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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감효전(甘曉典) 2017. 8. 28. 07:24

 

운전대를 잡은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의 말이 자주 끊겼다. 조수석에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그의 말을 받아 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삭발은 했지만 그를 출가의 길로 인도했던 한 주검에 연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지난 5월 3일, 충북 제천의 월악산 보광암에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다음의 글은 "성철스님과 맞장 뜨려고 백련암 올라갔죠" 에 이어지는 그의 회상이다.

 

[동생의 죽음] 도대체 무엇이 왔다 가는가?

 

"제대를 했는데 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형, 절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살자'는 내용이었죠."

 

4살 터울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함께 지낸 적이 없었다.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항상 그리워했던 유일한 혈육. 동생은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고등학교 밴드부 악장을 지냈다. 그는 동생이 군에 갈 때에 소질을 살려주려고 해군 군악대를 추천했다. 동생이 충치 때문에 군악대에서 떨어졌을 때에 해병대 헌병감실에 부탁해서 재입대를 시켰다.

 

"제대한 뒤에 한 번 면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명동 근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해군 훈련병들이 훈련을 받다가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복해서 실종됐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습니다. 설마, 내 동생이 거기에 있으리라고는... 밤 10시에 한남동 태평극장 뒤 무허가 판잣집에 들어가니 마당에 불이 훤하게 켜 있더라고요. 친척들이 다 올라와 있었습니다. 먹먹했죠. 세월호 부모님들의 마음을 10분의 1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건 그 때의 기억 때문입니다."

 

1974년 2월 22일이었다. 그는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시신을 찾은 뒤에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동생을 묻었다. 49재를 지내는 동안 그는 4홉들이 소주를 들고 매일 동생 무덤을 찾았단다. 헤어져서 떠돌았던 시절이 서러웠고, 해군 군악대를 추천한 자기가 미웠단다. 그는 비석을 부둥켜안고 절규했다.

 

"도대체, 무엇이 왔다 가는 건가? 죽고 사는 게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는 불구덩이 같은 가슴 속에 이런 질문을 던지다가 49재를 지낸 뒤에 곧바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경북 구미 금강사였다. 대처승(결혼한 스님)이지만 학식이 깊은 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철우 스님의 문하에 들어갔다. 4~5개월 동안 수발을 하면서 다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공양이 끝나고 밤 8시 30분쯤에 뭘 여쭤볼 게 있어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데, 서둘러 끄고 숨기더라고요. 황당해 하는 내 표정을 읽고 '횟배가 있어서 담배를 핀다'고 말하는데,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감춥니까? 스님이 여자와 함께 자든, 담배를 피든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감출 짓을 왜 해요?'라고 말한 뒤에 보따리를 싸서 나왔습니다."

 

그 뒤에 그는 법주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수계를 받고 본격적인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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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반들과 비질을 하는 젊은 날의 명진스님 ⓒ 명진스님

 

[도를 찾아 나서다] "그럼 스님 머리를 삶을까요?"

 

그는 법주사에서 나와 불국사와 송광사 등의 큰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사춘기 때 품었던 물음,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으면서 좌충우돌했다. 큰 스님들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질책을 받기 일쑤였지만, 그는 불가의 '더 센 스님'들을 찾아다녔다. 당시 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두 장면이 있다. '스님은 사춘기'에 적힌 내용과 스님의 말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장면 1. 핏물 떨어지는 소머리 들고 활보... 발칵

 

"저와 친한 도반 스님 소식을 듣고 안동 봉정사에 갔죠. 도반 스님의 혈색이 좋지 않았어요. 간염에 영양실조였습니다. 약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간염에는 소머리를 삶아먹으면 좋다'는 말을 듣고 누비 장삼을 입은 채 안동 시장 정육점에서 소머리를 샀어요. 정육점 주인이 잘 안 보이게 소머리를 포장했는데, 핏물이 나와 종이가 다 찢어지고 소뿔이 드러났습니다. 중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들고 장터를 한참 돌아다녔더니 안동 시내가 발칵 뒤집혔죠.

 

봉정사에 돌아와 솥에 집어넣고 불을 때고 있는데, 핏물을 빼지 않고 그냥 끊여서 누린내가 절 안에 진동했습니다. 안동 시내 포교당의 주지스님과 신도들이 항의를 하러 왔더군요. 봉정사 주지스님도 저를 불러 따졌습니다.

 

'도반 스님이 아파서 약이 된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그래도 어떻게 절에서 소머리를 삶는다는 말이요?'

'그럼 스님의 머리를 삶을까요?'

 

제 말에 스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 도반 스님은 소머리 국을 먹고 병이 나았어요."

 

#장면 2. "성철의 목을 쳐서 마당 밖에... 그 죄가 몇 근?"

