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 |
탄생 99돌 맞아 `탄허록’ 출간
‘족집게 예언’ 탄허 스님 “고통 지나면 남북통일 서광”
동서고금 꿰뚫는 법문 담겨
40~60년전 한국발전 점쳐
현실정치에도 매서운 잣대
“정치가 손에 흥망성쇠 달
그때까지는 한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에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까지 이루고, 유엔 사무총장과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인이 지명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랬기에 ‘산승의 헛소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이가 오대산의 탄허 스님(1913~83·사진)이었다. 그의 탄생 100돌을 10개월가량 앞두고, 법문의 핵심만을 담은 <탄허록>(휴 펴냄)이 출간됐다.
이 책엔 세간의 궁금증을 유발한 예언뿐 아니라 정치, 철학, 생사, 종교에 대해서도 동서와 고금을 꿰뚫는 지혜의 요체가 담겨 있다.
우선 관심을 불러오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 그의 예언이다.
“지구의 주축 부분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인류역사의 시작과 끝이 이뤄질 것이다. 5천년 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는 머지않아 종결될 것이다. 새 시대가 오기 전엔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고통이 지나면 남북통일의 서광이 보이고, 생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도래한다.”
일제 식민과 민족끼리 살육하는 전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예언이다. 언론인 김중배는 탄허에 대해 “비록 몸은 산간에 있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뚫어보고자 하며, 부정적이고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었던 우리 역사의식에 새로운 긍정,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한반도와 달리 일본에 대한 그의 예언은 가혹하다. 백범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는 “지난 500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한 그 죄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며 ‘일본 침몰설’을 제기한다.
탄허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정치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정신 철학을 굳건히 하지 않고 선진국이 될 수 없다’며 정신문화원 설립과 남북화합 방안을 건의하는가 하면 대전 국립묘지의 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산사의 노승의 말로 보긴 어려운 매서운 잣대를 현실 정치에 들이댔다. 그는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제시하면서도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이 막중하고, 그들의 손에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사람이 아무리 밝다 해도 만민의 총명을 모으는 것보다 밝지는 못하다”며 독단을 경계했다.
그는 노나라 정승이 공자에게 ‘우리나라에 먹을 게 없다’고 걱정하자 공자가 ‘적은 것은 걱정하지 말고 먼저 공평하게 분배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고 한 예화를 들며, “탐심이 많은 지도자는 권력을 통해 제 욕심만을 채우므로 백성들이 곤고해진다”고 경고했다.
탄허는 “한 사람만 소득이 높아서는 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춥고 배고픈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만약 한 사람이 100만명 먹을 것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정치 부재의 사회임에 틀림없다”고 꼬집었다.
탄허는 또 노나라 정승이 ‘우리나라엔 도둑이 많아서 정치를 못하겠다’고 하자, 공자가 ‘당신이 욕심을 안 내면 백성은 상금을 주고 도둑질하래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문답을 들며 ‘솔선수범이 나라를 살리는 최선의 길’임을 제시했다.
탄허는 “최고의 지도자가 소인일 때는 그에 따라 10퍼센트의 극악질(아주 악질형) 관리가 등용되어, 10퍼센트의 극선질(아주 선한 부류)은 모두 암혈에 숨을 수밖에 없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정치가들에게 젊은이들의 말을 경청하라고 권한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탄허는 정치가에게 “돈벌이하는 기업가의 건의나 주장보다는 밤새워 고민하고 국가의 미래를 주시하는 학자,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의 말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하며 이렇게 썼다.
“정치만을 위한 정치는 백해무익이다. 진실로 인간을 위한 정치일 때만 그 기강이 바로 세워질 수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화엄학연구소 제공
전문은 휴심정(well.hani.co.kr)
탄허 스님의 예지력
개미떼죽음에 ‘난리’ 예상…베트남전 미국 패배도 내다봐
1949년 어느날 탄허는 개미 떼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오대산 중대 법당과 뜰에 수백마리씩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본 뒤 역학 원리로 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좌들을 경남 양산 영축산 고지에 있는 백련암으로 피신시켰다.
