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산 김원봉 선생님.
-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김산이 김원봉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였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김원봉은 의열단장,조선의용대 창설,임시정부광복군 부사령,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북한정부 검열상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이런 화려한 발자취가 오히려 그를 남북 모두에게서 잊혀지게 만들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월북을 한 이유로 그의 일가친척이 풍비박산이 났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숙청되고 말았다. 그가 좌익인가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제국주의침략기의 독립이라는 목표는 이데올로기보다 언제나 우선되어야 했던 것이다.1.어린시절1898년 밀양에서 태어나 이후 상경하여 민족주의성향이 짙은 중앙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현재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 중앙학교는 계몽운동가들이 민족독립의 후진양성 차원에서 만든 학교인데 김원봉이 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민족주의자인 유근이 교장으로 있었다. 따라서 초기 김원봉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교육 받은 듯 싶다. 교장 유근이 학생들을 강화도 마니산으로 데리고 가서 단군이야기를 해주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학생과 교사가 모두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김원봉은 학교를 중퇴하고 선후배인 김약수, 이여성과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원봉의 호가 약산인데 우국지사이자 고모부인 홍명규가 물과 같아라 약수, 별과 같아라 여성, 산과 같아라 약산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김약수는 북풍회 계열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해방이후에는 남한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반민특위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친일파 숙청에 앞장서다가 국회쁘락치사건에 연류되어 수감되어 있다가 6...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초원의햇살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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