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해방작전 | ||||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 (마지막회) | ||||
| ||||
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외래 침략군을 섬멸하자! 조국통일 만세!”하며 하늘을 찢어놓을 듯 구호를 외쳤다. 출정가, 태백산, 빨치산의 노래 등 혁명가요를 부르며 전사들은 일렬로 여분산 거점을 떠났다. 오백여명이 일렬로 행군하기 때문에 긴 대열이었다. 능선을 타고 가다가 정읍군 산내면 쪽으로 섬진강 상류를 건너서 백년산에 올라갔다. 부대원들은 억새밭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잤다. 일찍 저녁식사를 마치고 은밀하게 고지를 넘어갔다. 북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가 임실 유격대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휴식을 하는데 임실 동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열한 살짜리 애기동무가 있지 않은가. 부모를 잃은(학살당했음) 어린 소녀는 참하고 예쁘고 다부져서 동무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산생활을 하고 있었다. 애기 동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애기동무! 노래하나 불러봐.” 애기동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임실동무가 노래를 부탁하자 스스럼없이 노래를 불렀다.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에 없지만 산에서 자주 불렀던 혁명가요가 아닌가 싶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출발!” 날이 저물어가는 데 우리는 산을 내려갔다. 산기슭에 초가집 세 채가 있었다. 울타리에 수수묶음이 걸려있고 겉잎이 누렇게 비틀어진 배추 몇 포기가 텃밭에 아직 남아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부대 전체가 벼를 벤 논에 정렬했다. 3대대와 6대대는 임실과 정읍으로 가는 두 방향으로 먼저 출발했다. 놈들의 지원부대를 중간지점에서 섬멸하기 위하여 병력의 3분의 2를 배치한 것이다. 2대대만 남고, 각 중대와 소대에 길 안내를 담당한 지방동무들이 배치되었다. 당시에 상운암에는 지서를 비롯해서 7개의 보루대가 있었다. 외팔이 참모장은 자신이 쏜 총성을 신호로 일제히 돌격하도록 지시했다. 2대대 동무들은 중대와 소대 단위로 각기 안내원을 선두로 출발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 한참을 걸어 나가자 마을이 나타났다. 긴장한 동무들은 손에 총을 거머쥐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전진했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우리를 세워놓고 안내원 동무는 담을 넘었다. 열리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공격 신호 총성이 울렸고 동시에 콩 볶듯 총성이 요란했다. 우리는 뜰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웬일인가. 바로 보루대 밑이었다. 동무들이 웅성거리는데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피피피 파란 불꽃이 튀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동무들은 순식간에 5,6m 밖에 엎드렸다.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아이고! 위생병이 비명을 질렀다. 얼른 가서 여동무 입을 틀어막고 대문 밖으로 끌로 나왔다. 어디를 맞았느냐고 묻자, 다리란다. 더듬는 손끝에 허벅지의 상처는 과히 크지 않았다. 명주 목도리를 풀어서 꽉 동여맸다. 안내원 동무에게 지휘부로 데려가라고 이르고는 뜰 안으로 들어갔다. 희비하게 날이 밝아왔다. 뜰 쪽으로 나있는 보루대 총구는 한 곳 뿐이었다. 동무들이 몇 군데에서 총구를 조준하고 있다가 경찰이 밖을 내다보자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를 제압한 우리는 거침새 없이 돌아다녔다. 어떻게 하면 보루대를 깔 것인가. 하고 머리를 굴리다가 묘안이 떠올랐다. 두 동무가 보루대 밑에 가서 한 동무는 앉고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쥔 동무가 어깨에 올라갔다. 밑에 동무가 일어섰는데 총구에 3,4cm가 미치지 못했다. 무리하게 수류탄을 총구 안으로 던져 넣으려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번개처럼 몸을 날려서 엎드렸다. 수류탄 폭발로 다친 데는 없었지만 아쉽게도 수류탄 하나를 잃었다. 키 큰 동무들이 나갔다. 여유 있게 수류탄을 총구 안으로 넣었다. 폭발과 함께 연기가 총구 밖으로 번져 나왔다. 조용했다. 저들은 기어 나오지 않고 보루대 안에 죽치고 있었다. 치고 들어가자니 무장하고 있는 적이라 동무들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한 동무가 불을 놓자고 제의했다. 처마와 보루대 사이가 한자 남짓 벌어져 있어서 솔가지단을 지붕 끝에서 보루대에 세워놓고 불을 붙이면 불길이 솟아서 보루대 위 볏짚으로 이은 지붕에 옮겨 붙을 것 같았다. 헛간에 솔가지 나무 한단을 지붕위로 운반했다. 계획대로 나뭇단 끝에 불을 붙여서 보루대에 밀어 놓자 치솟는 불길이 보루대 지붕에 닿았다. 