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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좌익의 기록 5] 군관학교·일 육사 시절
감효전(甘曉典)
2012. 7. 1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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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14 18:51 ㅣ최종 업데이트 04.08.19 11:29
출처 : "목표 위해 죽음 불사할만큼 성실"
우등 성적으로 4년만에 '황군' 소위 - 오마이뉴스 -정운현님 |
3월 24일자 <만주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졸업식은 오전 10시, 남운(南雲親一郞. 육군 중장. 교장 재임기간 1940~1943) 군관학교 교장의 '서류봉정과 상황보고'에 이어 우(于) 치안부대신 집행 하에 관병식을 한 후 졸업생 일동은 무도장에 정렬, 생도대표 강견상언(岡見尙彦. 일본계) 등 2명의 강연과 유도 및 검도 시범, 측도 작업 등 실습행사를 가졌다. 이어 11시50분부터 다시 교정에 집결한 후 졸업증서 수여와 함께 시종무관으로부터 우등생에 대한 시상식이 거행됐다. 이날 우등상 수상자는 모두 5명으로, 일본계 2명, 만주계 2명, 그리고 조선계가 1명이었다. 조선계 1명이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들은 만주국 부의 황제가 내린 금시계를 은사품으로 받았다. 만주국 황제 부의가 내린 금시계 받아 <만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가 만주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0년 4월 4일이었다. 그 해 2월 중순 그가 문경에서 만주로 향한 지 보름여 만이다. 교사직은 3월 31일부로 '의원면직' 처리됐다. 어릴 적부터 군인을 꿈꿨던 그는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이다. 박정희가 군관학교 시험을 치기 위해 만주행에 오른 것은 1939년 9월 하순경이다. 그 때 아직 그는 교사 신분이었다.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던 그는 만주로 향하기 전 주위사람들에게는 "잠시 어디 좀 다녀 오겠다"(여제자 정순옥씨 증언)며 말을 아꼈다. 조선땅을 지나 봉천-신경-길림을 거쳐 수험지인 목단강까지는 멀고 먼 거리였다.
일본은 1931년 9월 관동군(關東軍)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강점한 뒤 이듬해 3월 1일 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하고는 청조(淸朝)의 폐제(廢帝. 宣統帝) 부의를 집정(執政)에 앉혔다. 수도는 신경(新京. 지금의 長春),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정했는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동학원'은 이 연호에서 따온 것이다.
봉천, 신경 두 군관학교를 통털어 조선인 입교생들의 상당수는 함경도, 평안도 지역, 즉 이북지역 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봉천군관학교 5기생 출신인 정일권의 권유가 큰 영향을 끼쳤다. (신경 5기생 강문봉의 경우 박정희가 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하면서 상을 받는 뉴스영화를 보고 입교를 결심했다는 얘기도 있다.) 박정희처럼 이남지역에서 군관학교에 입교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봉천 5기 출신인 송석하(99년 작고)가 그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데 그는 충북 영동 출신으로 청주고보를 다니다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신경군관학교 1기생 출신인 방원철씨(용정 출신. 육본 초대 전사감. 육군대령 예편. 99년 작고)가 지난 97년 필자에게 남긴 증언이 이같은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광명중학 졸업 직전 당시 정일권 선배가 장교가 돼 학교에 와서 군관학교 입교를 권유해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해서 군관학교 시험을 본 것이 합격이 돼 입교했다. 그러나 당시(16세)로선 애국투쟁을 위해 군인이 되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봉천 5기생 정일권의 권유가 입교에 큰 영향 신경 1기생은 전체 13명으로, 광명중학에서 20명이 시험을 봐 12명이 합격하였고, 유일하게 이기건(육군준장 예편)이 안동(현 단동)중학 출신이었다. 당시 광명중학은 일반 중학교와는 달리 5년제여서 졸업 후 일본내 대학 진학도 가능했으며, 4학년부터 군관학교 입학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인근 대성중학의 경우 4년제여서 졸업 후 광명중학 4학년에 편입, 졸업한 예(고 문익환 목사 등)가 더러 있었다. 지난 99년 필자는 동북3성 내 항일유적지 취재길에 장춘에 들러 옛 신경군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장춘 시내에서 이도하자(二道河子)를 거쳐 대략 4km 정도 떨어진, 길림으로 가는 도중 납납둔에 위치해 있었다. 교사는 거의 원형대로 보전돼 있었는데, 현재 중국군 기갑학교로 사용중이었다. 