 

1978년 겨울이었다. 해인사에 들어가 '목숨 걸고 공부하자'고 결심을 했단다. 하루 24시간 중 16시간을 공부했다. 저녁 11시에 잠자리에 누웠다가 새벽 1시에 일어났다. 하루 종일 벽을 보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절치부심해도 나를 알 수 없어 한밤중에 가야산 상봉에 올라가서 울기도 했단다. 하지만 해탈하고자 하는 것, 견성하고자 하는 것마저도 탐욕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단다.

 

마침 해인사 방장이었던 성철 스님이 법문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법거량'(法擧揚. 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을 할 결심을 했단다.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이 내려오셨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성철 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법문을 하시려 할 때 내가 벌떡 일어났다.

 

- 성철의 목을 한칼에 쳐서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그 죄가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백골연산(白骨連山)이다.'

- 예? 뭐라고요?

'시끄럽다, 앉아라! 저노무 자슥, 열아홉 살 행자 때부터 알았네 몰랐네 하고 다니더니 아직도 저러나, 사기꾼 같은 놈!'

 

빠른 진주 사투리로 '백골연산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백골이 산같이 쌓였다는 것으로 '일어서서 한마디 하는 순간 너는 이미 죽은 놈이다'라는 뜻이다."(<스님은 사춘기>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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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권과 함께 운동권 스님으로 거듭나는 명진 스님. ⓒ 명진 스님

 

[운동권 스님] 감옥은 스님의 공부방

 

"저는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고통과 삶의 문제를 풀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뉴스만 보고 5.18 광주를 폭도들의 난동 정도로 믿었어요. 85년에 대구 민통련 학생이 5.3 인천사태로 수배돼서 홍제암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때 참혹한 실상을 알았습니다. 부천 성고문 사건은 충격이었죠. 문득, 이런 시국에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명진 스님은 당시 대구 민통련 사무국장이었던 권오국씨가 제안한 참선의 가장 좋은 장소에 솔깃했다고 했다.

 

"스님 같은 고민을 가진 분들은 감옥에 갔다 와야 합니다. 독방도 주고, 공부하기도 아주 좋습니다."

 

사실 당시 기독교나 천주교의 사회 참여는 활발했다. 목사와 신부들이 감옥에 가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불교는 침묵하던 때였다. 그는 감옥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 승려대회를 준비했다. 불교재산관리법으로 권력에 종속된 불교의 자주화를 기치로 내건 행사였다. 총무원의 방해 공작으로 무산됐지만 그는 승가대학생 대표자들을 만나 다시 설득했다.

 

불자여 눈을 뜨라

 

1986년 9월7일 해인사에 전국의 승려 2000명이 모였다. 그는 사회자였다.

 

"당시 대회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경내에서 끝낼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금산사의 지광 스님이 내 눈 앞에서 부엌칼로 자기 손을 내리쳐서 손가락 4개를 자른 뒤에 광목천을 꺼내 '불자여 눈을 뜨라'라고 혈서를 썼습니다. 흥분한 제 입에서 '방언'이 터졌어요. 피를 토하듯 선동했죠. 스님들과 함께 해인사 바깥으로 나가서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불을 질렀습니다. 서울에서 온 승가대학교 스님들이 여기저기에 붉은 스프레이로 '이순자는 과부돼라'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분노의 행진은 안암동 로터리에서 막혔다.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에 나섰고 경찰은 개운사까지 들어와서 15명을 잡아갔다. 몇 명의 승려는 수배됐다. 현상금 50만원이 붙은 전단지가 거리에 나붙었다. 그 속에 명진 스님은 없었다.

 

"기분 더럽게 나쁘더라고요. 대회를 기획하고 사회까지 봤는데 수배가 안 됐으니... 다른 스님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감옥 가서 공부하겠다는 그의 집념(?)은 집요했다. 1986년에 전두환 정권이 사찰을 짓밟았던 10.27 법란 규탄대회를 조계사에서 열기로 하고 그는 감옥에 가기 적당한 직책인 위원장을 맡았다. 주변에서도 '이번엔 무조건 감옥에 간다'고 말했단다. 시골에서 상경해서 대회 바로 전날에 낙원동의 여관에 묵었는데, 같이 활동하던 불교활동가가 '오늘 저녁 기분이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신랑이 신부방에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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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도중 백골단에 끌려가는 명진 스님. ⓒ 명진스님

 

멋쟁이 스님

 

그는 봉은사에서 시국토론을 한 뒤 4차선 도로를 막고 연좌농성을 하다가 경찰 '백골단'에 끌려갔다.

 

"규탄대회 비용도 내가 마련했고, 플래카드도, 조직 동원도 내가 준비했다. 모든 걸 내가 했다고 했죠. 조서를 만들던 경찰관이 당황해서 말리더라고요. '스님, 이러시면 너무 오래 감옥에서 삽니다'라고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멋쟁이 스님이 왔다면서 강남경찰서 여경과 시경에서 구경을 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감옥은 스님의 공부방이었다. 리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 <해방 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 등 책을 보면서 근현대사 질곡에 눈을 떴다. 친일 문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이 분단된 현실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해 왔고, 민중의 삶을 핍박해 왔는지를 알았단다. 과거 죄를 묻지 않으면 미래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단다.