또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고 있던 그는 1968년 가을 장서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강원도 삼척 영은사로 옮겨두었다. 그러자 울진·삼척에 북한 무장간첩 120여명이 침투했다. 월정사에 군단사령부가 세워져 소탕작전을 하면서 암자는 폐허가 되었다. 재가 될 뻔한 ‘필생의 원고’를 미리 구해낸 것이다.
탄허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도 정확히 예언했다. 당시는 미국을 도와 국군이 파병돼 남한엔 ‘미국의 승리와 월맹 타도’ 분위기가 고조되던 때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숭산 스님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 하나면 월남은 꼼짝 못할 것”이라고 하자, 탄허는 “역학의 원리를 볼 때 월남은 남쪽으로 화(火)인데 미국은 태방으로 금(金)이어서 금이 불에 들어가면 녹을 수밖에 없다”며 “미국이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우담 화엄학연구소장은 출가승으로서 탄허 스님을 모실 당시 그의 남다른 예지력을 자주 지켜봤다. 1965년 겨울, 강원도 횡성에서 버스를 타고 진부로 가던 중이었다. 운전기사 뒤에 타고 있던 스님이 갑자기 내리자고 해서 황급히 내렸다. 날도 추운데 왜 그러느냐고 불평을 했더니 “운전기사의 미간을 보니 곧 죽을 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20분쯤 가다 보니 앞서 간 버스가 전복되어 있었다. 서우담이 “왜 운전기사에게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져물었다. 하지만 탄허의 대답은 “몸 성히 운전 잘하고 있는 사람한테 ‘당신 곧 죽을 것이니 운전하지 말고 한겨울 고갯길에서 차에서 내리라’고 하면 미친 놈이라고나 하지 내 말을 듣겠느냐”는 것이었다.
1979년 늦은 봄 고려대에서 봉직하고 있던 한 여교수가 서울 안암동 대원암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혼담이 오가고 있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탄허 스님은 “결혼 좋지, 그러나 서산에 지는 해는 부상(扶桑·해가 뜨는 곳)에 잡아맬 수 있을 때 좋은 것이지!”라고 답했다 한다.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이 예언 때문인지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조현 기자
탄허 스님은
현자들의 큰 스승
원고 6만장 분량
`화엄경’ 첫 번역
탄허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이미 동양사상의 한 경지를 이룬 상태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스님과 20여통의 서신을 주고받은 끝에 21살에 강원도 오대산에 출가했다.
그는 23살 때 이미 승려들에게 불경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26살 때 훗날 조계종 종정이 된 고암 스님과 탄옹 스님 등의 요청으로 불교의 정수인 <화엄경> 강의를 개설했다. 42살때엔 한암에 이어 월정사 조실로 추대돼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탄허는 한자만 100만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고, 유불선에 통달하지 않고선 해석이 불가능한 <화엄경> 80권을 붓다 이래 최초로 자국어로 번역해낸 인물이다. 10여년간 매일 원고지를 100장씩 쓰는 초인적인 작업을 거쳐 원고지 6만2500장 분량으로 펴낸 <신화엄경합론>은 원효·의상 이래 최대 불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불교를 뛰어넘는 선각자이자 경세가로 ‘현자들의 스승’ 구실을 했다. 탄허보다 10여년 연상인 함석헌(1901~89) 선생이 그를 자주 찾아 동양학을 물었고, 국문학자 양주동(1903~77) 박사는 탄허에게 <장자> 강의를 들은 뒤 “장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탄허만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 혜거 스님은 1960년대 초 여름 영은사에서 49재를 모실 때 한밤중에 큰 바람이 불어 문짝이 흔들리고 모든 호롱불이 일시에 꺼져 모든 대중이 우왕좌왕할 때 탄허 스님만은 <금강경>을 마지막 구절까지 독송하며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탄허 스님은 밥 짓고 일하느라 공부할 수 없는 공양주와 부목까지 함께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침 공양 지을 때, 점심 공양까지 한꺼번에 밥을 짓도록 해 3년간 찬밥으로 점심 공양을 때웠을 정도로 공부하려는 이들을 돕는 데 남달랐다”고 회고했다.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