1기생 방원철씨는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이곳 주변에 달래가 많아 조선인 생도들은 이를 캐 '달래김치'를 만들어 먹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사관학교 생도들의 일상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생도들은 새벽 6시 기상하여 점호를 마친 후 먼저 동쪽을 향해 일본 천황에게 '궁성요배'를 한 후 다시 서쪽을 향해 만주국 황제에게 '궁성요배'를 올리고는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예과시절 오전은 대부분 학과수업을 하였으며, 오후에는 연병장이나 야외에서 격검·총검술·유도·보병전투 등 술과(術課. 훈련)교육을 받았다. 조선인 생도들이 포함된 만계(滿系) 2기생 240명은 모두 2개 중대 8개 구대로 편성, 1개 구대는 30명씩이었다. 2기생이 교육중일 당시 만계 생도중대는 모두 3개 중대로, 1기생(90명)이 1중대, 2기생이 2·3중대였다. 박정희 생도는 제3중대 제3구대 소속이었다. 그가 속했던 3 중대장은 부의 황제의 바로 아래 동생 부걸(溥杰) 소좌(소령)이었으며, 구대장은 중국인 장연지(張連芝) 중위였다. 매일 아침마다 일본 천황-만주국 황제에 '궁성요배' 박정희와 동기생으로 당시 3중대 2구대 소속이었으며, 임관 후 만주군 보병8단에서 같이 근무했던 중국인 고경인씨(97년 당시 75세로 미국 라스베가스 거주)는 97년 필자에게 당시 박정희 생도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자기 목표 달성을 위해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성실하고 신중했다. 언젠가 당시로선 금기였던 조선역사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어물어물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사람이나 역사에 대한 평론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조선인 동기생 중에서 뭔가 특성이 있는 사람으로 이한림과 박정희 두 사람 정도였다." 박정희보다 1년 선배로 그가 속했던 제3중대 취체(取締. 감독)생도를 지낸 방원철씨는 그에 대한 기억 하나를 필자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2기생이 입교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2기생 김재풍과 박정희를 따로 불러내 기합을 준 적이 있다. 박정희는 1기생 선배들한테 좀 뻣뻣하게 대하고, 김재풍은 인사할 때 잘 웃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걸 두고 1기생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군기가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동기생 중에 덩치가 큰 내가 두 사람을 불러 '이빨 꽉 깨물어!'하고 주먹으로 몇 대씩 때렸다. 김재풍과 달리 박정희는 내 주먹을 맞고도 딱 버텨냈다. 순간 '독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교 후 처음 맞은 것이어서 아마 평생 못잊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군관학교 시절 성적도 우수했고, 매사에 성실한 생도였다는 게 동기생들의 대체적인 증언이다. 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같이 다닌 중국인 동기생 반의정씨(潘義靜. 97년 당시 73세. 방사선과 의사 출신)의 97년 당시의 증언을 들어보자. "교양수업이나 군사훈련 중에도 부동자세로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모습에 감히 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또 휴식중에도 말 수가 적고 타인과의 접촉을 삼갔는데, 단기 카즈미(香住. 이한림의 창씨명)와는 종종 한국말로 무슨 얘길 나누곤 했다. 일본 육사 시절에는 그와 같은 보병반에 속해 있었는데 그 때도 학습과 훈련에만 열중하고 대인관계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는 결코 심중의 얘기를 꺼내는 법이 없어 우리는 항상 피상적인 동기생 관계로만 있었다."
4년 2개월 교육 마치고 '황군 소위' 임관 2년 본과 과정을 마치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소련-만주 국경지대인 제제합이(齊齊哈爾) 주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돼 3개월간 견습군관(사관견습) 생활을 했다. 견습군관 시절 그의 계급은 상사 대우였다. 예과 입학 이후 견습사관을 마치기까지의 전체 기간은 대략4년 2개월로, 이 가운데 10개월을 대부(隊付)근무, 즉 현지부대에서 근무를 해야 했다. 박정희는 이 긴 여정을 성실히 마치고 1944년 7월 1일 마침내 '황군(皇軍) 육군소위'로 임관, 만주군에 배치됐다. 그가 해방을 맞은 것은 이로부터 1년 1개월 보름만이었다. 해방으로 그의 1차 군인생활은 일단락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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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등 성적으로 4년만에 '황군' 소위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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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호모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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