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통문 (四發通文)

내 이름은 김순악.

감효전(甘曉典) 2016. 1. 29. 13:21

내 이름은 김순악.

 

1928년 6월 태어나 2010년 1월 죽었다.

이번에 외교부 차관한테 “당신 어느 나라 소속이냐”고 호통쳤던 이용수 할머니하고 같은 고향 동갑 친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처녀 공출’로 마을이 뒤숭숭해도 양반집 규수들은 별 걱정 안 했다. 소작농의 딸들만 끌려갔다.

 

‘살려고 친일했다. 그 시절엔 모두 친일했다’고 지껄이는 이들은 친일 안 했어도 살 만했던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친일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실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어린 상추잎을 된장에 찍어 아침밥 먹다가 댓바람에 나섰다.

 

마을 어른이 일본군에게 나를 넘겼다.

공장에는 가지 않고 국경 넘어 하얼빈으로 내몽골로 끌려갔다.

 

기차에서 울었다.

그걸 두고 ‘제 발로 갔다’고 씨부리는 놈들의 입을 다 꿰매버리고 싶다.

 

방에는 다다미 두 장이 있었다.

 

처녀들은 열셋 아니면 열넷,

기껏해야 나처럼 열여섯.

 

군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지퍼만 내렸다.

아프다고 하면 때렸다.

 

평일엔 10~20명이 왔다.

주말엔 30~40명이 왔다.

 

아래가 헐고 고름이 찼다.

가제나 솜을 구해 닦았다.

지쳐 잠들면 가슴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1년쯤 지났을까.

일본군은 조선 여자들을 버리고 사라졌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한테 화풀이했다.

“조선 갈보”라며 때렸다.

길도 모르면서 길을 나섰다.

수수를 삶아 먹으며 조선 땅에 도착했다.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돈이라도 벌어야 부모 얼굴을 볼 것 같았다.

배운 게 없어 술장사, 밥장사, 식모를 하며 살았다.

 

이번엔 조선 사람들한테 천한 취급 받았다.

군산으로 여수로 동두천으로 다녔다.

 

미군을 만나 낳은 혼혈 아들은 술만 취하면 달려들었다.

 

“와 나를 낳았노. 그때 죽이뿌지. 와 나를 받았노.”

 

같이 끌어안고 울었다.

아들은 술병으로 나중에 죽어버렸다.

 

다 늙은 뒤 고향 경북 경산에 혼자 왔다.

 

폐가에서 지내며 농사일을 거들어 새참을 얻어먹었다. 마음은 자꾸 갈고리처럼 구부러졌다.

 

2000년 1월,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지정해줬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이가 생겼다.

이용수 할머니도 그때 만났다.

어울리는 날이면 함께 노래 불렀다.

 

“꽃다운 이팔소녀는 울어라도 보았으면,

철없는 사랑에 울기라도 했더라면.”

좋은 날은 잠깐이었다.

 

암에 걸렸다.

 

족두리 쓰고 시집가는 게 소원이었으니

상여에 꽃을 달아달라고 유언했다.

 

끌려간 조선 처녀가 20만 명이라지만

그조차 정확하지 않다.

 

병들어 죽고,

굶어 죽고,

도망치다 맞아 죽은 동무들을 나는 보았다.

 

누가 얼마나 어디로 끌고 갔는지

한국도 일본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에 신고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238명이라지만,

 

기막힌 한을 혼자 간직하다 죽은 사람,

죽지 못해 그냥 사는 사람이 또 얼마이겠는가.

 

설마, 아흔이 되어가는 마흔 명 남짓 생존자들이 어서 죽길 바라는 건가.

 

한번이라도 그런 일을 당하면

평생 고통스럽다고 요즘 사람들은 말한다.

 

열네댓 나이에 몇 년씩 매일 당했던 그 지경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생각해보았는가.

 

그러고도 살아낸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 가는가.

시커먼 속으로 누운 그 무덤 자리에

과연 꽃이 피는지 궁금한가.

 

왜 당신들끼리 밀약하여 우리 입을 틀어막는가.

 

일본군의 더러운 지퍼를

왜 한국 정부가 앞장서 닫아주는가.

 

미국·일본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다

나라 뺏겨 소녀들이 잡혀간 역사를 잊었는가.

 

일부러 지우고 싶은가.

 

나를 능멸하여

죽이고

천시하여

죽이고

수치스럽게 또 죽이는 너희.

 

도대체 누구인가.

 

<한겨레 21, 안수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