순식간에 불이 보루대 지붕을 덮어버렸다. 불은 아가리를 벌리고 보루대 안을 덮쳤을 것이다. 경찰 7,8여명이 정문으로 달아났다. 혼이 나간 적에게 저항은 없는 법이다. 동무들이 보루대에 갔을 때는 입구에 삶을 체념한 부상자 서너 명이 신음하고 있었다. 동무들은 부상자를 업고 나왔다. 새로 파견된 위생병이 응급조치를 취했다. 생명이 위태로운 부상은 아니라고 위로하면서 안집 방으로 부축했다. 죽을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인지 파랗게 질려있던 그들은 마음이 놓이는 듯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오전 9시경 학교 앞에 지서 보루대를 제외한 6개 보루대를 동무들이 점령했다. 그 사이에 후방부 일꾼들이 아침식사를 공작했던 모양이었다. 식사하러 가자고 했다. 어느 집 싸립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얼마만인가. 밥을 맛있게 먹었다. 참모장 동지가 오셨다. 우리도 지서를 공격하는데 합세하도록 지시했다. 지서는 뻔뻔한 논 가운데 크게 구축해놓은 보루대였다. 보루대와 가장 가까운 민가 담까지의 거리가 50여메타 되어보였다. 솜을 타는 활이 처마 밑에 걸려있었다. 화살이 어쩌면 닿을 것 같았다. 신우대로 화살을 만들고 솜 안에 총탄에서 뽑은 화약을 넣어 끝에 비끌어 매었다. 솜에 불씨를 붙여서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촉이 아니고 솜이라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불씨가 화약에 닿아서 불꽃이 피어났지만 허사였다. 담 위 이엉에라도 닿아야 할 텐데 어림없었다. 지서장이 어느 집 셋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단다. 오십대의 지서장 어머니를 만나보았다. 교양이 있어보였다. 우리는 지서를 점령하기 전에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들과 경찰들을 살려야 할 텐데 걱정이라고 했다. 아마 정오쯤 되었을 것이다. 참모장 동지가 지서장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셨다. 참모장 동지의 의사를 요약하면, ‘우리는 407, 한 개 연대가 왔다. 정읍과 임실로 연결된 기동로에 삼분의 이의 병력이 매복하고 있다. 지원군이 와도 살아남지 못한다. 지원군을 기대하지 말라. 우리는 지서를 점령하지 않고 철수하지 않는다. 사상자를 내지 말고 투항하라.’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407연대 참모장 이상윤, 글은 내가 쓰고 참모장 동지가 싸인을 했다. 지서장 어머니에게 쪽지를 들려서 지서에 다녀오게 했다. 자식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 마다하지 않고 지서에 갔다. 한참 후에 돌아온 지서장 어머니는 아들이 읽어보고 말이 없었다고 전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1시 반쯤 또 편지를 썼다. 여러분의 생명을 책임지고 보장한다. 미덥지 않으면 서쪽을 열어주겠다. 무장을 놓고 맨몸으로 빠져나가라. 서신을 가지고 지서장 어머니가 지서에 갔다.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겠다는 답을 가져왔다. 우리는 메가폰을 가지고 아지프로를 계속했다. 지원부대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총성 한 방이 들려오지 않는다. 여러분이 죽던 말던 저들은 관심이 없다. 지금 중간에서 전투가 벌어져도 여기까지 해전에 도착할 수 없는데 총성이 들려오지 않는다. 기대하지 마시라. 여러분의 생명은 연대 명예를 걸고 보장하겠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시가 되어도 반응이 없자 동무들은 가게 빈지문짝을 떼어다가 솜이불과 단단히 묶었다. 총알이나 수류탄 파편이 관통할 수 없는 방패를 만들었다. 편지를 또 썼다. 마지막 글이라고 확답을 주지 않으면 방패를 밀고 돌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서에 다녀온 지서장 어머니는 아들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단다. 이미 투항을 결심한 것 같아서 가게에 국수를 사다가 삶으라고 했다. 큰 길 가운데 빈지를 길게 늘어놓았다. 20여분 지났을까. 경찰 한 명이 밖에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까딱 끄덕이고는 외부계단으로 내려왔다. 나도 지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맨 앞에 나온 경찰과 악수를 하면서 고생하셨다고 위로했다. 아주머니들과 동무들이 국수를 날라 왔다. 일렬로 나오는 포로들을 빈지 양쪽으로 안내했다. 아침과 점심을 굶은 저들은 게 눈 감추듯 국수 그릇을 비웠다. 몇몇 동무들은 지서 안에 들어가서 무기를 들고 나왔다. 노획한 무기를 큰 길에 가지런히 뉘여 놓았다. 박격포와 중기는 수리하기 위해서 임실에 보냈다고 했다. 지서에서 나온 인원은 면장을 포함해서 64명, 무기는 경기 일정에 소총 48정이었다. 우리는 마을 뒤 언덕에 누워서 잠에 떨어졌다. 얼마동안 잤을까. 깨워서 일어났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군중대회는 끝나고 모두 스크램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았다. 빨치산과 인민, 그리고 경찰이 한데 어우러졌다. 아리랑 민요도 부르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작은 다리를 건너서 논에 집결했다. 