"개인의 생로병사만이 고통인가? 사회적 고통은 어찌할 것인가? 사회적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죠. 그러던 중 제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은 성철 스님은 '거기 놔두면 큰 골병이 드니, 해인사 곡간에 가둬 놓더라도 끌어오라'고 말하면서 변호사 수임료 3백만 원을 내줬고, 조영래 변호사가 제 변호사로 선임됐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매캐한 거리에서 승려를 보기 힘든 시기였기에 그는 출소한 뒤부터 '불교계 운동권 스타'로 떠올랐다. 중앙승가대학교 학생들이 여러 번 개운사 주지로 와 달라고 간청해서 1987년 3월에 개운사 주지직을 맡았다.

 

"사람들은 개운사를 '제2의 명동성당'으로 불렀습니다. 절 안에서 반정부 시위와 집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시법 위반으로 여러 번 경찰서에 드나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았습니다. 백기완 선생, 리영희 교수, 함세웅 신부, 김중배 전 문화방송 사장, 염무웅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 등. 1987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금이 해제됐을 때 첫 강연을 개운사에서 했죠. 전 그 강연을 강행한 책임을 지고 개운사 주지직을 내려놓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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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진 스님은 감옥에서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다. ⓒ 명진스님

 

"부처를 도끼로 빠개... 어떤 게 진짜 부처냐"

 

당시의 인연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끈끈했다. 이들은 지난달 31일 명진 스님의 승적박탈 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사회원로 40여 명의 기자회견에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왜 명진 스님을 위해 모였을까? 지난 2015년 6월 30일 '장산곶매 등산패 20주년 기념 산행'을 동행취재 했던 기자가 쓴 당시 기사([10만인리포트-아만남] 장산곶매 등산패 20주년 기념 산행②) 중에 명진 스님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오대산 산중 연설 발언을 발췌한다.

 

"이름은 없었지만 내공이 있는 스님(단하선사)인데 절에 들어가서 자려고 보니 방이 추워요. 돌아다니면서 아궁이 군불을 때려고 장작을 찾으니 장작이 없어요.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니 보니 부처님이 목불이에요. 목불을 안고 나와서 아궁이 앞에서 도끼로 빡빡 빠개서 군불을 땝니다.

 

그렇게 하룻밤을 뜨뜻하게 잤어요. 그 다음날 주지가 새벽예불을 보러 나갔더니 법당에 부처님이 없어진 거예요. 주지스님이 방 앞으로 가보니 도끼로 부처를 빠개서 땐 흔적이 남아 있는 거예요. 방에 쫓아 들어가서 자고 있는 스님의 멱살을 붙잡고 '너 이놈아, 아무리 추워도 그렇지! 세상에 부처님을 빠개서 군불을 때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답니다.

 

단하스님이 일어나서 '내가 어제 부처를 아궁이에 넣었단 말이냐? 나무부처가 산부처를 따뜻하게 해줬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답니다. '금부처는 용광로는 못 견디고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못 견디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에 들어가면 타버리는 데 어떤 게 진짜 부처냐? 너 이놈아! 부처를 바로 대봐라!' 이 말을 듣고 주지가 꽉 막혀 버립니다.

 

세상에 부처도 허상이고 모셔놓은 게 모두 헛된 것인데, 헛된 것에 엎드려서 돈을 내놓고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간다고 좋아합니다. 천당과 극락이 그렇게 좋은가요? 천당은 새가 울고 꿀이 흐르고 온갖 좋은 것을 모아놓은 곳인데 거기서 영생토록 못 나오면 시설 잘 된 감옥입니다.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은 종교가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협박, 공갈쳐서 돈을 뜯고 삥 뜯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 "아! 명진 잘한다") 이런 종교는 있을 필요 없습니다. 남한테 악한 짓 안 하고 착한 일 하고 돈 생기면 불쌍한 사람 도와주면 이게 자비심이고 사랑입니다. 생명을 긍휼하게 여기고 연민을 느끼는 게 종교입니다. 종교는 친절이고 자비이고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겁니다. 나는 이걸 모르는 종교는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라는 추임새가 터져 나왔고 한 등산객은 "명진 스님 팬"이라면서 "2부는 없나요?"라며 아쉬워했다. 백 소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다들 만 원씩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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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진 스님의 젊은 시절 모습. ⓒ 명진스님

 

* 3편은 명진 스님이 불교 종단 개혁운동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겪는 종교인으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당초 명진 스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3편에 걸쳐 소개하려고 했지만, 일부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5편으로 늘일 예정이다.)

 

☞명진 스님 ① 나를 찾는 길 : "성철스님과 맞장 뜨려고 백련암 올라갔죠"

 

10만인클럽 후원

명진 스님은 오마이뉴스에 매달 1만원 이상씩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10만인클럽 회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을 희망하시는 분은 010-3270-3828(10만인클럽 공용 핸드폰)로 전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오마이뉴스기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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