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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LIFE가 공개한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여순 사건)#1 [총89장]

감효전(甘曉典) 2012. 2. 3. 06:44

미국,LIFE가 공개한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여순 사건)#1 [총8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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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간단히 여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사병이 전라남도 여수군(현재 여수시)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부 진압군경이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학살되는 경우가 많았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입대 시 신원조회를 다양한 방법으로 하는 현재의 한국군과는 달리 입대 시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었다. 여기에다 당시 군과 경찰 사이에는 국가주도권을 놓고 가끔 무장충돌이 벌어질 정도로 매우 관계가 좋지 않았다.
14연대 군인들의 봉기와 진압
1948년 10월 19일 :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우익계 인사와 경찰관을 살상하여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보수정당인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을 포함한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70여 명이 살해되었다
10월 19일 : 여수를 점령한 14연대 군인 2천명은 그대로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해 오후에는 순천시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면서 주민들을 살해하고 약탈과 방화 등을 자행하였다. 진압군의 출동으로 사건 발생 8일만에 진압되었다.
10월 21일 : 여순 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다음날인 10월 21일에는 인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10월 21일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10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을 명령하였다.
10월 22일 오후 3시 : 진압군의 순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미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했으며, 읍내는 경무장한 학생들과 좌익세력만이 남아있었다.
10월 23일 오전 : 순천은 진압군의 손에 들어갔다. 진압군은 그대로 갈라져 광양 일대의 반군 주력을 섬멸하며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 2단계로 들어갔다. 반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서 매복, 정규군을 습격하여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부상을 입었다. 이 사이 반군의 주력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여수는 일부 선동 세력과 지방 좌익 세력 및 학생 1천여 명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10월 25일: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으로 시작된 시가전은 이틀동안 계속되었다.
10월 27일: 여순사건이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협조자 색출이 시작되어,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여수·순천 사건의 결과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규모 숙청되는 이른바 숙군작업이 이루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여럿이 일본에 피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이 사건의 발발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이승만의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숫자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사진:life
출처 : 어디로 갈꺼나
글쓴이 : 낭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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