지휘부와 경찰들이 짚을 갈고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가 주막집에서 막걸리 두어 말을 가져왔다. 경찰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선발대가 나가고 연이어서 대열이 상운암을 떠나갔다. 술을 사양하면서 맞잡은 손을 놓고 지휘부 동지들은 후비를 담당한 우리 중대와 함께 떠나갔다. 5,60메타 갔을 때였다. 지서장과 경찰들이 달려왔다. 이렇게 헤어지면 서운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죽이지 않을지라도 취조도 하고 산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고 지서장까지도 손 하나 대지 않고 떠나가는 빨치산에게 큰 감동을 받은 듯싶다. 옷소매를 붙잡았다. 갈 길이 멀다고. 훗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면서 떠나왔다. 동무들의 희생은 없고 승리한 상운암 해방작전, 마지막 헤어지던 장면이 또한 흐뭇했다. 다음 날 점심때 거점에 돌아왔다. 우리가 없을 때 소년부대가 벌똥산에서 거점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가자 꼬마 소대장이 씩씩하게 경례를 붙이며 어제 기어든 적을 물리쳤으며 오늘은 적정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수고했어요. 우리가 왔으니까 동무들은 내려가지요.” 꼬마 소대장은 “안됩니다. 상부 지시가 있어야 철수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지 않는가. 자기 직속상관의 명령이 있어야 내려간단다. 할 말이 없었다. 꼬마 소대장은 연락병에게 부대가 왔는데 철수해도 좋은가 지시를 받아오라고 했다. 12,3세 되어 보이는 연락병이 뛰어갔다. 꼬마 소대장은 우리의 전투결과가 궁금한 것인지 들려달라고 졸랐다. 나는 벌똥산 바위위에 앉아서 꼬마 전사들에게 상운암 해방작전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긴장하고, 웃고, 감격하던 꼬마 전사들, 철수하라는 상부지시에 열을 지어서 숲속으로 사라지던 어린 전사들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후일담) 감옥에서 들었기 때문에 후대의 사가들이 확인해야 한다. 지서장은 다음날 임실 경찰서에 가서 사건 보고를 했고 상부로부터 추궁을 받자 우리의 생사에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이 추궁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3시까지 버텼다. 당신들은 우리를 구출할 생각이나 했는가 하고 들이댔다고 한다. 그래서 파면되지 않고 현직을 유지한 지서장은 무척 고맙게 여긴 우리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지와족 500켤레를 전주에서 구입, 우리 부대에 보내려고 운반하다가 발각되어 오년 징역형을 받았단다. 정과 의리, 사람의 내음이 난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운암 해방작전을 끝으로 적의 대공세에 우리 동무들은 일대 타격을 받았다. 적은 1개 군단병력과 지방경찰 청년단체를 합해서 약 오만 병력으로 변산과 경남 동무를 제외한 남쪽 전역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였다. 우리 부대는 쌍치에서 회문산으로 원통산 용골산 성수산으로 이동하며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또 적의 포위망에 말려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투를 하면서 밤에는 멀리 강행군을 했다. 그날은 쌍치 국사봉 방향으로 골 깊숙이 적의 대부대가 들어오고 농바위를 점령한 적들이 능선을 타고 우리가 있는 북재앞 고지로 진격해왔다. 이틀을 꼬박 못 잔 동무들은 이미 싸움이 붙었는데 꾸벅꾸벅 졸았다. 잠은 참으로 무심한 것이다. 적들이 까맣게 총을 쏘면서 기어 올라왔다. 탄환이 풍부한 때라 맞불질을 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오후 네 시쯤 되었을 것이다. 옆에 있던 박동주 동무가 머리를 박고 있었다. 총알이 비오듯 날아오는데 겁을 먹은 것인가. “박 동무! 총 쏴!” 총을 쏘라고 했는데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배를 땅에 깐 채 접근해서 박 동무의 머리를 들었다. 아! 이럴 수가 옆 동무를 보다가 총을 맞은 듯 두 눈이 빠져서 볼 밑에 늘어져 있었다. 동무들이 기어서 박 동무의 시신을 끌고 갔다. 박동주 동무는 17세의 최연소 소대장이었다. 15세 때부터 총을 들고 싸운 구 빨치산 출신의 장래가 유망한 소년이었다. 동생을 잃어버린 듯……. | ||||
출처 : 바른몸짓 바른생각
글쓴이 : 높이나는새 원글보기
메모 :
'역사 > 현대사 재조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승만=이명박 평행이론 (0) | 2012.04.19 |
---|---|
[스크랩] 이승만이는 과연 한국인이였는가? (0) | 2012.04.03 |
[스크랩] { 실록, " 군인 박정희, 친일과 좌익의 기록 } 1949년 군사재판 (0) | 2012.03.25 |
[스크랩] "北, 5.16 쿠데타 당시 성격파악 부심" (0) | 2012.03.23 |
[스크랩] 제주 4,3당시 김익렬제주9연대장나중에 육군중장의 유고 (0) | 201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