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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12살때부터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고 자부한 그림 천재 피카소는 스페인 남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열 네살에 한 달이 걸릴 그림을 단 하루만에 그려내기도 했으며, 열 여섯에서는 모든 콩쿨을 석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열 여덟살에 스페인 대표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이후 피카소가 살던 당시의 스페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 문명에 비해 변두리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리는 들라크루와와 마네로 인해 20세기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구요. 따라서 19살의 피카소가 파리를 동경하고 그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파리는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 였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그는 넋을 잃었습니다. 또한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가 단 하나뿐이던 파리 몽마르트에서의 고통스런 생활을 견디어 낸 건 피카소의 열정이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피카소의 화풍을 일컬어 '청색시대, 분홍시대' 등으로 나누곤 합니다. 그 구분은 대부분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영향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과 궁핍한 생활이 그의 화면에 차가운 청색 단색조의 "청색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후 그의 첫 여자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장미시대"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한 여성편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생 7명의 여자와 살았는 데 두 명은 그를 잊지 못해 자살하고, 두 명은 지나친 질투로 정신이상이 되었으며 한 여자는 요절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여자들이 모두 "그와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두번째 여자 청순 가련한 에바는 친구의 연인이었지만 열렬히 사랑했으나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 연인이었던 발레리나 올가와는 아들도 있었으며 정식 결혼도 하였습니다. 마흔 살에 거부가 된 피카소는 올가의 사치에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17살이었던 네번째 여자 마리 테레즈를 만나고 그녀는 피카소에게 초현실주의 영향을 주었으며 최고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딸을 낳은 22살의 테레즈를 버린 피카소가 만난 도라는 다섯번째 여자였고, 그 후에 만난 21살의 프랑수아즈는 법대를 나온 지적이며 자유분방한 여자였습니다. 일곱번째 연인 자클린은 그보다 40년 연하의 여자로 절대 헌신형이었으며 피카소 말년의 생애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준 여자였습니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인 피카소였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정열과 독특한 개성은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카페에서 열기찬 토론이나 즉흥적 퍼포먼스를 즐겼던 그의 광란적 취미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937년 4월 26일 히틀러가 3시간 동안이나 바스크의 작은 도시를 무차별 융단 폭격하여 주민 7천명 중 1천 이상이 학살당하고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미친 사람처럼 24피이트 너비 11피이트 그의 대표적 작품 <게르니카>를 한 달만에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와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이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기재될 정도로 파시즘에 대항한 간판스타가 되어 수많은 추종자가 생겼습니다. "회화는 공격적인 전쟁의 도구" 라고 말한 그는 1차·2차 대전 등 엄청난 전쟁과 변혁의 시기였던 20세기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 선각자였습니다.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의 별장에서 사망한 피카소는 거의 2만점이나 되는 작품과 20세기 가장 유명한 예술인이라는 명성을 남겼습니다. 또한 "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라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