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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8개월부터 무기까지 “다 쏴죽여라”…누구의 책임인가

감효전(甘曉典) 2011. 11. 2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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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8개월부터 무기까지 “다 쏴죽여라”…누구의 책임인가
재판은 집단학살을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
2011년 07월 15일 (금) 14:27:52 박효주 기자 hj0308@newspost.kr

   
 
[뉴스포스트= 박효주 기자] 지난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1950년 7월 이후 부산과 경남 지역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3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희생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재소자 대부분은 사형수가 아니었는데도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희생됐다며 비록 전시였다고는 해도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집단 학살한 것은 범죄 행위라고 지적했다. 비인간적 집단학살에 희생된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고통 그리고 국가의 파렴치한 범법행위를 <뉴스포스트>가 집중 조명했다.

미군정이 시작되던 1945년 9월초순 남한의 형무소 수감자는 모두 2천6백여명 이었다. 그러나 해방 1년이 채 안 된 1946년 7월 이미 형무소는 수감자가 1만7천여 염을 초과하였다. 미군정 하의 수형자 대부분은 소요사태와 관련된 정치범이 아닌 경제적 곤궁 때문에 수감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말기인 1948년 봄 수형자의 숫자는 2만2천여명을 상회하였고, 정치범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또한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등으로 수형자 수가 급증하게 되어 1949년 전국형무소의 수용인원은 무려 3만5천여명이었다. 즉, 좌우대립의 양상이 폭력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면서 재소자 수가 한 해 동안 1만3천여 명이 증가했다.

당시 7개 형무소를 방문하여 형무소 재소자들의 과도한 수용상황에 대해 보도한 언론기사를 살펴보면 “전기 7개 형무소는 모두 정원의 약 4, 5할을 초과하여 한 평당 수용자 수는 최저 6명으로부터 최고 8명으로 되어있는데, 죄수들의 말에 의하면 저녁에 잘 때가 되면 서로 머리를 반대편에 놓고 다리는 서로 사이에 넣고 자는데 누운 사람의 어깨가 서로 깔리고 덮이고 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몸 전체가 진통한다고 하여 더 비좁은 곳은 교대로 잔다고 하였다. 특히 질식 상태에 빠진 곳은 대구형무소였는데 1천5백여명 정원에 현재 수용은 3천68명으로 강당, 창고, 작업장 할 것 없이 모두 감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급격하게 증가하던 재소자들의 숫자는 1950년 1월 전국 19개 형무소에 4만 8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적정 수용인원의 두 배를 훨씬 넘어섰다. 따라서 전국형무소는 수용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재소자를 수용하여 재소자들의 수감생활은 극도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마산․진주에서 최소 3500여명 학살

부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8월, 9월 세차례에 걸쳐 최소 1천5백여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유승호씨외 147명뿐이다.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하였다. 재소자 학살과 동시에 8월과 9월 사이 부산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부산지구CIC와 부산지구헌병대, 부산 전 지역 경찰들에 의해 연행된 후 부산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과거 좌익 경력 및 사상 정도에 따라 A,B.C로 분류되어 재소자들과 함께 집단 학살되었다. 7월 발부터 9월 수복 전까지 형무소에 상주하던 부산지구CIC와 부산지구헌병대, 부산지역 경찰들은 최소 1천5백여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능선과 해운대구 장산골짜기에서 집단총살하거나,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했다.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초와 말경, 8월, 9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최소 717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육군헌병대에 인계되어 집단 살해되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배명기씨외 358명이다.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7월 중순부터 9월까지 마산지역 상당수의 보도연맹원들은 마산지구CIC와 마산육군헌병대, 마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예비검속된 후 마산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A,B,C로 분류되어 재소자들과 함께 집단 살해되었다. 7월부터 9월까지 형무소에 상주하던 마산지구CIC와 마산지구헌병대, 마산경찰서 경찰들은 최소 717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서 수장하였다.

진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최소 1천2백여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진주지구CIC와 진주지구헌병대,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음 김성홍씨 외 69명이다. 진주형부소 재소자들과 7월부터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 안에 상주하던 진주지구CIC와 진주지구헌병대, 경찰들에 의해 집단총살 당하였다.

진실화해위 조사결과, 신청 사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부산형무소 36명, 마산형무소 63명, 진주형무소 64명 등 총163명이다. 또한 신청사건 이외에 국가 공식 기록과 참고인 조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총 414명이다.

   
 

재판은 무의미한 ‘요식행위’

희생이 확인된 형무소 재소자들은 육군형사법․국방경비법 위반자, 포고령․소요․국가보안법 위반자, 특별조치령 위반자들이었다. 그중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62%로 가장 많았고 특별조치령 위반자가 15.5%, 포고령 위반자 10.3% 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희생이 확인된 재소자들의 형기는 징역 8월에서 무기까지 다양했으나 희생자 대부분이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였다. 따라서 희생된 재소자들은 형기에 관계없이 전시 하 좌익수라는 이유로 집단살해되었다. 재소자뿐만 아니라 각 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남하하는 인민군에게 동조하여 후방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

직접적인 가해기관은 각 지역에 주둔한 CIC와 헌병대 및 각 지역 경찰이다. 각 지역 경찰이 예비검속된 보도염맹원을 형무소에 구금하면 형무소에 상주하던 CIC가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심사․분류하여 헌병대에 인도하였고, 헌병대는 인도받은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집단총살하거나 수장하였다.

