50여명 조선 열혈청년들이 최창익(리건우) 단장으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각종 군중집회에 참가하고 거리에서 연설하였으며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 항일전쟁을 선전하였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은 조선민족혁명당내의 열성자들이였다. 남경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김학무(), 리상조(), 장지민() 비롯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왕지연( 한빈 ) 함께 전시복무단을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으로 개칭하고 계속 활동을 견지하였다.


 ...


조선의용대 출신이였던 문정일()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이때는 무한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처한 때라 우리는 김학무를 단장으로 <조선청년전시복무단> 조직하고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인 <중화민족해방선봉대(中華民族解放先鋒隊)> 함께 한구에서 항일선동사업을 하였는데 반일연설도 하고 연극도 했다.


 


나는 허정숙(허헌딸--최창익 부인) 등과 함께 걸상을 가지고 거리와 부두로 나아가 걸상에 올라서서 반일선동연설을 했다. 연설할 우리는 조선의 혁명청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조선이 망국한 뼈저린 아픈 력사를 이야기하고 항일하지 않으면 중국도 조선처럼 망국하게 되므로 중국과 조선이 단합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고 삐라를 살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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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1 12,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비롯한 단체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통일적인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 결성하고 김원봉, 김학무, 김규광, 류자명을 리사로 선출하고 석정(石正 윤세주 尹世冑), 한일성(), 왕지연(), 박차정(), 신악() 간사로 하였다. 12월초 련맹의 대부분 성원들이 한구에 모여 창립선언을 정식 발표하였다.


 


1938 10 10 무한 외각전투의 포성속에서 관내 조선민족의 번째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 창건의식이 한구 기독교청년회에서 성대히 진행 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대표이며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으로 있던 주은래가 창립의식에 참석하여 동방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관련해 연설하였고 정치부 3 청장인 곽말약()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 산하의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 지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중국측 대표 4명에 조선측 대표 4명이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한 진국빈(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대표 류자명이 조선인 위원으로 지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의용대 창건시 대원이 도합 120여명이였고 김원봉이 의용대 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구대() 나누어 편성하였는데 박효삼() 1구대 구대장으로 임명되고 왕통()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2구대는 구대장에 리익성(), 정치지도원에 김학무가 임명되였다. 1939 대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나자 3구대를 새로 편성하고 한지성 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제53회 조선의용대의 창건지 답사 ←출처


9. 동북 전장을 향한 고뇌 ㅡ 조선의용대 주력의 화북 이동


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과 석정 윤세주




  누굴까 ? 증오와 음산한 시대를 만든자 가 ?  

 "박정희 정권의 고문 악행과 관련한 기사("옷을 다 벗으세요"... 비극의 시작이었다)였는데, 조회수가 무려 134만9000건이었죠. <오마이뉴스> 창간 이래 단일기사로는 최고라고 들었어요. 게재한 지가 한참 지났는데 지금도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출처 : 바른몸짓 바른생각
글쓴이 : 틈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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