전시계엄령 하에서 계엄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각 지역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헌병대에 인계되어 집단살해되었고,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본 사건의 최종적 책임은 계엄령의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계엄령 선포 이후 본 사건 관련 재소자들은 미결수․기결수 여부와 관계없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헌병대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본 사건과 관련된 기결수들은 사형수가 아니었으며, 형 확정 기결수를 다시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처형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다.

또한 군법회의에 회부된 미결수 일부는 ‘고등군법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조치령’에서 명시한 수사나 공소절차가 생략된 채 곧바로 군법회의에 넘겨져 집단 처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1950년 9월 정일권 총사령관의 ‘형무소 수감 미결죄수 처리’ 지시 이후 민간인 범죄사건과 미결사건에 대해 군법회의 회부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9월 말까지 본 사건 관련 민간인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집단 살해당했다.

당시 군법회의는 불법적으로 운영된 점이 확인된다. 조사결과, 마산지구 계엄고등군법회의의 경우 ‘군법회의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조치령’에서 규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운영되었다. 마산 계엄고등군법회의의 경우 심판관은 1명이었으며(규정은 5명이상), 검찰관 1명이 하루에 159명을 사실심리하는 등 지극히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대부분 집단 살해하였다. 또한 계엄당국은 군법회의 개최에 관한 계엄사령관의 승인과 집행 명령이 없는 상태에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집단살해하고, 사후에 문서를 조작하여 승인받는 형식을 취했다. 따라서 본 사건 관련 일부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의 살해과정에 드러난 군법회의는 적법한 절차조차 지키지 않았으며, 사실상 집단학살을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시신이 너무 많아 바위로 눌러

한국전쟁 발발 후, 당시 헌병의 재소자 인도 요구에 따라 당시 형무소 소장은 형무관들에게 재소자 신분장을 전부 소장실로 가져 오라고 했다. 그 다음, 국가보안법, 포고령, 국방경비법 위반 등 정치·사상범과 10년 이상의 일반사범을 분류했다. 당시 재소자 분류 작업에 참여한 한 형무관은 이렇게 증언했다.

“재소자 신분장을 전부 소장실로 가지고 올라오라고 했다. (중략) 국가보안법이나 포고령 위반, 국방경비법 등 정치·사상범과 10년 이상의 일반사범의 신분장은 전부 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게,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신분장 첫 장의 죄명만 보고 분류했다. 10년 이상의 일반사범의 경우 10년을 받았어도, 가령 5년 이상의 형을 산 사람과 감형 받은 사람은 구분을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그래서 10년 형을 받고 8년을 산 사람도 죽었다. 이런 점이 매우 애석했다.”

이렇게 분류된 정치·사상범 등은 형무관들에게 묶여서 헌병들이 징발한 트럭에 실렸다. 이들은 희생 장소까지 이송됐다. 당시 재소자의 호송업무를 담당한 한 형무관의 증언에 의하면 “뒤로다가 두 사람을, 한 사람 왼손하고 옆 사람 오른손 하고 어긋매끼로 묶었다. 묶어서 감방에서부터 현관까지 끌고 왔다. (중략) 끌고 와서 재소자들을, 헌병이 징발한 트럭에 가득 실었다. 헌병들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재소자를 트럭에 꽉꽉 채웠다. 재소자들은 그때까지 트럭에 서있는 채로 있었다. 그리고 헌병들은 재소자들을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앉으라고 했다. 못 앉을 것 같은가? 재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앉아서 아주 납작해졌다”고 말했다.
현장을 지휘했던 헌병대 중위는 뒤에서 권총을 들고서, 헌병과 경찰이 사격을 주저하거나 청년방위대들이 시신 쌓는 데 머뭇거리면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고 공포탄을 쏘았다. 당시 총살 현장에 동원된 경찰 한 명은 이렇게 증언했다.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다. 헌병 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다”

명백한 국가의 범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하고, 일부는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시킨 범죄행위이다.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가족의 행방조차 알지 못한 채 ‘빨갱이’가족이라는 사회적차별과 연좌제의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로 인해 남은 가족들은 경제적․심리적으로 고통 받았으며, 남은 유족이 다시 가해기관에 연행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고, 심지어 자살을 하는 등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어떤 사건에 대하여 일단 판결이 내리고 그것이 확정되면 그 사건을 다시 심리·재판하지 않는다는 원칙)를 위반한 것”이라며 “당시 군법회의는 요식적인 행위였을 뿐 사실상 집단 학살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이 통치하고 있던 비전투·비교전 지역인 부산·경남 지역에서 단순히 남하하는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 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은 범죄행위”라고 덧붙였다. 이어 국가에 유족들에 대한 사과, 위령사업 지원, 민간인 희생 내용 공식간행물 반영, 인권교육 강화 등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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